다시, 전정국
w. 정국학개론
2013, 열아홉
우리 학교는 매년 같은 곳에서 똑같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시내에 사진관이 하나밖에 없어서 사진관 아저씨가 직접 트럭과 장비를 끌고 학교로 오시곤 하는데, 기본적으로 학교 중앙건물 앞에서 단체사진을 한 번 찍고, 풀숲 어딘가에서 개인사진을 한 번씩 찍는다.
전정국은 졸업사진을 찍는 날 늦잠을 잤다. 제 순서를 놓치는 바람에 여학생들 사이에 껴서 줄을 서 있었는데, 잔뜩 피곤한 표정으로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쳤다.
" 어떻게 하면 열두 시까지 잠을 잘 수가 있지? "
" 야, 나 졸업편지 쓴다고 새벽 네 시에 잤어. "
" 나한테 쓰는 거? "
" 어, 너한테 쓰는 거. 공들여서 썼다. 받으면 잘 읽어라. "
졸업편지는 우리 학교의 전통이었다. 제비뽑기를 통해 받은 종이에 적혀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정말 우연히도 전정국은 나를 뽑았고, 나는 세희를 뽑았다. 내가 본인을 뽑지 않은 것에 대해 전정국은 많이 아쉬워했다.
" 뭐라고 썼는데? "
내 물음에 전정국은 웃기만 한다. 전정국의 옷깃을 잡고 보채려 하는데, 차례가 금세 내 앞으로 다가왔다.
졸업편지는 선생님이 거두어서 타임캡슐처럼 학교 후문에 있는 큰 나무에 묻어놓고 졸업식이 끝나면 찾아가기로 했다. 지금이 5월이니까 졸업식까지는 한참 멀었는데, 졸업식이 끝날 무렵엔 졸업편지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전정국은 사진사 아저씨 뒤에서 뒷짐을 지고 나를 보고있었다. 사진사 아저씨께서 주문하시는 대로 포즈를 취하는 나를 보며 웃기도 하고, 잠깐은 비웃기도 하고. 사진만 다 찍고 나면 보자, 벼르고 있는데, 내 차례가 끝나자마자 전정국이 튀어나와 카메라 앞에서 내 어깨를 끌어당긴다.
" 아저씨 저희 찍어주시면 안 돼요? "
" 뭐야, 너. "
" 사진 돈 안 받고 가게에 걸게 해 드릴게요. "
" 야…! "
" 저 잘생겨서 사람 많이 올걸요. "
뻔뻔한 전정국의 말에 아저씨는 살짝 당황한 표정과 함께 웃음을 짓더니 곧 카메라에 손을 올리신다.
*
2018, 스물넷
시내로 가던 버스가 고장이 났다. 시내에 거의 도착할 무렵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집에서 일찍 출발해 알바 시간까지는 여유가 많은 편이었다. 미안하다며 승객들에게 사과하는 버스 아저씨께 사람 좋은 웃음 한번 짓고 내려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4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 길 찾기가 어렵진 않았다. 한 길로 쭉 가면 곧 번화가의 시작이었다.
햄버거 가게는 시내의 중심부에 있다. 햄버거 가게 바로 앞과 맞은편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동네에서 버스를 타면 시내를 구경할 새도 없이 바로 햄버거 가게에 도착하기 때문에 내가 시내에서 일하고 있는지, 그냥 어느 동네에 있는 햄버거 가게에서 알바를 하는지 구분이 안 갈 때가 많다.
버스가 고장난 덕분에 오늘은 웬일로 시내를 구경하게 생겼다. 시내라고 해 봤자 체인점 투성이에, 특별할 것 없는 곳이지만 고등학교 때까진 이곳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 당시의 내겐 제일 크고 멋진 곳이었는데.
햄버거 가게까지는 10분이 넘게 걸린다. 오래된 상가 여러 개를 지나면 사진관이 있다. 늘 우리 학교 졸업사진을 책임져주는 사진관. 그리고 거기서 참 오랜만에 우리 사진을 보았다.
그날 찍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하복을 입고 있는 전정국과 나. 내 어깨를 끌어당긴 채 환하게 웃고있는 전정국과 카메라 앞에선 늘 어색해지는 나.
아마 이때 찍은 사진을 잘 보관해두었던 것 같은데, 4년 동안 방을 뒤져본 적이 없어 행방을 모르겠다. 다시 찾아도 이미 바래져 있을 텐데 파일이 남아있으면 하나 출력해서 받을까, 오랜만에 사진관을 들어섰다.
" 아저씨, 혹시 밖에 걸려있는 사진 파일 아직 가지고 계시면 하나 뽑아주실 수 있을까요? "
" 무슨 사진이요? "
" 고등학생 남자애랑 여자애 있는 사진이요. 졸업식날 찍은 거. "
" 아아, 그거 마침 인쇄해둔 거 있는데. 이걸 찾는 사람이 또 있네. "
" 또 누가 찾았어요? "
" 사진에 있는 여학생 본인 아니에요? 남학생이 한장 부탁하고 갔지. "
전정국이 왔다고 했다. 와서 나와 같은 부탁을 했다.
가슴이 뛰었다. 전정국이 엮여있는 모든 일에 대해 나는 일관성이 없었다. 어젯밤까진 그 애가 미웠는데, 오늘 아침이 되면 그 애가 너무 좋아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전정국과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그동안 그 애와 나 사이에 벽을 쌓고 있었는데, 겨우 이런 일로 한순간에 무너져내린다.
" 아, 그럼 이거 대신 전해줄래요? 돈은 이미 내고 갔거든, 그 친구가. "
" 아…… "
" 아직 연락하죠? "
" 네…… 전해줄게요… "
투명한 비닐로 감싸져있는 사진 두 장을 받았다. 내 사진과 전정국의 사진. 어쩌면 나는 이 사진을 빌미로 전정국과 만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
전정국의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당장 내일인데, 전화는 커녕 문자도 보내지 못했다. 사진을 들고 너를 불러내는 게 내 욕심으로 비춰질까 두려웠다.
욕심이 맞았다. 나는 전정국이 보고 싶다. 우리 사이에서 우리 이외에 그 어떤 누구도 우리에게 간섭할 수 없을 때, 나는 오로지 그 애만을 느끼고 싶다. 오늘이 지나면 끝이다. 내가 사랑했던 전정국은 아마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내일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전정국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팔짱을 끼고, 반지를 나눠 끼우고, 사랑의 맹세를 하는 그 순간부터 전정국이 전부였던 내 열아홉은 가슴 속에 묻혀 꺼낼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다.
전정국을 봐야 했다. 어떤 말이든 쏟아내야 했다. 전정국이 우리의 열아홉을 쉽게 보낸 것처럼 무정하게 굴어도 나는 너를 봐야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비교적 쉽게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전화를 받고 한참동안 고민하던 전정국은 찝찝한 목소리로 동네에 도착하면 전화하겠다고 했다.
마지막 중에서도 조금 더 아쉬운 마지막과 조금 더 좋은 마지막이 있다면 나는 조금 더 아쉬운 마지막에 서있었고, 조금 더 좋은 마지막을 바랐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니, 이미 내려져있는 결정에 나를 맞춰야 했다.
전정국과의 추억이 깃든 물건은 꽤 많았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어렸을 적부터 우리의 열아홉까지. 나는 우리의 열아홉을 지워내야 했다. 벚꽃나무 앞에서 찍은 사진, 졸업식날 찍은 사진, 심심할 때마다 전정국이 내 교과서에 붙였던 수십장의 포스트잇들, 체육시간마다 넘어지는 나를 위해 전정국이 사준 밴드, 열아홉 생일 때 전정국이 써준 편지, 전정국이 가정 시간에 만들
어주었던 서툰 자수, 세상에 딱 두 장밖에 없는 고등학생 전정국 증명사진. 열아홉을 상자에 담았다. 감정이 무뎌지기 전까진 꺼내지 않을 생각이다.
상자에 넣을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옷장을 뒤지다 교복을 발견했다. 지금은 조금 이른 감이 있는 하복. 얇은 리본줄이 달려있는 남색 칼라와 하얀 셔츠, 주름이 져있는 남색 치마. 꼭 어제 입고 꺼낸 것처럼 깨끗했고 익숙했다. 열아홉에서 멈춰있는 시간을 다시 움직일 거라면 열아홉에서 천천히 시작해야 했다. 오랜만에 교복을 입었고, 전정국은 그런 나를 보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 너도 입어. 네 거 있어. "
우리가 열여덟일 때 비가 세차게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전정국과 나는 집과 조금 먼 산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있었는데, 갑작스런 소나기 때문에 온몸이 다 젖어버린 채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비는 여전히 많이 내리고, 교복이 다 젖어버린 전정국은 우리 집으로 들어와 조금 넓직한 내 옷을 받아 입었고, 그 이후로 전정국 교복은 세탁을 마친 후에도 전정국이 가지고 가지 않아 그 상태 그대로 우리 집에 머물러있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전정국에게 가슴이 뛰는 날이었고, 그래서 옷장 안에 가지런히 접혀있는 전정국의 교복을 볼 때마다 늘 두근거렸다.
전정국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교복을 갈아입고 나왔다. 전정국은 민망하고 부끄러울 때마다 뒷목을 쓰다듬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방문 고리를 잡으며 천천히 걸어나오는 전정국은 제 뒷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부끄러워하는 그 표정이, 교복을 입은 그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앳된 전정국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내가 아는 전정국은 옷을 갈아입은 후 제대로 정리하고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갈아입을 거 뭣하러 정리하냐는 전정국의 말은 꽤 설득력있어 보인다. 전정국이 체육시간마다 하는 말이었다. 오늘도 그렇겠거니, 익숙하게 방 안으로 들어가 전정국의 옷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책상 위에 잘 개어져 있는 후드티와 청바지가 보인다. 급격히 밀려오는 이질적임에 헛웃음을 지으며 다급히 아무 말이나 뱉었다.
" 야, 너 지갑을 이렇게 아무데나 두고 가면 어떡해. "
정리되어 있는 옷 옆에 가지런히 놓인 검은색 장지갑을 쥐고 전정국에게 전해주려는데, 방 안으로 빠르게 달려온 전정국이 내 손에 들린 지갑을 빼앗듯 가져간다. 갑작스레 허전한 손을 물끄러미 한 번 쳐다보고, 왠지 모르게 숨이 차보이는 전정국 얼굴을 한 번 보는데, 전정국이 어색하게 웃으며 지갑을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 뭐,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 "
" 그런 게 있겠냐. "
" …여자친구 사진이라든지. "
" ……. "
전정국이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트렸다. 실수로 던진 한마디로 밀려오는 적막감에 나를 탓하며 전정국 팔을 붙잡았다.
" 나가자. 너랑 가고 싶은 곳 있어. "
*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학교였다. 초등학교, 중학교와 비교해도 그리 크지 않은 학교는 겨우 십 분이면 정문부터 후문까지 한 바퀴를 돌 수 있었다. 운동장도 그리 크지 않았고, 정문 근처에 있는 나무들도 다 고만고만했다. 전정국의 손목을 잡고 건물 안으로 이동했다. 우리의 열아홉이 꽁꽁 숨겨져 있는 곳으로 향했다.
" 기억나? 나 여기 앉았잖아. "
" 기억하지. "
" ……. "
" 점심만 지나면 햇빛 때문에 눈부셔서 수업도 제대로 못 들었잖아. 그, 언제였지. 커튼 뜯어진 날. "
" 그 커튼 네가 뜯은 건 기억하고? "
" 야, 실수였잖아. "
" 얼씨구. "
" 그래서 내가 커튼 다시 붙일 때까지 네 앞에서 햇빛 막아내고 그런 건 기억 안 나? 머리도 좋으면서 꼭 이런 건 쏙 빼더라. "
" 글쎄. "
기억이 나지 않을 리가. 청소 시간에 전정국이 창문을 닦다가 커튼을 뜯어낸 적이 있었다. 무릎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걸 놀라운 순발력으로 커튼을 붙잡아 잠시나마 불안정한 자세로 넘어지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는데, 전정국의 무게를 못 이긴 커튼이 그만 뜯어져버렸다. 전정국은 넘어져버렸고. 전정국은 그날 이후로 팔에 깁스를 했고, 한동안 전정국의 노트필기는 내가 해주었고, 점심도 내가 먹여주었다. 깁스를 한 채 축구도 한 걸 보면 왼손으로 밥도 먹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니 다 핑계였던 것 같다.
먼지가 쌓인 책상과 의자에 앉을 수는 없고 우리가 앉은 자리부터 교탁, 칠판, 뒷편에 있는 게시판과 사물함까지 천천히 둘러보는데, 전정국이 뒤에서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전정국도, 나도 꼭 열아홉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울컥한 마음을 숨기려 애써 웃으며 내 머리카락에 머물러있는 전정국의 손을 쳐내고 교실 밖으로 향했다. 쳐내진 손을 들고 멍한 표정을 짓던 전정국이 곧 헛웃음을 지으며 나를 따라나섰다. 손을 내밀었고, 잠깐 망설이던 전정국은 손을 잡았다.
" 너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던 거 생각난다. "
" 말이었지, 내가. "
" 그때 전정국이 어리고 좋았는데. "
" ……. "
" 웃통도 까고. "
" 변태냐? "
전정국은 축구를 좋아했다. 남자애들이라면 다들 한 번씩은 가져본 축구선수의 꿈을 전정국도 아주 어릴 때 가진 적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였나. 6년 내내 축구선수가 될 거라며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면서 얻게 된 상처가 한둘이 아니었다. 걸핏하면 넘어지고, 걸핏하면 주저앉고. 중학생 땐 학교 강당에 있는 농구장을 자주 가곤 했다. 그때부턴 또 농구선수가 꿈이라며, 3년 내내 농구만 하더니 그때 얻은 상처들도 한가득이다. 고등학생이 되면선 딱히 자기 꿈을 말하지 않았는데, 축구는 아마 취미가 된 것 같았다.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취미.
전정국과 정호석을 포함한 몇 남자애들은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을 누비곤 했는데, 특히 전정국이 그 중에서 제일 튀었다. 같은 학년 애들이야 매일 보는 전정국이지만 다른 학년인 후배나 선배는 얼마 되지 않는 점심시간을 전부 전정국을 보면서 보내는 게 대부분이었다. 물론 나도 그랬고.
사계절 가릴 것 없이 운동장을 차지한 전정국은 아주 더울 때 가끔 웃통을 까곤 했다. 선후배 가릴 것 없이 학교 창문에 다닥다닥 달라붙어있던 그 뽀얀 얼굴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단했지, 아주.
" 너 예전에 한번 웃통 반쯤 까고 달리다가 골대에 머리 박은 적 있잖아. "
" 그날 이후로 안 깠잖아. 쪽팔려서. "
늘 그랬던 것처럼 전정국을 보기 위해 여자애들이 운동장 앞 스탠드와 교실 창문을 차지할 때였다. 전정국이 오랜만에 골을 넣고 신난 마음에 반팔 체육복을 위로 올려 얼굴에 대고 달리던 와중에 그만 골대와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다행인 건 한창 달리는 중이 아니라 달리다 체육복을 내릴 때쯤이었다는 것 정도. 결과적으로 전정국은 뽀얀 이마에 멍을 얻었고, 약간의, 어쩌면 전정국에게는 큰, 웃음소리를 얻게 되었다.
전정국과 계단을 걸어내려오다 잠시 보건실 앞에서 멈춰섰다. 전정국이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본다.
" 나 웬만하면 보건실 잘 안 갔잖아. "
" 어, 보건실 침대 더럽다고. "
" 내가 학교 다니는 3년 중 딱 한 번 보건실을 가봤는데, 그게 언젠지 알아? "
" 그걸 내가 어떻게…… 아, "
별 생각 없이 대답하던 전정국이 떠올랐다는 듯이 탄성을 뱉는다.
전정국이 배구공으로 내 이마를 정통으로 맞췄을 때. 짝피구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정호석과 내가 짝이 된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내 이마를 가격한 적이 있었다. 전정국 말로는 정호석이 워낙 운동신경이 뛰어난 놈이라 내가 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하는데, 원망의 손길이 담겨져 있는 게 느껴져서 그 말이 진심인진 아직도 모르겠다.
그날 처음으로 학교 보건실을 구경해봤다. 보건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나를 보건실 침대에 눕힌 전정국이 내 목 뒤로 베개를 놓아주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어디가 아프냐며, 어쩌다 이렇게 됐냐는 보건 선생님의 물음에 우물쭈물 여차저차 대답한 전정국은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옆에 앉아있었다.
" 너 그날… "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 전정국은 그날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전정국도 알고, 나도 알지만 전정국은 본인만 안다고 생각하는 그런 입맞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던 그날, 이불 끝을 꼭 쥐고 침대에 누워 살풋 잠이 드려던 참에, 바로 옆 침대에 누워있던 전정국이 다가와 바람에 흔들리는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다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덕분에 잠이 달아난 나와 다르게 전정국은 다시 침대로 돌아가 내가 다시 잠들기 전까지도 곤히 잠들어 있더라.
" 그날 뭐? "
" ……. "
" ……. "
" 아니야. "
" 싱겁긴. "
학교는 우리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있었다. 그때처럼 교복을 입고, 그때와 같은 공간에 이렇게 있는데,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원망스러울 정도로, 너무나도 그대로였다, 이곳은.
보건실까지는 가만히 나를 따라오던 전정국이 곧 나를 이끌었다. 도착한 곳은 정문 근처 큰 나무였는데, 큰 나무 근처에는 파란색과 하얀색의 기다란 화분이 번갈아져서 놓여져 있다.
" 아, 이거. 이거 아직도 있네? "
화분 앞에 전정국과 쪼그려 앉았다. 시커먼 흙만 남아있는 화분의 끄트머리에 손을 대고 웃으며 전정국을 보았다.
전정국과 나는 원예부였다. 둘 다 꽃에는 관심이 일절 없었으나 나는 엄마의 권유에, 전정국은 나의 권유에 어쩌다 보니 3년 내내 우리는 원예부였다. 원예부라고 해서 남들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동아리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학교 화분에 꽃을 심고, 집에서 선인장을 키우고, 가끔 주어진 동아리 시간에 학교 근처에 있는 산에 놀러가 꽃 사진을 찍어오면 되는 것, 그것뿐이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화분에 전정국과 내가 꽃을 심은 적이 있다. 무슨 꽃이었는지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흔한, 어쩌면 아주 어려운 꽃이었는데, 학교 앞 문구점에서 대충 고른 씨앗이었다. 이게 우리의 매개체라면 매개체였다. 꽃을 키우면서부터 쉬는시간 틈틈히 건물을 빠져나와 얼마나 자랐나 확인하고, 같이 물을 주고. 꽃이 완전히 자라기 전까지 한동안 우리의 대화 주제는 꽃이었다. 꽃이 완전히 자랐을 때,ㅡ사실 죽은 꽃이 더 많기 때문에 완전히 자란 꽃을 보게 된 건 1년 정도가 지나서였다. 우리의 시작은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 딱 피었을 때 진짜 예뻤는데. "
" ……. "
시커먼 흙을 손으로 휘저으며 꽃이 있던 그때를 회상하는데, 전정국이 말 없이 뚫어져라 쳐다본다. 반짝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잠시 마주쳤던 눈을 어색한 듯 내리깔면 전정국은 커다란 손을 내 머리 위로 올려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랬다. 꽃이 처음 봉오리를 맺었던 날, 들뜬 마음에 전정국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던 날, 나란히 쪼그려 앉아서 힘낸 꽃을 칭찬해주던 날, 전정국은 지금처럼 말 없이 날 쳐다보았고,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추억을 정리하러 왔다가 다시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에 마음이 착잡해진다. 느릿하게 머리를 꾹 누르며 쓰다듬는 전정국의 손을 살짝 피하며 굽혔던 무릎을 폈다. 전정국이 쪼그려 앉은 채 올려다 본다. 교복을 입고 학교 화단에 앉아있는 전정국. 그날의 전정국을 떠올리게 하는 그 애의 모습에 고개를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 가자. "
24시간을 주어도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 전정국과 가본 곳, 전정국과 갈 수 있는 곳, 전정국과 가고 싶은 곳은 한가득인데 해가 벌써 저만큼이나 가있다. 학교에서 반틈을 보낼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결심하고, 조금 더 일찍 만나는 건데. 의미 없는 후회를 느끼며 전정국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를 따라 일어선 전정국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벚꽃 나무였다. 벚꽃이 다 졌을 시기에 벚꽃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지만 꽃이 진 나무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어 불만족스럽진 않았다. 아쉬운 게 있다면 그날의 우리가 보았던 벚꽃나무가 아니라는 것.
" 사진 찍고 싶어. "
" …어? "
" 나 사진 찍어 줘. "
전정국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그 웃음이 약간은 자조적이어서 쓸쓸해 보였다. 전정국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 가서 서봐. "
전정국의 한마디에 셔터를 눌러버릴 새라 와다닥 달려가 나무를 끌어안았다. 그날처럼. 전정국이 찍어주었던 그때처럼. 전정국은 한쪽 무릎을 꿇고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고개를 살짝 꺾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마치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어딘가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전정국을 향해 환히 웃어주었다.
벚꽃나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우리는 말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곧잘 장난을 치던 전정국은 벚꽃나무를 본 순간부터 크게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고 싶은 말이 더는 없었고, 있더라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전정국의 말이 맞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해가 거의 저물 때쯤 집 앞에 도착한 우리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전정국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고개를 떨군 채로 발장난을 치고있었고,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 옷 가져다 줄게. "
전정국을 대문 앞에 세워두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초록색 대문을 열고 작은 앞마당을 거쳐 문을 열면 바로 집 안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내 방이 있고, 옷을 들고 대문으로 나가기까지는 1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전정국의 옷을 쇼핑백에 담아 가지고 나와서는 한참을 대문 뒤에서 서성였다. 전정국도 분명 그걸 알 텐데 굳이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 이거. "
" 어… "
" 그리고 이거. "
옷이 담긴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한 시간 전까지 내 머리를 쓰다듬던 큰 손이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건넨 사진 한 장. 사진으로 시선을 옮긴 전정국이 동요하는 게 눈에 보였다. 애써 흔들리지 않은 척 조심스럽게 사진을 받아든다. 그리고 어디서 났냐는 듯 눈빛으로 물어온다.
" 사진관 갔었다며. "
" …어… "
" 나도 갔었어. 우리 사진 걸려있더라. "
" 응…… "
나도, 전정국도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전정국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무의미한 대답만 반복하면서 손에 쥐여진 사진을 매만졌다. 드디어 마지막이 느껴졌다. 전정국에게 줄 것을 모두 줘버렸고, 더이상 전정국을 붙잡아둘 빌미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진을 내려다보는 전정국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정말 마지막이다. 우리도, 이 감정도.
" 좋아했어. "
" ……. "
" 많이. "
" ……. "
전정국을 좋아한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내뱉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고백을 전했다. 사실은 그보다 더 큰 감정이었지만, 실은 과거형보단 현재형, 어쩌면 미래형으로 닿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조금이나마 덜 이기적일 수 있게 조금의 거짓말을 섞었다.
전정국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낯빛이 어두워진 그 모습이 꼭 4년 전, 전정국이 내게 무정한 말을 남겼을 때와 같아 가슴이 아렸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 결혼식은 갈 거야. "
" …김여주… "
" 우리 친구잖아. 그러니까 갈 거야. "
" ……. "
" 먼저 가. 너 가면 나도 들어갈게. "
전정국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곧 뒤에서 부스럭대던 소리가 들리고는 발걸음 소리가 아주 천천히 멀어졌다. 고요함이 찾아오고도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뒤를 돌면 사라져있을 전정국을 감당하기 어려울 게 뻔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혼자 남고자 했던 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겪으며 조금이나마 더 상처받기 위해서였다. 나를 조금 더 갈기갈기 찢어놓아야만 그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를 돌았을 때, 나는 예상보다 더 쉽게 상처받을 수 있었다. 바닥에 쓸쓸히 놓여있는 사진 한 장. 전정국은 내게 받은 사진을 바닥에 정갈하게 놓아둔 채 떠났다. 그제서야 눈물이 터져나왔다. 사진 앞에 주저앉아 팔로 얼굴을 가두며 한참을 울었다. 목구멍에서 곧 터져나올 것 같은 소음을 꾹 눌러담으며 그 모든 것을 눈물로 터뜨렸다.
사진을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온 건 전정국이 떠난 후로부터 이십 분이 지난 후였다. 힘이 빠졌다. 조금만 움직이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사진이 두 손가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었다. 몇 분을 내리 운 탓일까, 갑작스레 몸에 오르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차가운 손을 이마에 가져다댔다. 내일이 전정국 결혼식인데. 함부로 아플 수도 없었다.
초인종이 울린 건 금방이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것도 잊은 채 한숨을 쉬며 대문을 열어제꼈다. 잔뜩 붉어진 얼굴 위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들어 대문 앞에 서있는 상대를 확인했고, 아주 오래 전 잊혀져있던 조각 하나를 찾은 것처럼 머리가 환해졌다.
" …김태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