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배우 이다인씨의 실화를 각색한 글입니다. [이번 신인상의 주인공은 박경 - 1004] "형, 나 어제 팬한테 문자 왔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번호 유출된 거 아니냐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 매니저 형에게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형의 모습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 번호까지 알아내려는 극성 팬이 어딨어. 아는 사람이 번호 바꿔서 보낸 거겠지. 그렇게 눈치가 없어? "그래도 조심해.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네, 네. 걱정마세요." "번호 좀 일단 알려줘 봐." "에이, 걱정 마라니까." 아직 홀더를 누르지않은 경의 핸드폰에는 천사에게로부터 온 문자가 화면을 메우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신인 박경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입이 닳도록 말한 탓에 어느덧 입에 베어버린 인사말이 사람을 볼 때마다 흘러나왔다. 나보다도 어린 사람에게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인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눈길이라도 주면, 들은 척이라도 해주면 다행이지 다들 자기 일에 바빠 다른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특히 나 같은 신인배우는 더더욱. "어머, 경 씨 오늘 왔네?" "네?" "경 씨 촬영분 미뤄졌거든, 연락 안 갔어?" "아…. 연기 공부도 할 겸, 드라마 흐름도 익힐 겸 왔어요. 불편하면 갈까요?"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멍청한 새끼. 스태프가 눈만 도르륵 굴리며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결국 고개 숙여 인사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난 언제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에휴. 얼마 전 길을 가다가 마음에 쏙 들어 질렀던 파란 니트가 오늘따라 어두컴컴한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의자에 대충 걸쳐두었던 패딩을 그 위로 껴입었다. 집에 가면 이 니트부터 어떻게 처리해버려야지. [오늘 입은 파란 니트 예쁜데 왜 가려요? 힘내요 - 1004] 또 천사에게로부터 온 문자였다. 처음 그 문자를 보고 나서 한참이 지난, 더구나 기죽은 지금 어떻게 알았는지 가슴 속 응어리를 어루만져주는 듯한 문자에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아, 왠지 처음으로 문자가 왔던 걸 얘기했을 때 과민반응을 하더니 실은 매니저 형이었나 보다, 못 말린다니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매니저 형이 있는 쪽을 향해 작게 화이팅하고 속삭였다. 오늘도 열심히 하자, 아자! * "형, 나 오늘 기분도 좋은데 가다가 한 잔 어때?" "술도 못하는 놈이 까분다." "이 나이 돼서 내 맘대로 술도 못 먹나? 사줄게, 가자." "웬일이래, 니가. 진짜 기분 좋은가 봐, 뭔 일 있냐?"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능청을 떠는 형의 모습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냥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곤 예전에 한 번 들렀던 안주가 맛있다고 소문난 술집으로 향했다. 소주나 맥주 중에서 뭐가 좋을 것 같냐고 물었지만 깐깐한 매니저 형은 운전을 해야 된다며 음료수나 무알코올로 아무거나 시켜 달랜다. 콧방귀를 한 번 뀌어주고 소주 한 병과 사이다 한 병을 시키자 형이 옆에서 꼼장어를 아주 맵게 해달라고 주문을 거들었다. "술도 안 마신다면서 안주는 왜 마음대로 시키시나?" "음료수만 마시면 처량하잖냐, 인마." "매운 꼼장어, 맛있겠다." "좋아할 거면서 괜히 까칠하게 굴고 있어." 술집 특유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동화되어 한 잔, 두 잔 술병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머리가 띵, 울리는 기분이었다. 형, 그만 갈까? 나 지금 꽐라가 코 앞인데? 내 말에 마지막 남은 꼼장어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형이 잔에 따라놓은 사이다를 단숨에 들이켰다. "술값이 아깝다, 이놈아. 꽐라는 무슨." "진짜야, 방금 머리가 띵했거든." "너도 이제 술자리 계산할 일 생길 텐데 그 전에 술 좀 더 배워라." "내가 뭐 어때서?" "본전은 뽑아야 안 아깝지." 뭐가 그리 웃겼는지 둘이서 큭큭거리며 차를 세워놓은 좋게 말해서 가게 전용 주차장, 사실은 그냥 자갈 잔뜩 깔린 그다지 좋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데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누군가와 어깨를 세게 부딪쳤다. 키 차이가 꽤 많이 난 탓에 남자의 팔뚝 부분에 부딪힌 나는 괜찮았지만, 어깨랑 부딪혔을 남자를 미안한 눈으로 올려다보니 날카롭게 째진 눈이 무표정하게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주친 그 시선에 괜스레 소름이 돋는 것 같아 고개를 꾸벅 숙였지만 내 머리에 느껴지는 여전한 시선에 옆에서 나와 남자의 눈치를 보는 매니저 형의 팔을 잡고 그냥 차로 잡아끌었다. "갑자기 재수없게 뭐야." "죄송합니다라고 말했어야지." "그쪽에서 오다가 부딪혔을걸." "그래도 넌 공인이야. 먼저 사과해, 앞으론." "알았어, 알았어." "투덜거리는 말투도 좀 고치고." "눈이 쫙 째져서 째려보는 것 같았단 말이야, 기분 나빴다고." "하여튼, 투덜이. 집으로 곧장 들어가." "형은?" "나 오늘 집 가는 날이잖아." "아, 맞다. 내일 올 때 해장국 좀 사와 줘." "어련하시겠어." 차에서 내려 실실 웃으며 손을 머리 위로 크게 흔드니 매니저 형이 빨리 들어가라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형, 조심해서 들어가! 내일 봐! 비밀번호를 치고 아파트 현관 안으로 들어오자 어지러웠던 머리가 그나마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옆에 있는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짧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 시간에 누구지? 콧노래를 부르며 핸드폰 홀더를 푼 경의 얼굴이 금세 허옇게 질려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와중에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고 사시나무같이 떨리는 손을 들어 화면을 쳐다본 경은 미끄러지듯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새어나오는 빛 덕분에 환히 밝혀진 핸드폰 화면에는 천사에게로부터 온 두 개의 새 문자가 띄워져 있었다. [근데 차 운전해준 그 남자는 누구야? - 1004] [무서워하는 그 반응 맘에 든다 - 1004] * "형, 나 핸드폰 번호 바꿔야 될 것 같아." "핸드폰 번호? 왜?" "어제 장난 문자가 왔거든." 혼자 다녀올 테니 집에서 쉬고 있으라는 매니저 형의 말에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 누웠다.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고 잠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요란스러운 알림 소리에 부스스 눈이 떠졌다. 시끄럽게, 형이야? 자고 일어나 반쯤 갈라진 목소리 때문에 형을 부르는 건 포기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여느 때와 같이 머리맡에 놔둔 핸드폰을 집어들고 비몽사몽 홀더를 푸니 흐릿한 시야 사이로 짧은 글귀가 눈에 띄었다. [핸드폰 번호 바꾼 거 축하해 - 1004] 이 씨발새끼 뭐야. 아무리 형이 일 처리가 빠르다고 해도 번호를 바꾼 지 반나절도 채 안 되었을 텐데. 머리가 괜히 지근거리는 것 같아 이불을 쳐내고 욕실로 향했다. 그냥 신경끄고 따뜻한 물에 목욕이나 해야지. 천사는 지랄. * 오랜만에 몸을 푹 담그니 기분 좋은 노곤함이 들어 화장실 문 앞에 놓아둔 핸드폰을 주워들고 침대에 편하게 털썩 주저앉았다. 새로운 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 라고 뜬 알림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매니저 형일까 싶어 한숨을 쉬며 화면 홀더를 풀었다. MMS 문자가 마저 수신된다는 문구가 왠지 기분 나쁘다 싶더니 역시나 그 문자는 천사로부터 온 문자였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까만 정지화면으로 시작되는 동영상. 호기심에 재생 버튼을 누르니 흑발에 후드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 화면이 재생되었다. "...이 미친놈." 영상에선 샤워기 소리와 욕실 안에서 불렀던 콧노래소리가 작게 흘러나왔고 남자가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보이는 열린 베란다 문 사이의 방은 내 방이었다. 열린 베란다 문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리며 소름이 돋았고 머리카락이 어딘가에 엉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억센 손이 머리카락을 그러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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