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따뜻했다. 내 작은 옥탑방 앞의 평상 위에 늘어지듯 누운 나는 나른해지는 기분에 몸을 틀어 모로 누웠다. 으, 기분 좋다. 머리 끝 부터 발 끝까지 햇살에 흠뻑 적셔지는 기분이었다. 살짝 몸을 웅크린 채 낮잠이라도 자려 눈을 감은 순간 내 귓가에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대체 뭘 하는 건지 마치 꽹과리를 치는 것 같은 쇳소리가 연이어 들려와 신경을 건들였다. 어떤 새끼야아….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내 눈 앞에는 옆 옥탑에 사는 남자가 냄비와 숟가락을 든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잘 거야?˝
˝잘 거야.˝
˝에이, 왜애.˝
뭐야, 저 병신은? 내가 잔다는 데 왜 지랄이지? 뭐가 그리 좋은지 여전히 싱글 싱글 웃고 있는 얼굴에 짜증이 치밀어 인상을 찡그리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제 쪽으로 건너 오라는 듯 손을 살랑인다. 내가 보고 싶으면 지가 올 것이지, 왜 나한테 오라고 지랄? 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으니 내 모습이 웃긴지 크게 웃음을 터트린 남자가 냄비를 내려놓고는 작은 상자를 들어올렸다. 흔들 흔들, 눈 앞에서 분홍 빛이 흔들렸다.
˝오늘, 발렌타인 데이잖아.˝
˝아오, 진짜!˝
…초콜릿 받으러 오라고 진작 말을 하지.
오글오글!
남우현X김성규
내가 사는 주택 단지는 유독 건물들이 빽빽히 붙어 있기로 유명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살고 있는 현성 빌라와 우성 빌라는 거의 한 건물 처럼 딱 붙어있었다. 그리 높지 않고 사이의 틈도 없는 건물 벽 두 개만 넘으면 어렵지 않게 건물과 건물을 왕래 할 수 있는 구조인지라 빌라의 두 옥탑에는 주로 남성 세입자들이 줄줄히 들어와 살았다. 애초에 사생활 보호 따위는 기대 할 수 없는 집이라 옥탑의 주인은 자주 바뀌었는데, 남우현은 우성 빌라 옥탑방의 네 번째 세입자였다. 물론 내가 들어와 산 이후로.
세 번째 세입자 까지만 해도 나름 친목을 다지기 위한 노력들을 해왔지만, 내 노력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한 달을 못 채우고 방을 뺐다. 서서히 정을 붙여 갈 즈음 이사를 가는 사람들에 이제는 옆 옥탑에 누가 들어와도 무시하리라 하고 다짐한 나는 남우현이 처음 옆 옥탑에 들어오고부터 삼 일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하면 또 병신 같이 정을 붙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남우현은 뭐 그리 할 일이 많은지 주로 옥탑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방음 하나 되지 않는 벽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와 기척을 염탐하며 레토르트 식품만 줄기차게 만들어 먹던 나는 삼 일 째가 되던 날에서야 방 밖으로 천천히 기어나왔다. 마트에 가기 위해서였다.
˝어휴, 머리 봐.˝
˝왜? 떴어?˝
˝이리 와 봐.˝
터덜거리는 걸음거리로 벽을 넘어 남우현 앞에 서자 푹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던 남우현이 손을 뻗어 내 뒷통수를 만지작 거렸다. 많이 떴나. 나는 괜히 멋쩍은 마음에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세심한 손길로 내 머리를 꾹꾹 눌러 준 남우현이 내 앞에 분홍 빛 상자를 불쑥 내밀었다. 상자 위의 하얀 리본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상자˝
˝어?˝
˝상자 예쁘다….˝
두 손으로 상자를 받아들고는 연신 감탄사만 뱉는 내 모습이 웃긴지 등까지 접어 가며 웃던 남우현이 한 손으로 내 볼을 꼬집었다. 놔여. 질질 새는 발음으로 말을 뱉고는 손을 빼내려 고개를 뒤로 살짝 빼니 이게 또 재미가 있는지 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 쪼옴! 아려 오는 볼에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는 손을 들기도 귀찮아 그저 고개를 도리질치니 그제야 손을 떼어내고는 검지 손가락으로 붉게 달아 올랐을게 뻔한 내 볼을 살살 쓸어준다. 뭘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지 한 가득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이 눈 앞 가까이 다가왔다.
그 때도 그랬었다. 아무 소리 없이 고요한 밖에 안심한 나는 마트에 가기 위해 주섬주섬 지갑을 챙겼다. 꼴에 매너랍시고 추리한 행색을 가리기 위해 후드 집업의 후드를 푹 뒤집어 쓰고 문을 열고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눈 앞에 보이는 옆 집 남자에 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만 있는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남우현은 들고 있던 락앤락 통을 옆에 내려놓으며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괜찮아요? 하고 물으며 내 발목을 짚어 오던 그 단단한 손 마디를, 그 때도 뭘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지 눈 앞 가까이 다가오던 얼굴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근데 이거 왜 이렇게… 가벼워?˝
˝글쎄.˝
실실 가벼운 웃음을 흘린 남우현이 얼굴을 물리고는 슬리퍼를 직직 끌며 걸어가 평상 위에 앉았다. 그 날 이후로 급속도로 가까워진 우리는 어느 날 남우현의 옥탑에서 나란히 꽐라가 되도록 술을 들이키고 떡을 쳤다. 멘붕 상태에 빠진 내 옆에서 실실 웃던 남우현은 형이 내 동정을 가졌으니 책임을 지라며 징징거렸다. 안 그럼 내 주변 사람들에게 형이 내 동정 먹고 버렸다고 다 불 거야. 그 때는 경황이 없어 그 말도 안 되는 협박에 그대로 남우현에게 코가 꿰였지만, 지금 와 생각을 해 보면 분명 남우현은 계획적으로 나에게 술을 먹였음이 틀림 없었다. 아니, 뒤를 따인 건 난데 책임을 왜 내가 지지? 꼭 그 때처럼 실실 웃는 남우현의 표정에 미심쩍은 눈빛으로 남우현을 바라보았다. 살살 흔들어 본 상자가 이상하게 가벼웠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통 초콜렛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나긴 하지. 그래. 어서 열어 보라는 듯 작게 턱짓을 하는 남우현을 한 번 노려보고는 상자를 열었다.
˝이게 뭐야?˝
˝선물.˝
˝지금 나랑 장난 해?˝
˝초콜렛 그냥 먹으면 재미 없, 아이, 가지 마.˝
상자 안에는 작은 쪽지 한 장과 젤이 들어있었다. 쪽지 한 장에는 쿠폰이 두 개 그려져 있었는데, 손으로 그린 건지 깜찍한 나무 그림 위로 초콜렛 키스 ´▽`! 와 인간 초콜렛 ´▽`! 이 각각 적혀 있었다. 인간 초콜렛이라니. 보나마나 남우현은 액체 초콜렛을 제 몸에 바르고 핥아 먹으라고 할 위인이었다. 갈색 빛의 튜브에 든 젤 위에는 하면 할 수록 진하게 풍기는 초코 향과 함께 행복한 섹스 하세요~♡ 하는 문구가 진한 빨강색으로 쓰여져 있었다. 이 새끼가. 고작 이딴 걸 주려고 자려는 날 부른 거야? 당장 내 옥탑으로 돌아가려 몸을 돌리는 내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남우현이 흐으응 흐으응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소름 돋아. 떨어져.˝
˝아, 떨어지면 갈 거잖아.˝
˝당연하지.˝
˝그러니까 안 놔.˝
˝아 좀 놓으라고오.˝
시른데에. 장난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서 질질 늘어졌다. 뜨거운 입 바람이 귀를 간지럽혔다. 등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나는 힘 없는 몸짓으로 몸을 비틀었다. 나를 감싼 남우현의 팔이 단단히 나를 옥죄어왔다. 요즘 헬스를 다닌다고 하더니 쓸데없이 힘이 세 졌다. 헬스 다녀서 뭐에 쓸 거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형 좋으라고! 여서 나는 말 없이 남우현의 발을 밟아 주었었다.
˝근데 형은 뭐 없어?˝
˝뭐.˝
˝아니, 원래 형이 나한테 초콜렛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왜.˝
˝당연히 형이 나한테 박, 윽.˝
˝한 마디만 더 해라?˝
꼭 매를 벌어요. 내게 콱 발을 밟힌 남우현이 외마디 신음과 함께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끙끙대며 제 발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 한심해 푹 깊은 한숨을 내뱉고는 터덜터덜 걸어가 남우현의 평상 위에 길게 늘어지듯 누웠다. 여전히 햇볕은 따뜻했고, 바람은 기분 좋을 정도로 살랑거렸다. 느릿하게 눈을 꿈뻑인 나는 감기는 눈을 막지 않고 천천히 눈을 내려감았다. 아픔이 좀 가셨는지 끙끙대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야.˝
˝왜.˝
삐쳤는지 불퉁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쟤는 무슨 사내 자식이 존나게 속이 좁아. 궁시렁 거리는 불만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직 바닥에 끌리는 슬리퍼 소리에 남우현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어쩐지 간질간질한 기분에 나는 한 손으로 내 뒷통수를 마구 헤집었다. 손에 잡히는 문고리가 차가웠다.
˝들어와.˝
˝어?˝
옥탑방의 문을 여니 남우현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쳐왔다. 몸을 틀어 뭐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는 남우현 쪽으로 한 손에 구겨지도록 쥐고 있던 쪽지를 던졌다. 꼭 그 쪽지 처럼 남우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버리는 줄 알았나 보지? 나는 비죽이 나와 있는 밑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다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초콜렛 먹게.˝
그대로 남우현의 집 안으로 들어가는 내 뒤에서 한참을 멍하게 서 있던 남우현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멋쩍은 기분에 달아오른 귓볼을 만지작 거렸다. 이런 오글 거리는 멘트를 제 입으로 뱉게 될 줄이야. 뒤따라 들어오는 남우현의 목소리가 확실히 들떠 있어 절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귀엽기는.
여전히 햇볕은 따뜻했고, 바람은 기분 좋을 정도로 살랑거렸다.
달콤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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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초콜렛=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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