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me ; 안개 -01 =3월 초. 봄이 코앞에 다가온 시점이지만 꽃샘추위 때문에 아직은 아침과 밤의 기온이 많이 낮은 날씨였다. 막 잠에서 깬 한솔은 그날도 청소년센터에서 주는 (본인 입맛에서는) 맛이 없는 밥 대신 초콜릿으로 배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하며 mp3와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후드티의 모자를 덮어쓴 다음 센터를 나와 편의점으로 향했다. 학교도 그만두고 친한 사람도 얼마 없는 전형적 아웃사이더인 한솔이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어색할 것 같아 늘 큰 후드티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다녔다. 편의점에 들어가 늘 먹던 다크 초콜릿과 밀크 초콜릿을 하나씩 집어 천원 짜리 지폐 두 장과 함께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계산을 마친 후 편의점에서 나와 밀크 초콜릿의 포장지를 뜯던 한솔은 멀쩡히 돌아가던 mp3의 노래가 멈춘 것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젯밤에 충전을 시켜놓은 줄 알았는데, 아닌가? 한솔은 발을 좀 더 빨리 움직였다. 빨리 충전기를 연결해놓아야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날씨도 어제에 비하면 많이 추워진 터라 괜히 찬바람 맞고 있다가는 감기에 걸릴 것 같기도 했다. 빠른 걸음으로 종종대며 청소년센터에 돌아온 한솔은 방에 돌아와 포장만 뜯어둔 밀크 초콜릿을 입에 물고 충전기를 찾았다. 분명 여기 놔둔 것 같은데 왜 없는거야, 한솔이 쓰던 서랍을 열어봐도 충전기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솟구치는 것을 누르며 혹시나 옆방에 있을까, 하는 마음에 자신의 방을 나왔다. 생각해보니, 오른쪽 방을 쓰는(이름은 모르는) 여학생 한명도 한솔과 같은 기종을 쓴다며 충전기를 몇 번 빌려갔던 적이 있었다. 한솔은 바로 오른쪽 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평소라면 크게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었겠지만 새 학기가 시작된 터라 청소년센터에는 한솔 혼자밖에 없었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솔이 문을 연 방의 벽 한 쪽에는 여학생이 한솔에게서 빌려간 충전기가 꽂혀 있었다. 한솔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충전기를 가지고 방으로 돌아갔다. 한솔이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충전기를 찾느라 부산을 떤 탓일까. 어느새 시곗바늘의 시침은 열시를 넘어 열한시를 향해가는 중이였다. 한솔은 충전기를 연결한 mp3를 켠 다음, 밖에서 듣던 노래를 다시 재생시키고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한솔의 나이 18살. 청소년센터에 눌러앉은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은 시간도 1년이 넘었다. 한솔이 학교를 나가지 않은 것도 2년째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진학을 포기한 것이지만. 어쨌든 빠르면 1년 안으로 알바든 일자리든 구해서 방을 빼줘야 할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청소년센터’ 이기에 성인이 되기 전에 센터에서 나가주는 것이 나름의 규칙이라면 규칙이었다. 보육교사로 남는다면 모를까, 그런 경우가 아니면 18살에서 19살쯤에는 센터에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솔은 또다시 무력해짐을 느꼈다. 아, 그런데 나가면 어디서 살지. 일자리는 또 어떻게 구해? 이렇다 할 능력도 배경도 없는 한솔에게는 실로 난감한 문제였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며 2년을 지내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딱 꼬집어 무언가를 했다고 말하기는 좀 민망할 정도였던지라 1년 내로 알바든 일자리든 구하기는 확실히 무리였다. 말도 안하고 이어폰과 초콜릿만 달고 다니는 한솔이다. 그렇다고 무언가 꿈꾸는 것이 있느냐 하면, 나중에 뭘 할 거냐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어떻게든 되겠죠. 라며 어물쩍 넘어가거나 아예 대답을 피해버리던 한솔이 무언가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기대는 사실상 힘들었다. 어떡하지, 일단 나가서 살 곳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내가 돈이 남아있던가? 얼마나 남아있더라, 초콜릿밖에 안 사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디서 돈이 특별히 들어오거나 했던 적도 없는데. 그렇게 한솔은 음악을 들으며, 생각을 하며 앉아 있다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한솔이 잠이 들고 난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한솔의 방 바로 옆에서 비명 소리와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비명과 웃음소리,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잠이 깬 한솔은 눈을 뜨고 습관적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세시 반, 중학생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대였지만 그렇다고 평소에도 이런 소리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 비슷한 소리가 난 적이 있었다고 해도 이번에는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했다. 비명소리는 여자아이의 것이 맞았지만 웃음소리는 아니었다. 또래의 장난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누군가 악의적으로 한 일이다. 살짝 열린 방문으로 조금 넘겨다본 밖은 끔찍했다. 여학생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흉기를 든 남자 몇명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 누가 용감히 나서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상황 뿐 만이 아니라 한솔은 약했다. 원래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청소년 센터에 들어오고 학업을 포기한 이후로는 음악을 듣는것 이외에는 해 본 것이 많지 않았다. 누구와 싸우는 것도 해 본 적 없다. 어쨌든 한솔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도망치는것 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솔은 mp3 충전기와 오전에 사둔 초콜릿, 그리고 돈과 몇몇 쓸만한 것이나 중요한 물건들을 챙겨 창문을 통해 조심히 밖으로 나왔다. "야, 너 뭐야. 거기 안 서?" 바깥에도 기다리던 사람이 있을 줄이야, 한솔은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지만 일단은 있는 힘껏 달렸다. 어차피 들켜버렸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면 한솔의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해 질 것이라는건 누가 봐도 뻔한 상황. 뒤에서는 아까 한솔을 본 거대한 체형의 남자가 빠른 속도로 한솔을 잡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최대한 빨리, 가능한 오래 뛰어야 하기에 차마 입밖으로 욕을 뱉어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한솔은 속으로만 욕을 삼켜내며 계속 달렸다. 1초라도 느려진다면 죽는다. 그 아이처럼 온 몸이 찢긴채로. 생각할수록 무섭고, 흉측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 당장이라도 순순히 잡혀 그나마 얌전히 죽으면 했지만 이미 도망치기로 한 이상 잡히면 개죽음을 면치 못한다. 한솔은 그렇게 생각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쫓아오던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로도 불안감에 휩싸여 한시간이 넘도록 달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황당함을 가라앉히고 풀밭에 누워 찬찬히 상황을 되짚어보던 한솔이 여기까지 생각해보고 나자, 새삼 오늘 먹은것이라고는 밀크 초콜릿 하나뿐이라는게 생각났다. 딱히 한솔이 뭘 많이 먹거나 하는 편은 아니지만 오전 열시 경에 먹은 밀크 초콜릿 하나로 네시간을 달렸던 탓에 배가 고팠다. 누워있던 한솔은 몸을 일으켜 앉으며 주머니에 챙겨뒀던 다크 초콜릿의 포장지를 벗겨내고 초콜릿을 한 입 베어물었다. 말 그대로 미친듯이 달렸던 탓에 아직까지도 숨이 약간 거칠었지만 그래도 입안에 감도는 달콤하면서도 조금은 쓴 맛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 나서야 한솔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지천에 깔린 이름 모를 잡초와 큰 나무 몇 그루가 전부였다. 한솔이 고개를 들자 별들이 한솔의 시야에 들어왔다. 참 예쁘다, 라고 생각하며 한솔은 팔을 베고 바로 누웠다. 한솔에게 남은 것은 mp3와 충전기, 어디서 났는지 몰라도 일단 가져와본 라이터와 초코바 몇 개와 돈 뿐이었다. 갑자기 한솔은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뭘 어쨌길래 이렇게 됐을까. 하는 마음에 괜히 한숨이 나왔다. -말도 안나오고, 센터에서도 도망쳐 나오고, 김한솔 인생 팔자 왜이따위일까-라며 한솔은 대상 없는 비난을 하다 눈을 감았다. 정신없던 와중에도 잘 꽂고 있던 이어폰은, mp3에서 재생된 한솔이 가장 좋아하던 노래를 전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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