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멀스멀 피어나는 민망함에 재민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어서 학교가 끝날 때 까지 종일 피해 다녔는데, 음악 수업 프로젝트가 있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이미 같이 하자, 말 까지 한 상태라 무를 수도 없어 이모네 집으로 함께 돌아온 나재민과 꼼짝없이 한 테이블에 앉아 어색하게 눈치만 살폈다.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이동혁은 오늘 하필 축구 팀 연습이 있다며 손을 흔들며 혼자 씩씩하게 멀어져 버렸고, 이모 또한 오늘 아침에 교회 관련 모임이 있다며 늦게 들어 온다는 문자를 보내 왔다.
그러니까. 오늘 최소 저녁 7시까진 이 집에 나와 나재민 뿐이라는거.
"...으음...그러니까...어..."
"누나."
"어?"
"그렇게 티나게 어색해 하지 않아도 돼요. 왜. 내가 덮치기라도 할까봐 그래요?"
나재민은 내가 티나게 눈을 굴리며 바짝 얼어있자 꺄르르 눈이 휘게 웃으며 내가 따라 준 주스를 한모금 삼켰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스터 윌로우의 유인물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놨다. 아니, 올려놓기가 무섭게 그 애가 내 손가락 사이에서 종이를 앗아갔다.
짧게 종이를 흝어 본 나재민은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키며 이 사람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라고 말을 했고 나는 솔직히 누구로 하든 크게 상관 없었기에 그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간단하게만 조사하면 될 것 같아요. 윌로우도 거창한 걸 바란 것 같진 않고."
"...조사는 내가 할게. 네가 프레젠테이션 할래?"
"그럼 저야 좋죠. 피피티는 같이 만들어요, 우리."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며 진지하게 각자 맡을 파트를 나누는 나재민에 내가 너무 앞서 나갔나...라는 생각과 함께 죄책감이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혼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는 눈길에 다시금 뻣뻣하게 얼어 버렸다.
"왜, 왜....왜 그렇게 쳐다보니 너...?"
"생각 보다 더 쉽게 마음을 놓는 것 같아서. 신기해서요. 내가 좀 더 들이댔어야 하나."
"들이댔...아니,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거야...?"
"이동혁이요."
능글능글 턱을 괴고 예쁘게도 웃어 보이는 나재민에 기가 막혀 물으니 당연하다는 듯 이동혁의 이름이 돌아왔다.
그럼 그렇지. 해맑은 사촌 동생의 얼굴이 나재민의 얼굴과 잠시 오버랩 되며 나를 괴롭혔다.
그래. 솔직히, 나재민에게 설렌건 맞다. 저렇게 생겨서 그런 행동을 하면 당연히 반칙이지.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럴 때가 아니란 말이야, 이 맹랑한 연하야.
한국에서 티는 안내도 은근히 나에게 기대를 하고 있을 부모님과 지금 당장 따라 잡기에도 벅찬 학업, 그리고 아직 완벽히 적응하지 못 한 이곳에서의 생활은 나를 지치게 했다.
나재민과의 연애는, 좋겠지만. 글쎄. 냉정하게 말 해서 지금 나에게 도움이 될까...?
"...난 너랑 안사귈꺼야."
"알았어요."
"진짜야. 나 엄청 바쁜 사람이라고."
"알아요. 누나 엄청 바쁜 사람인거. 그래서 나도 적당히 하잖아요."
아니, 얘는 이런 것 까지 이동혁한테 배웠나?
물론, 아닐테다. 이런 사람을 홀리는 것 같은 매력은 타고난 건가.
약간 분한 감정이 들어 대놓고 프로젝트에 집중하겠다는 티를 내자, 작게 웃은 나재민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차근히 우리의 주제(에릭 클랩튼 이라는 가수)의 인적 사항과 히트곡 등을 찾아 PPT에 붙여 넣었다.
몇 분이나 집중 했을까, 갑자기 나재민의 노트북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 나왔다.
의아함에 뭐냐는 물음을 담아 그 애를 쳐다보자, 이 사람 노래예요. 라는 담백한 대답이 들려왔다.
"제목이 Layla 거든요. 레일라 라는 여자한테 사랑 고백하는 내용인데."
"...근데?"
"그냥. 노래 좋다구요."
어깨를 으쓱- 한 나재민이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불렀다.
목소리가 적당히 낮은 저음이라 그런지 그냥 가볍게 따라 부르는 것도 굉장히 듣기 좋아서 솔직히 놀랐다.
"...What'll you do when you get lonely and nobody's waiting by your side?" (외로움을 느낄 때는 어떻게 할 건가요? 당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면요.)
"..."
"You've been running and hiding much too long. You know it's just your foolish pride."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도망 다니며 숨고 있어요. 이게 다 당신의 바보같은 자존심 때문이란 걸 알잖아요.)
뭔가. 가사가 묘하게 지금 상황이랑 어울리는데.
나재민의 눈이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최면에 걸린 듯, 그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Layla, you've got me on my knees. Layla, I'm begging, darling please. Layla, darling won't you ease my worried mind."
(레일라, 당신은 날 무릎꿇게 만들었어요. 레일라, 이렇게 애원해요. 내 사랑이여, 제발. 레일라, 근심에 싸인 내 마음을 위로해 줄 순 없나요?)
나지막히 가사를 말 하는 입술이 점점 느려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래야만 나재민의 흐려지는 목소리가 더 잘 들릴 것 같았기에.
하지만 곧 그 애의 흥얼거림은 멎었고 우리 둘 사이엔 에릭 클랩튼의 노래만 흘러 나올 뿐, 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고.
그래. 그때의 나는 정신이 나갔던게 분명하다.
나도 모르게 그 애의 입술에 입을 맞췄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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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에에에에에
두번째 글도 초록글이라니!!!!!! 믿기지가 않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꿈 같네요
늘 읽어주시는 분들ㅠㅠㅠ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왜 하필 에릭 클랩튼이냐...하면 제가 다녔던 중학교의 음악 수업 (기타 수업이었어요) 선생님이 제가 쓴거랑 똑같은 과제를 내주셨는데 제가 조사했던 인물이 에릭 클랩튼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노래는 우연이네요...저도 가사 찾아보면서 좀 놀랐네요!
레일라 노래 좋습니다, 한번 쯤 들어 보는 것도 추천 해드려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