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명 아이돌입니다
와 진짜 오랜만에 컴백이다.
정말 죽을 각오로 연습했으니 이번엔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겠지.
성대결절에 몇 달을 꼬박 앓은 메인보컬 멤버도, 바로 전날 발목을 삐끗해 눈물을 펑펑 흘렸던 댄스담당 멤버도 애써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절대 편하지 않으리라.
변변찮은 무명 기획사에 소속된 우리들인지라 이번 앨범도 망해버리면 이제 더 이상 이 팀의 미래가 없을 것이라는 사장님의 말씀 때문이다.
드디어 다시 무대에 선다는 기대감보단 저마다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불안감이 훨씬 더 커보이는 건 착각일까.
이번 앨범마저 망해서 뿔뿔히 흩어진다면 난 어떻게 해야하지.
음악만을 보고 달려온 인생이다.
다른 길은 생각이라도 해 봤을까..
또다시 암울해지는 기분, 애써 고개를 흔들며 털어냈다.
재수없는 생각하지 말자. 우린 잘 될거야. 분명히.
" 내려라, 얘들아. "
매니저 오빠의 말이 들리자마자 우리는 일제히 비좁은 승용차 문을 열고 하나둘씩 방송국 앞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 얘들아, 진짜 열심히 해서 회사도 좀 살리고. 오빠도 좀 살려주라. 진짜 너네라면 잘 할수 있어. 내가 너네 연습하는거 하루이틀 봐왔냐. 이번앨범 꼭 대박쳐라. 오케이? "
저도 그러고 싶어요 오빠. 이번 앨범 대박나서 못난 딸 끝까지 믿어준 엄마한테도 용돈 쥐어주고 싶어요.
그러나 차마 뒷말은 내뱉지 못하고 오케이, 힘없는 대답만 늘어놓고 방송국으로 들어섰다.
저마다 슬로건과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 이번주에 컴백한다는 남자아이돌 팬들이구나.
저 사람들이 내 팬이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윗층 창문만 뚫어져라 응시하는 타 아이돌 팬들에게 괜히 서운해졌다.
나도 관심이란 걸 받고싶다. 힘있고 돈있는 회사들이 키워주는 '될' 아이돌의 관심, 반이라도 받아보고 싶다.
.. 쓸데없는 욕심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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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이번에 'DANCE'로 컴백하게 된 걸그룹 HLS(hopeless) 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
" 아, 알았어요. 거 앨범은 두고 가세요. "
감사합니다. 비록 그닥 좋은 반응은 아니지만 90도로 배꼽인사하는것도 절대 잊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야심차게 준비한 앨범인데.. 쳐다봐 주기라도 해주시지..
이번주에 컴백하는 엄청나게 인기좋은 남자 아이돌이다. 외모도 준수하고 실력도 뛰어나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도 '인기있는' 아이돌이 모든 걸 갖추진 못한 모양이다.
인성. 데뷔 초부터 쭉쭉 올라간 인기에 거만해진 건지, 아니면 자신의 아랫쪽 아이돌들은 전부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들의 성의없는 태도에 살짝 약이 오르기도 했지만 여기서 화를 낸다면 분명 마녀사냥식 기사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기실을 나왔다. 힘들다. 아직 돌려야 할 앨범은 스무 장. 갈 길이 멀다.
가요계에서도 엄연히 '계급' 이 존재한다.
대선배 가수, 그리고 인기있는 아이돌과 별볼일 없는 무명가수들.
아마도 우리들은 맨 후자에 속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도.. 우리가 쏟아부은 열정은, 연습량은, 인기 아이돌 못지 않을텐데..
무심코 옆을 둘러보니 서브보컬 언니의 눈가에 작은 눈망울이 맺혀있었다.
" 울어? "
" 아니, 안 울어. 그냥 하품한거야. "
" ..거짓말. "
" ...... "
그렇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HLS 리허설 시작합니다! "
곧바로 리허설 무대에 섰다. 호응같은건 기대도 안했다. 제 오빠들이 언제 나오는지, 무대를 보는둥 마는둥 시큰둥한 표정의 팬들에 살짝 울컥하는 듯 했다만.
그래도 우리의 무대를 보고 조금은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각오로 그 어떤 때보다 더 열심히 무대에 임했다.
" 와아아!!!! "
갑자기 팬들의 함성이 들려온다.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고 기쁜 마음에 관객석을 쳐다봤건만, 안타깝게도 그 함성의 표적은 우리들이 아니었다.
아까 그 대기실에서의 남자 아이돌들이 리허설 준비를 하러 무대 밑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순식간에 인파들은 우리를 지나쳐 남자 아이돌들에게 몰렸다. 우리도 잘 할수 있는데.
오기를 품고 더 열심히 무대를 즐겼지만, 끝끝내 관객들은 남자 아이돌에게만 관심을 가질 뿐.
우리는 그렇게 묻혔다.
-
조금있으면 본 무대. 코디도 없어 직접 서로의 얼굴을 꾸며주었다. 이제 이런건 익숙해.
바로 옆쪽 걸그룹은 코디 몇명이 붙어서 머리까지 손질해주는데, 우린 그저 모든것에 위축되어 구석에 눌러앉아 있을 뿐이었다.
" 나 화장실 좀 갔다올게. "
" 오냐. 근데 혼자서 길 잘 찾아갈 수 있겠냐 막내야? 크크. "
" 금방 올거니까 걱정 마라! 내가 애냐!? "
" 당연히 애지. 저번에 숙소 옮겼을때 집 잘못 찾아서 옆집 아저씨네 ㄷ.. "
" 아아악!! 말하지마!! 조용히 해!! 난 나갈거야!! 안들려!! "
이미 대기실 쪽 거울은 타 걸그룹이 독점하고 있는지라 내 얼굴 확인 겸, 그리고 혼자 있고싶은 마음에 화장실로 향했다.
하여튼 저 언니 장난은 알아줘야 돼. 예능에 나오는 걸그룹들보다 우리가 훨씬 웃긴데. 푸하하.
웃음기를 머금고 한참을 화장실을 찾아다녔다. 아마 이번엔 제대로 잘 찾은 듯 하다.
'달칵'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려는데, 뭐지.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있다.
게다가 한 손에는 담배까지 들려 있는데 아마 벽에 세워진 플랜카드를 보면 방송국에 무단침입한 팬들인가보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두쪽 다 아무말도 꺼내지 못했다.
" 아 뭐야 씨발 깜짝 놀랐잖아. 난 또 경비인줄 알았네. "
" 얘 뭐야? 아이돌이야? "
" 그런거같은데. 듣보잡인가 보네. "
" 풉. 아이돌 또 나오냐? 아이고 지겨워. "
곧이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리고 그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내 눈에 담겨진 건 웃으며 나를 조롱하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듣보잡. 우리에겐 한없이 아픈 말.
" 근데 얘 신인 아닌거같은데? 저번에 앨범 나왔었지 않아? "
" 아 맞다. 그 뭐였지? 두근두근인가? 근데 망했잖아. "
" 진짜 쫄딱 망했지. 푸하하. "
그렇게 가슴에 커다란 못이 하나 박혔다.
심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겠지만 한없이 아팠다.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여기 계속 서 있다가는 추한 꼴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빨리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아무도 없는 방송국 뒷쪽 복도. 앞뒤를 몇 번씩 둘러본 후에야 나는 그 곳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 흐윽.. "
그리고선, 정말 서럽게 울었다.
어렸을 적 내 꿈은 가수였다. 물론 지금도 가수지만. 내가 바란 내 미래는 이런 게 아니었다.
그저 가수가 되고싶은 열정, 그리고 실력만 있다면 모든게 다 해결되는 줄만 알았다.
' 아이고, 나중에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 공부 좀 해라 이 자식아. '
' 아 걱정마 기다려 엄마! 내가 나중에 커서 꼭 가수로 성공해서 엄마 완전 고급 아파트에서 살게 해준다! '
' 엄마 나 실용음악학원 다니게 한달에 30만원씩만 빌려줘. '
' 요즘 엄마가 사정이 어려워. 가게 장사가 잘 안되는거 알잖아. 뭔 놈의 실용음악학원이 그렇게 비싸다니. '
' 아 원래 서울에 있는 실용음악학원 다니려면 최소 그정도는 필요해! 나 가수 돼가지고 엄마 호강시켜 준다니까? '
내가 데뷔한다고 했을 때 입이 닳도록 이웃분들께 자랑하고 다녔던 엄마.
옆에서 든든히 힘들 때 마음을 함께 나눴던 소중한 멤버들.
그리고, 십몇년 간 소중히 지켜왔던 가수라는 꿈.
모두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 있다는 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엄마. 난 정말 죽을 각오로 연습한다? 근데 나오는 앨범마다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 그래서 망하나봐.
내가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조금있으면 곧 대박쳐서 엄마 목돈 벌어다 준다고.
근데.. 그 약속 있잖아. 옛날엔 정말 금방 지킬 수 있을 거 같았는데. 나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이젠 그런 확신마져 흐려져. 엄마, 정말 미안해.
그렇게 한참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온 몸에 힘이 빠져 더이상 울 기운도 나지 않았다.
" 야. "
" ....!? "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다 들은건가? 황급히 고개를 올려 위를 바라보니,
" ..화장실 간다면서 여기서 울고앉았냐. 바보같이. "
멤버들이었다.
순간 온몸의 긴장이 확 풀리는 느낌에 잠시 몸을 휘청였다.
멤버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를 바라볼 뿐.
그렇게 몇분 동안이나 우리에게는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 아직 아무것도 안 끝났잖아 임마. "
리더 언니의 말이었다. 순간 모든 멤버들이 리더 언니를 쳐다보았다.
" 우리 이제 겨우 세번째 시작인데. 칠전팔기 모르냐? 그동안 실패한거 모두 경험쌓은 셈 치고. 이번에 제대로 터트리면 될 거 아니야. "
멤버들은 또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멤버들의 눈가가 축축해보이는 건 기분탓일까. 히끅. 작게 울리는 딸꾹질 소리만이 복도를 약하게 메웠다.
가자. 리더 언니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이끌었다.
..그래. 지금이 세번째 시작이잖아. 우린 이제 실패를 딛고 일어설 시간이야.
눈물 닦아라 막내야, 뚝. 댄스담당 언니의 위로를 받으며 훌쩍훌쩍. 서툰 발걸음으로 대기실로 다시 향했다.
" HLS 무대 준비해주세요! "
그리고 무대에 오르기 전, 우리는 또 하나의 희망을 걸었다.
" 잘 부탁드립니다, HLS 입니다! "
서툴게 신은 하이힐에서 나는 또각또각 소리. 곧 이어 요란한 반주음악이 울려퍼졌고 우리는 마이크를 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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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걸그룹 HLS, 해체 선언.
2009년 '두근두근' 으로 데뷔한 걸그룹 HLS가 결국 부진한 앨범 판매량으로 해체를 선언했다.
HLS의 막내 OO양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연예인은 화려한 직업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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