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눈부셔….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빛에 경수가 꾸물거리며 이불을 머리 끝 까지 뒤집어썼다. 다시 어둑해진 시야에 찌푸리고 있던 미간이 곧게 펴진 것도 잠시, 머리맡에서 시끄럽게 핸드폰에 경수가 짧게 신음을 흘렸다. 이불 속에서 잔뜩 몸을 웅크린 채로 팔만 뻗어서 위쪽을 더듬거리자니 익숙한 핸드폰이 손에 잡힌다. 눈도 뜨지 않은 채로 핸드폰을 열심히 흔들다가 알람이 종료되자 핸드폰은 이내 한쪽으로 던져버리고, 웅크린 채로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맨살에 닿는 보송보송한 이불에 입 꼬리가 비슬비슬 올라간다. 이불 빤지 꽤 된 거 같은데 아직도 세제냄새가 나네. 그러고 보니 냄새가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이불과 베개에 파묻힌 채로 킁킁거리고 있던 경수가 스치듯이 떠오른 생각에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가 훅 끼쳐오는 현기증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다시 침대로 추락했다. 한참을 끙끙대다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낯설고도 익숙한 천장이고, 공기에 노출된 헐벗은 몸이 으슬했다. 설마, 혹시…. 그래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우후죽순 떠오르는 기억은 생생했다. 꿈이라도 꾼 걸 수도 있다며 애써 숨을 가다듬고 내려다 본 가슴팍이 울긋불긋 했다. 순식간에 잠기운이 달아나 말끔해진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침대 옆 책상 위에 자신의 옷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술 냄새가 진득하니 풍기는 옷을 주워 입고 슬쩍 닫혀 있는 방문을 열어보니 집 안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흘끗 시계를 보니 열한 시. 종인은 진작 학교에 갔을 시간이라 경수는 새삼 오늘이 평소에 그토록 치를 떨었던 월요일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 위로 후드를 푹 눌러 쓰고 현관을 나온 뒤 무슨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를 만큼 머릿속은 패닉이었다. 쾅 닫힌 방문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은 경수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에 닿는 손끝이 차게 식었다.
술 먹고 주정이란 주정은 다 부렸으면 필름이라도 제대로 끊기던가! 가장 중요한 부분 -그러나 어떤 장면일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만 빼고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에 경수가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알코올에 떡이 되어서 몽롱한 상태였음에도 피부위로 내려앉았던 입술의 감촉이 생경했다.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무턱대고 들러붙어서 입술을 부볐던 것도 자신이 먼저였고, 옷을 벗어던진 것도 자신이 먼저였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경수가 잔뜩 울상을 짓고 머리만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어유, 우리 잘생긴 종이니! 내가 너르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 어? 아냐구! 나쁜새끼, 여자 친구나 만들구..
"내가 미쳤지…."
경수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실행취소를 몇 번이고 누르고 싶었다. 아니면 어젯밤의 기억을 몽땅 리셋시켜버리던가. 차라리 필름이 몽땅 끊겼다면 이 정도로 패닉에 빠질 일도 없었을 거다. 왜 나는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떡이 될 만큼 마셔가지고. 변백현은 옆에서 말리지도 않고 뭐 했는데? 말리기는커녕 지 애인 욕만 찡얼거리며 잔이 넘칠 정도로 소주를 들이붓던 백현이 생각났다.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지 차분히 정리되는 상황에 경수는 울고 싶어졌다. 진짜 미쳤나봐. 연거푸 한숨이 터져 나온다.
그러니까 어제,
도경수는
열여덟 김종인과.
잤다.
Happening A
W. 도련
0
그러니까 종인은,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옆 집 초등학생에 불과했다. 낮에 일을 나가는 종인의 엄마는 아직 열 살인 종인을 혼자 집에 둘 수 없었고 옆 집 사는 중학생인 경수에게 종인을 자주 맡기곤 했다. 당시의 경수는 초등학생 남자애였던 종인이 그 또래답지 않게 얌전하기도 했고 가끔 종인이네 아주머니가 두둑이 얹어주는 용돈에 종인에게 제법 형 노릇을 열심히 했더란다. 위로 형만 있던 경수에게 말 잘 듣는 남동생이 생긴 기분이라 조금 신기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유독 말 수가 적고 무뚝뚝했던 종인은 경수와 있을 때면 말수가 제법 많아졌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고…, 조용조용히 말을 이어나가다가도, 왜 자신에게는 이야기 해주지 않느냐는 엄마의 말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종인이가 남자 형제가 없어서 그런가, 경수한테만 그러네. 공부해야 할 텐데 우리 애가 귀찮게 하지는 않구?
아뇨, 저두 괜찮아요. 종인이가 되게 조용하기도 하고 동생이 생긴 기분이라서….
그러면 나야 다행이구. 아줌마는 경수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단지 일 나가는 날 퇴근시간까지만 맡아주던 게 어느 새 일주일 내내 학교가 끝나자마자 종인이 경수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고, 주말에는 자고 가는 게 자연스러웠던 일상은 경수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종인도 한살 두 살 나이를 먹다보니 예전만큼 경수를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 퉁명스러운 느낌도 들었다.- 경수도 자연스레 바빠진 탓에 가끔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관계로 돌아갔다. 그것도 머지않아 종인이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끊겼다.
1
"형, 진짜 돈 한-푼도 없어요?"
말을 죽죽 늘리면서 머리를 툭툭 치는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 냈다. 오오, 주변에서 들리는 감탄사와 함께 얼굴로 담배연기가 훅 끼치는 것에 경수가 고개를 돌리곤 몇 번 잔기침을 했다. 내가 이 나이를 먹고 고등학생한테 삥이나 뜯기다니.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요즘 애들은 발육도 좋지. 기싸움에 지지 않으려 쳐들고 있는 고개가 절로 당겨왔다. 샛노란 머리에, 교복을 입고 담배를 뻐끔거리는 그 모습이 아무래도 잘못 걸린 듯싶었다. 한명이면 어떻게 설교라도 해서 빠져나가던지 하는데 오늘따라 단체다. 그냥 얌전히 택시나 탈걸…. 괜히 동네 지리 익힌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기어이 일이 생겼다. 지금 돈이 만원 이 만원 있는 것도 아니고, 무려 오늘은 월급날이었다. 시간을 끌수록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경수는 진지하게 이 혈기왕성한 고등어들한테 가방 속에 있는 흰 봉투를 고이 상납해야 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나보다 최소 다섯 살은 어릴 놈들한테 돈을 뜯기는 게 말이 되냐고! 비죽비죽 차오르는 화에 경수가 눈만 올려서 앞에 버티고 선 소년의 명찰을 확인했다. 오 세훈. 자기가 무슨 서울시장이야? 속으로 빈정거리는 것도 잠시, 경수는 지금 눈앞에 닥친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아, 진짜 미치겠다. 어떡하지. 지금 가장 편한 방법은 눈 딱 감고 돈을 넘기는 거였지만 지금 자신에겐 한 달간의 노력이 담긴 봉투가 있고, 스물네 살이나 되어선 고등학생한테 삥을 뜯기는 걸 자신의 자존심이 용납을 못했다. 달리 마땅한 방도 없이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데 저 구석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도경수?"
느닷없이 들린 제 이름에 경수가 잠시 숙이고 있던 얼굴을 휙 쳐들었다. 골목길 구석에 기대 있던 길쭉한 몸이 성큼성큼 제 앞으로 걸어왔다. 역시 저보다 높이 솟아있는 얼굴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니 잘생겼다. 경수 형? 조금 너갱이가 나간 채로 잘생긴 얼굴을 감상하던 경수는 다시 자신을 제법 친근하게 부르는 것에 자신이 과연 이 잘생긴 고등학생과 어디서 본 적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는 사이야? 방금 전 까지 월급봉투를 위협하던 노란 머리가 묻는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너는 날 아는데 나는 널 몰라…. 설마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한건가. 그렇다기엔 이름을 정확히 불렀구. 게다가 부르는 폼이 제법 익숙하기도 했다. 근데 정말 기억이 안나! 어떡하지. 눈치만 보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순간 이쪽을 보던 고등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움찔한 자신을 보고 픽 웃는다. 몰아치는 상황에 경수는 차라리 정신을 놓고싶었다.
2
정말, 김종인? 또 다시 참지 못하고 물어본 말에 눈앞의 종인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와 진짜, 말도 안 돼…. 를 연신 중얼거리던 경수가 총총거리며 종인의 옆에 따라붙었다. 키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가, 보폭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다. 기분탓이겠지. 앞만 보며 걸어가는 종인의 얼굴을 흘끗 올려다 본 경수가 차오르는 한숨을 애써 눌렀다. 요즘 애들은 정말 성장판이 남다른가봐. 아까 걔도 그렇고. 솔직히 처음에 못 알아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자신은 눈썰미가 그다지 좋지 않았고, 고작 6년 사이 종인은 너무 많이 자라 있었다. 예전엔 저 얼굴이 아니었는데. 젖살이 빠진 건가, 이건 마치 묻혀있던 이목구비가 발굴된 것도 아니고…. 자신과 머리 하나는 차이 나던 옆집 초등학생을 떠올린 경수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말 잘 듣고 착하던 애가 삥이나 뜯고 다니고. 그 덕분에 자신의 월급봉투는 무사했지만. 너희 어머니는 너 그러고 다니는 거 아시니? 경수는 턱 끝까지 치고 올라온 물음을 삼켰다. 초등학생 김종인은 만만하지만 일진 김종인은 무서웠으므로.
"저, 근데 종인아…. 이제 더 안 데려다 줘도 되는데."
한 달 치 월급을 뜯길 위기에서 구해준 종인은 괜찮다며 격한 도리질을 하는 경수의 의사는 무시 한 채 데려다 주겠다며 함께 길을 나섰다. 이제 큰 길이구, 가로등도 많고. 저를 올려다보며 입을 우물거리는 경수의 모습에 종인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우리 집도 이 쪽인데."
아, 그래. 같은 방향이구나. 짜게 식은 경수가 애써 굳은 표정을 갈무리했다. 달밤에 다 큰 남자 둘이서 한적한 길을 걸어가자니 이루 말 할 수 없이 어색했다. 그저 앞만 보며 발걸음을 옮기던 경수가 종인의 눈치를 살폈다. 처음에는 그냥 같은 방향인 줄 알았는데, 단지 안으로 들어서서도 종인과 같이 걷고 있었다. 설마 같은 아파트인걸까, 라는 생각은 어느 새 앞서 로비로 들어가는 종인에 의해 사실이 되었다. 머뭇거리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종인의 옆에 경수가 머뭇거리며 섰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서 있자니 머리 위에 종인의 시선이 닿아온다. 저, 그, 같은 아파트…. 어색한 분위기에 입을 열었는데 혀가 굳었는지 멍청하게 터져 나오는 말에 경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음, 몇 호 살아?
408호요.
짧게 떨어지는 대답에 경수가 입을 벌렸다.
6년 전엔 옆집이었는데, 지금은 바로 윗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