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열X백현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下
w. Lucy
한 발, 한 발 발을 동시에 나란히 내딛으면 내딛을수록 서로의 심장박동 소리도 나란히 울렸다. 꼼지락거리는 백현의 손을 주머니 안에서 꽉 잡고 놔 줄 생각이 없는 찬열은 아무 말 없이 땅만 보고 걷는 백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동글동글한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았다.
“선배.”
“네?”
“반말 듣고 싶어서요.”
“아…….”
“되게 웃기지 않아요? 제가 선배라고 하는데 선배는 존댓말 하고.”
걷다 말고 우뚝 서서 백현을 바라보는 찬열의 표정은 나름 단호했다. 당장 반말을 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길가에 서 있을 기세에 백현은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음….”
“이름 불러줘요.”
“어, 이름….”
“얼른.”
“…찬열아.”
“……네.”
“내일도 빵집 올거야?”
처음 반말로 내뱉는 말이 빵집에 올거냐는 질문이라니. 너무도 백현 다운 질문에 찬열은 그저 푸흐흐 웃고 말았다. 허리를 살짝 굽히며 웃는 찬열의 모습에 백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조금은 가까워 진 것 같아 마음은 뿌듯했다. 찬열이 자신을 그저 친해지고 싶은 선배 이상으로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백현의 마음속은 무언가 기분 좋은 감정으로 꽉 차 있어, 더 이상 큰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간만에 찾아온 기분 좋은 감정에 백현은 온 몸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네. 내일 갈게요.”
“응…. 고마워.”
고개를 살짝 들어 마주한 휘어지는 눈웃음에 찬열은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마저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백현은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5년 먼저 태어나고, 거기다가 같은 성을 가진 사람에게 사랑스럽다- 는 표현은 낯간지러운 것이 분명함에도 그것을 백현에게 대입하는 순간 모든 위화감은 사라졌다. 워낙에 자신의 감정에 즉각적이고 솔직한 찬열은 이런 자신의 생각이 백현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좋은 것이었다. 백현과 함께 있는 시간이.
“선배, 핸드폰 번호 알려주세요.”
“그래. 핸드폰 줘. 알려줄게.”
존댓말을 쓸 때와는 달리 더 다정한 목소리에 찬열은 반말을 서둘러 부탁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낯을 많이 가려하는 듯한 백현의 모습에 천천히 기다리자는 생각이었는데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백현의 존댓말 자체가 모순이었다. 찬열은 백현과 나누었던 대화를 찬찬히 생각해보다가 백현이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참지 못하고 부탁해버렸다. 사실 강요나 다름없었지만. 뭐든 상관없이 찬열은 백현의 그 목소리가 좋았다. 빵집에서 오랫동안 일해서 그런가 목소리도 따뜻하고 달달했다. 하루 종일 옆에 두고 듣고 싶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그렇게 다들 어서오세요! 하는 그 짧지만 좋은 백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빵집에 가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할 수 있었다. 다만 백현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우리 집은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돼. 날씨 추운데 너도 얼른 가봐.”
“조금만 더 갈래요.”
“…….”
백현은 이렇게 찬열이 큰 눈을 반짝이며 고집 아닌 고집을 피우는 것 같은 말투를 해오면 입이 그냥 꾹 다 물어졌다. 찬열의 말투에는 뭐라고 반박할 의지를 무너뜨려버리는 힘이 있었다. 그게 나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백현은 그냥 웃어버리고는 경사진 언덕길을 올랐다. 여전히 왼쪽 손은 찬열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너무 따뜻해서 오른쪽 손이 더 차갑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백현이 더 발걸음을 빨리 해서 계단이 나오는 지점에서 뒤를 돌아봤다. 계단 한 칸에 올라서자 백현의 눈높이가 찬열보다 조금 더 높아졌다. 항상 봐왔던 찬열의 뒤로 펼쳐진 동네 풍경이 오늘따라 예뻐 보였다. 백현은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찬열의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순간 조금 내려간 찬열의 눈꼬리에 놓치지 않고 시선을 둔 백현은 찬열이 서운함에 그런 것일 거라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착각이든 사실이든 뭐든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좋았다.
“여기부터는 나 혼자 갈게.”
“아쉽다.”
그 세 글자가 이리도 가슴을 떨리게 하는 말인지, 백현은 처음 깨달았다. 이런저런 입에 발린 말들은 다 소용없었다. 찬열이 툭툭 던지는 말들은 백현의 떨리는 심장을 이리저리 휘두르는데 재주가 있었다. 백현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려고 노력하며 찬열이 꼼꼼하게 매준 목도리를 천천히 풀렀다. 자신이 하는 행동을 민망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찬열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찬열이 자신에게 해 준 그대로 서툴지만 정성스럽게 목도리를 매주었다. 목도리가 반쯤 매어져있을 때 찬열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백현은 계단 위에 가로등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있었다면, 못나게 붉어진 얼굴을 찬열에게 보이고 말았음이 분명했을 것이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낮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 백현도 어느새 찬열을 따라 작게 웃고 있었다. 찬열의 온기가 닿아있던 목도리를 풀으니까 주저하지 않고 목덜미를 쑤셔대는 찬바람에 목이 움츠러들었다. 찬열은 몸을 덜덜 떨며 웃는 백현의 모습에 웃음을 멈추고 어서 들어가 보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되돌아가는가 싶더니 다시 뒤를 돌아 찬열의 앞에 섰다.
“잘 가, 찬열아.”
쓰윽쓰윽.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는 백현의 행동에 찬열은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듯했다. 백현이 할 행동이 하니라 당해야 어울리는 행동에 찬열은 기어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허리를 숙이고 백현이 매준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웃고 고개를 드니 힘들게 계단을 도망치듯이 빠르게 올라가는 백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 귀여워. 백현의 앞에서 이 말을 그냥 뱉을 뻔 했다. 뭐, 이 말을 하면 백현의 반응이 안 궁금했다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찬열은 다시 한 번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언덕길을 내려갔다. 잠깐 사이에 백현의 향기가 목도리에 묻어난 거 같아 찬열은 집을 가는 도중에 계속해서 얼굴을 파묻었다. 앞으로 자주 백현에게 목도리를 매줘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새벽부터 학원을 가는 행위는 생각보다 그리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아침부터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것도 지겨워죽겠는데 우리말도 아니고 영어를 꼭두새벽부터 들으려니 백현은 딱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휴학하면서 알바만 죽어라 한 탓에 남들처럼 이렇다 할 취업 준비를 하지 못해 여기서 불평, 불만을 다 쏟아버리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자기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였다. 준면은 백현이 토익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하루 종일 카운터 일과 서빙 일을 맡기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해 며칠 전에 미리 새 직원과 면담을 마친 상태였다. 이름은 김종대. 백현과 동갑이지만 학교는 달랐다. 백현은 종대의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몇 번 얘기를 나눠보니 이렇게 잘 맞는 친구도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경수가 들으면 서운해 할 터였다. 기회가 된다면 종대와 경수를 서로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었다.
그건 그렇고 또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종대는 백현이 새벽 수업을 듣고 집에 가서 한참 잠에 푹 빠져 있을 때 오전 타임을 맡게 되었고 백현은 오후 타임을 맡게 되었다. 주말에는 손님이 많으므로 종대가 가끔 나와 함께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새삼 자신을 배려해준 준면에게 굉장히 고마운 백현이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도 또 다시 눈꺼풀이 무거워 짐을 느꼈다. 백현의 동글동글한 머리가 계속해서 위 아래로 움직일 때 쯤, 문이 열리면서 종소리가 백현의 잠을 깨웠다. 백현은 두 손으로 양 볼을 찰싹 찰싹 때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었을 땐, 백현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찬열이 앞에 서 있었다. 백현은 누구에게보다 더 밝은 미소를 보이려다가 그만 입꼬리를 사정없이 내려버렸다. 찬열 혼자가 아니었다. 굉장히 예쁜 여자와 함께였다. 웃는 모습이 예쁜 여자가 찬열과 함께 웃으며 카운터로 걸어오는데 백현은 계속해서 얼굴을 굳히고 있을 뻔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입꼬리를 힘겹게 올리며 인사했다.
“선배, 저 왔어요.”
“…그래, 안녕.”
“오빠가 귀여운 선배가 있는 빵집이라고 해서 왔는데, 정말이네요.”
“아, 감사합니다.”
백현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지 인식이 잘 안 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심장은 찬열과 단둘이 있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미친 듯이 뛰어댔고 마주보면서 웃는 두 사람의 모습에 백현은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아 마음을 침착히 하고 주문을 기다렸다.
“오빠, 카페라떼 좋아하잖아. 그거 시켜.”
“너는? 평소랑 똑같이?”
서로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것 같은 대화에 백현은 그만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애꿎은 커피 포트 버튼을 눌렀다 올렸다 하면서 바쁜 척을 하다 뒤에서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둘러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하고, 음료를 준비했다. 아직도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일을 하는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백현은 멍하니 음료를 준비하다 말고 고개를 떨구며 생각했다. 그래, 좋아하는 건 나지 찬열이가 아니잖아. 씁쓸한 사실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수긍을 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따뜻한 온기의 두 잔을 접시에 놓고 찬열과 의자가 앉아 있는 자리로 갔다. 두 사람은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백현이 가까이 다가가서야 대화를 멈추었다. 백현은 찬열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잔을 내려놓은 뒤 접시를 들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좋은 시간 되세요. 뒤를 돌아 잘 딛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카운터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뒤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찬열의 얼굴을 차마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백현은 카운터에 멍하니 앉아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면 찬열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왜 하필 그 자리에 앉았냐고 찬열을 속으로 원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맥없이 앉아있으니 없던 열이 오르고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10분, 20분이 흐르고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서 힘이 빠지고 무언가를 할 의욕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 때 준면이 주방에서 나와 백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백현아. 많이 힘들지?”
“혀엉.”
“평소 같았으면 얼른 아니에요, 그랬을텐데.”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안되겠다.”
“…네?”
“너 딱 이틀만 휴가야. 나오면 잘라버린다?”
“형….”
“종대한테 연락할 테니까 얼른 들어 가봐. 너 지금 반 죽은 사람 같아.”
“고마워요…….”
“따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걱정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준면에게 백현은 아니라며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카운터에서 일어나 준면의 목을 꽉 껴안고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준면은 걱정되면서도 그런 백현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고는 탈의실로 백현의 등을 떠밀었다. 백현은 참 좋은 형을 알게 된 것 같아 땅바닥까지 추락했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 했다.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털모자를 눌러쓴 뒤 카운터 앞으로 나왔다. 앉아있는 손님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백현은 준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종대에게 나중에 밥 사겠다는 얘기를 전해달라는 말을 건네고 서둘러 빵집을 나섰다. 많은 시선들 중 찬열의 시선도 포함되어있을까, 하는 생각에 더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머리를 식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으, 으음…….”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뜨려고 노력하면서 침대 옆에 놓아둔 꺼놨던 전화기의 전원을 켰다. 몸살이 제대로 걸렸다. 이게 상사병인지, 그냥 너무 무리를 해서 그런지 몰라도 둘 중 하나는 걸린 것이 분명했다. 백현은 아마도 전자의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힘 없는 몸으로 집 안을 샅샅히 뒤져 나온 감기약을 먹고 밤낮도 인식하지 못한 채 자고 또 자고 다시 일어나 정신이 되돌아 올 쯤에 머릿속에 꽉 차는 찬열의 생각에 백현은 그저 약을 먹고 다시 잠에 들었다. 빵집에서 집에 오자마자 핸드폰의 전원은 꺼버렸다. 이틀 내내 전화기의 전원을 꺼 놓은 탓에 현재 몇 시인지도 구별이 잘 가지 않았다. 커튼을 굳게 쳐 놓은 창문에 손을 올려 밖을 내다보니 이제 막 초 저녁쯤인 것 같았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부엌에 놓여져 있는 찬 물을 마시니 정신이 말짱해지는 기분이었다. 발을 질질 끌고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는데 무슨 폐인이 따로 없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옷을 말끔히 갈아입으니 이제 서야 평소 모습으로 되돌아 온 듯 보였다. 그래도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울을 보고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보아도 어색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핸드폰의 액정을 들여다보는데 부재중 전화는 10통이 찍혀있었고 카톡은 50개 정도가 와 있었다. 부재중 전화에는 종대, 종대, … 준면이 형, 경수, 경수, ……찬열. 나머지 부재중 전화는 모두 찬열의 것이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리고 카톡창을 열었다. 왜 전화를 받지 않냐면서 제대로 뻗은 거냐는 경수와 종대의 비슷한 내용의 카톡을 지나 아래로 내려 보니 찬열의 카톡이 30개 정도 와 있었다. 피하고 싶었지만, 지우고 싶었지만 어느새 손가락은 찬열의 대화창을 누르고 있었다.
[선배]
[선배 자요?]
[이거 보면 답장 줘요]
빵집에서 찬열에게 말도 없이 나온 날 밤 보낸 카톡이었다. 그때 백현은 이유 없이 펄펄 끓는 몸에 못 이겨 해열제를 꾸역꾸역 먹고 달뜬 숨을 몰아쉬며 잠을 자려 애쓰는 중이었다. 물론, 핸드폰은 꺼 놓은 상태였다.
[선배]
[저 걱정돼요]
[아파요?]
[왜 빵집 안 나와요?]
.
.
.
[할 말 있어요]
입술을 꾹 다물고 천천히 대화창을 내리다가 나온 찬열의 말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대체, 무슨 할 말이 있는 걸까. 내 감정을 깨달았을까? 그것이 난감한 것일까? 아니면 그 날 함께 온 여자아이의 얘기일까? 수많은 추측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지만 그 어느 것도 백현의 기분을 나아지게 해주지 못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대화창을 계속해서 내렸다.
[직접 보고 얘기하고 싶은데...]
[선배 아프구나]
[아프지 말아요]
그 말을 보니 심장이 찌르르하고 울렸다. 분명 찬열은 아프지 말라고 저를 위로 하는데 백현은 오히려 더 아팠다. 어디가 아픈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쿡쿡 쑤셔대는 것 같았다.
[그냥 여기서 말할게요]
[저...]
[저]
[사실]
상당히 뜸 들인 흔적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계속해서 대화 창을 내렸다.
[사실 저...]
뜸들이고 뜸들인 그 흔적의 끝이 보일랑 말랑 할 시점에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경수였다. 찬열이 한 말이 상당히 궁금했지만 경수의 전화를 끊을 수도 없어 그냥 봐서 좋을 것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에 홀드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들리는 건 경수의 잔소리였다. 백현은 전화기를 귓가에서 약간 떼어내면서 잔소리를 받아냈다.
“경수야, 나 환자야.”
- 환자고 나발이고, 전화는 켜놔야 될 거 아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형이 이틀 동안 쉬라고 해서 집에서 그냥 이틀 내내 잠만 잤어. 미안해…. 화 풀어, 응?”
- 나 화 푸는 거 보고 싶으면 당장 학교 앞 호프집으로 와.
“…응?”
- 빨리 와라, 백현아!
백현은 자신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잔소리를 퍼부어대고는 갑자기 학교 앞 호프집으로 오지 않으면 평생 절교할 것처럼 나오는 경수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백현은 어느새 핸드폰 액정 화면을 끄고 코트를 입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털모자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백현은 자신이 경수에게 길들여지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뭐, 이틀 내내 꼬박 잠에만 빠져있었으니 휴일 마지막에는 술로 마무리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랜만의 술자리였다. 백현은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택시를 잡고 호프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오는 네온사인 불빛이 가득한 거리는 굉장히 낯선 느낌이었다. 그래도 휴학하기 전에는 선배들한테 예쁨도 많이 받고 나름대로 좋은 시간이었는데. 그 놈의 등록금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일 뿐인 백현에게서 대학생활에 대한 로망스를 다 빼앗아갔다. 백현은 두리번두리번 호프집을 찾다가 드디어 시야에 들어온 호프집 간판을 보고 서둘러 들어갔다. 역시 인산인해였다. 꽤 넓은 호프집을 이리저리 살피는데 저쪽에서 경수가 손을 들고 인사했다. 백현도 손을 들고 그 쪽으로 가는데,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경수의 주위 얼굴들을 살펴보고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백현이 손을 흔들다말고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 그 자리에 우뚝 서자 당황한 경수가 서둘러 백현 쪽으로 다가왔다.
“너 저번에 OT도 바쁘다는 핑계로 쏙 빠지더니 오늘도 그러려고? 절대 안 돼.”
“경수야, 나 갑자기 열이… 아악! 도경수!”
백현은 졸지에 경수에게 목덜미가 잡혀버렸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얼마 안 가서 의지 없이 질질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는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다. 경수는, 과모임에 백현을 부른 것이다. 낄낄 웃으며 경수와 백현 쪽을 보는 과 동기들 사이에는,
……찬열의 시선이 있었다.
***
“백현이 오랫동안 술 안 마시고 내빼더니 좀 주량이 줄은 거 같다?”
“맞아. 빵돌이 되더니 확 줄었어.”
“우쭈쭈. 우리 백현이 빵 사다 줄까?”
백현은 할 수만 있으면 저 깐족거리는 입들을 다 뭉개버리고 싶었다. 가뜩이나 대부분이 모르는 얼굴이라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는데 자신이 오기도 전에 이미 취해버린 동기들 덕에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도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 저것들을 그냥……. 백현은 동기들에게 뭐라 말도 못하고 조용히 안주만 집어 먹고 있는데 그래도 가장 불편한 이유는 계속해서 자신을 쳐다보는 찬열의 시선이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건지 눈을 살짝 마주칠 때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찬열도 선배들 앞이라서 그런지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워보였다. 백현은 자기가 신입생도 아닌데도 신입생들 보다 더 안절부절 못하는 꼴이 한심스러워 보였다. 술을 입에 대려고도 해봤지만 그만두었다. 여기서 술을 마시고 뻗어버리면 내일 토익학원이고 뭐고 또 다시 준면에게 신세를 져야 함이 틀림없었다. 그냥 술자리 분위기에 취하자는 심정 반, 경수에게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는 심정 반. 저쪽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동기 탓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화장실이라도 갈 심산으로 일어섰는데 경수가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어디가!”
“화장실 간다, 화장실. 그리고 김동현. 담배 좀 끊어라.”
헤실헤실 웃으면서 담배를 피워대는 동현의 뒷통수를 백현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때려준 뒤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기침이 나왔다. 담배 냄새는 딱 질색이었다. 화장실에도 담배 냄새가 짙게 내려앉은 듯 했지만 그래도 답답한 기운이 어느 정도 가셨다. 숨을 훅 들이 마시고 손을 씻은 뒤 화장실을 나가려는데 앞에 드리운 그림자에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고개를 내려 시야에 들어찬 운동화 끝이 낯설지 않았다. 목이 따끔거려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깊은 눈동자가 백현의 눈동자에 와서 박혔다.
“선배.”
“…미안, 나 가 볼게.”
“잠시만요.”
가려는 백현의 손목을 잡은 손이 뜨겁게 달아올라있었다. 백현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마주한 찬열의 눈을 계속 보고만 싶어서,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해서, 찬열의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찬열이…끝도 없이 좋아져서. 복잡한 심경이었다. 찬열에게 우는 꼴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살짝 힘을 줘서 손목을 돌려 빼니 힘없이 큰 손이 떨어져 나갔다. 백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찬열을 뒤로 하고 거의 뛰다 싶이 호프집을 나갔다.
찬열은 그런 백현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참 시끌벅적한 분위기 사이에서 가방을 챙겨들고 백현을 따라 호프집에서 나왔다. 옆에 앉아 있던 동기들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거리에 나오니 많은 사람들 사이로 터벅터벅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 백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찬열은 백현에게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간격을 두고 쫓아갔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동기들에 의해서 끌려간 술자리였던 터라 가방은 책으로 가득해 무거웠다. 가방을 고쳐 매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자꾸만 백현이 멀어지는 것 같아 눈을 부릅뜨고 쫓아갔다. 아무리 카톡을 해도 확인도 안 하고 답장이 없는 백현이어서 오늘 술자리에 나올 거라는 건 생각도 못했다. 백현의 표정만 봐서는 카톡을 읽은 건지 읽지 않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발걸음을 빨리 했다. 신호등을 건너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백현은 손닿을 거리에 있었다. 버스가 도착하고 백현은 사람들 틈 사이에 우르르 몰려 올라탔다. 찬열은 거의 마지막쯤에 따라 탔다.
정류장을 하나씩 지나칠수록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백현은 뒷문 바로 앞 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기만 하는 표정이 피곤해 보였다. 힘든 일이 있었던 걸까. 앞 쪽에 서서 백현을 힐끔힐끔 몰래 쳐다보던 찬열은 버스에서 사람이 내릴 때마다 조금씩 백현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백현이 내릴 정류장에 도착하기 두 정거장 전, 찬열은 백현의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내리자마자 백현의 옆에 살며시 앉았다. 멍하니 밖을 바라만 보던 백현은 옆에 누가 앉든지 상관하지도 않는 듯했다. 찬열은 아예 고개를 백현 쪽으로 돌려 대놓고 쳐다보기 시작했다. 밖에는 짙게 어둠이 깔리고 버스가 잠시 멈췄을 때, 순간 창밖을 쳐다보고 있던 백현은 창에 비춰진 찬열의 시선과 마주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
“…….”
백현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찬열과 마주했을 때 버스에서 이번 정거장이 백현이 내릴 정거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백현이 벨을 누를 생각도 하지 않고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찬열이 살짝 상체를 일으켜 백현 대신 벨을 눌렀다. 그제 서야 백현이 정신을 차리고 정면에 시선을 두었다. 버스가 멈추고 찬열이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가 떠나니 버스정류장은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백현은 찬열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찬열은 말없이 백현의 뒤를 따랐다. 백현은 떨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창에서 마주친 찬열의 눈빛을 인식했을 때부터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졌다. 찬열과 마주하기만 하면 왜 이렇게 심장이 솔직해지는 건지 알 방법이 없었다. 계속해서 뒤를 따라오는 찬열의 마음을 알 방법도 없었다.
며칠 전 찬열과 함께 올랐던 언덕길이 나오자 백현이 한숨을 쉬고 뒤를 돌아보았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고개를 숙이고 따라오던 찬열은 멈춰진 백현의 발걸음에 자신도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왜 따라와.”
“할 말 있어서요.”
“나중에 들을게. 지금은 들을 기분이 아니야.”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찬열에게 전해질까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하고 언덕길을 오르는데 뒤에서 자꾸만 찬열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참다 참다, 계단이 나오자 한 계단 올라선 뒤 다시 뒤를 돌았다. 진지해진 찬열의 눈빛이 백현을 감싸고돌았다. 이대로 가다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찬열아. 나 진짜….”
“선배.”
“…응.”
“카톡 봤어요?”
“보다 말았어.”
갈수록 작아지는 백현의 목소리에 찬열이 한숨을 지었다. 한숨도 낮게 뱉어내는 찬열이 낯설어 백현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할 말, 할게요.”
“…….”
“어차피 선배 앞에서 하려고 했어요.”
“…….”
“저 사실,”
자꾸만 뜸을 들이는 찬열이 밉기만 했다. 코트 끝자락을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붙잡고 찬열을 위태롭게 내려 보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이 반짝 빛나는 찬열의 눈빛 덕에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백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선배.”
“…….”
“좋아해요.”
그 눈빛을 꾸역꾸역 담아내고 있는데 찬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자신이 항상 입가에서 중얼거렸던 말인데도 낯설었다. 좋아한다, 라는 말을 한 건가, 지금? 백현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목이 턱 막히면서 울렁울렁 무언가가 치고 올라왔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찬열이 어깨를 감싸 안았을 때에 비로소 백현은 자신이 울고 있음을 느꼈다. 막상 눈물이 터지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용한 골목에 백현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흐으…….”
“선배 왜 우는지 그거 제 맘대로 해석해도 되죠?”
“…흐윽.”
“좋아해요, 선배.”
“흐…, 찬열아….”
백현은 눈물을 끊임없이 쏟아내면서 찬열이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끅끅 대면서 울면서도 찬열의 이름을 부르는 건 멈추지 않았다. 찬열은 그게 너무도 듣기 좋아 가만히 백현의 등을 쓸어 주기만 했다. 어느 정도 백현의 울음소리가 멎자 찬열이 품에서 백현을 떼고 볼을 쓸어 주면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백현은 찬열의 얼굴을 마주하자 곧바로 방금 전까지 자신이 마구 울어댄 사실을 깨닫고 눈을 깜빡깜빡 거렸다. 찬열은 백현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알고 씨익 웃어넘긴 뒤 백현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섰다. 뒤에서 백현이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굴하지 않고 기어이 백현의 원룸 입구 앞에 다다랐다. 백현이 찬열에게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지 망설이니까 찬열이 조용히 원룸 옆 담벼락에 백현의 등을 기대게 했다.
“가기 싫다.”
“…얼른 가. 날씨 추워.”
“네. 선배도 얼른 가요.”
“근데, 저기….”
“네?”
“네가 피해줘야 가지…….”
졸지에 찬열의 품 안에 갇힌 꼴이 된 백현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찬열이 웃으면서 벽에 기댔던 팔을 내렸다. 내려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백현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며 백현의 양팔을 잡았다. 백현이 뭐라 말하려 입을 연 것 보다 찬열의 입술이 백현의 입술에 내려앉은 것이 더 빨랐다. 백현의 팔을 잡은 찬열의 손이 점점 내려가 공중에 어중간하게 떠 있는 백현의 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 고개를 돌려 입술을 머금었다. 눈을 꾹 감고 깍지를 낀 손을 꼬물거리는 백현이 사랑스러웠다. 올해 봄은 조금 더 빨리 따뜻해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동시에 두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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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자님들! 루시입니다ㅎ♡ㅎ 다름이 아니라, 상/중/하 편에 암호닉을 신청한 분들에 한해서 제 개인홈에 올릴 번외편과 상,중,하편을 묶은 텍파를 메일링을 통해서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번외에는 찬백이들의 에피소드 2개와 떡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부족한 제 글을 봐주시는 분들에게 감사의 표현을 글로나마 전해드리고 싶어서 이번 하편에 암호닉을 신청한 분들까지 보내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말 정말 너무 감사드립니다ㅠㅠ 하트♥ 암호닉은 텍파 메일링 공지 올리기 전까지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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