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4년 전, 세차게 내리던 비가 그칠 즈음이었다. 어린 아이들의 기합 소리가 눅눅한 도장을 가득 채우던 늦은 저녁, 아파트 상가에 자리 잡은 태권도장엔 많지 않은 수의 아이들이 운동 중이다. 대부분 빨간 띠를 매고 있는 아이들이 품새를 익히고 있는 와중 유난히 긴 검은 띠를 매고 있는 유지. 유지의 앞에 서서 훌쩍이는 더 작은 체구의 정국. 둘은 마주 서 있다.
꿈쩍이지 않고 훌쩍이는 정국에게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허리에 손을 얹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유지.
“너 한 번만 더 울면, 나랑 결혼해야 된다!”
도장 전체에 울리는 유지의 협박. 순간, 깜짝 놀라 숨을 멈추어버린 정국과 한동안의 정적 끝에 호탕하게 웃으시는 관장님과 아이들.
그래, 유지에게는 협박이었다. 분명히.
오늘의 너와 오늘의 나는
w. 바다비
긴 숨을 내뱉고 의자에 기대어 기지개를 피는 유지. 기지개를 피고도 좀처럼 늘어져 있는 유지의 얼굴에 컴퓨터의 불빛이 묻어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에 유난히도 긴 속눈썹이 얇게 자리 잡고 있으며, 긴 머리를 높게 묶어 희고 얇은 목선이 눈에 띈다. 이후, 한동안 눈을 감고 앉아 있던 유지는 슬리퍼를 운동화로 갈아신은 뒤, 컴퓨터를 종료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도 제일 마지막으로 퇴근하는 유지.
사무실의 유리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유지. 이내, 엘리베이터는 5층에서 문이 열리고 지쳐있는 유지는 눈을 반 쯤 감은 채 올라탄다. 무의식으로 1층 버튼을 누르지만, ‘1층, 취소되었습니다.’라는 안내음을 듣고 눈을 번쩍 떠 확인해본다. 이미 눌러져 있던 버튼을 한 번 더 누른 탓에 갈 곳을 잃은 엘리베이터는 멈춰 서버렸다. 그제야 눈을 뜨고 주변을 확인하는 유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큰 키에 넓은 어깨. 딱딱한 수트가 아닌 캐주얼한 티에 자켓을 걸친, 석진이었다.
‘아, 다른 부서분이셨지.. 요즘 자주 보이시네’
남들에게 별다른 관심 없는 유지였지만, 유독 눈에 띄는 외모 덕분에 석진은 익숙할 정도였다.
“마케팅부 신입이시죠?”
저도 모르게 멍 때리며 석진을 쳐다보던 유지에게 먼저 말을 거는 석진. 그에 깜짝 대답은 못하고 고개만 여러 번 끄덕인다. 그런 유지의 모습에 입술을 꾹 누르며 웃음을 참는 석진. 남들보다 조금 더 작은 체구이지만, 전혀 작아보이지 않는 체형과 자세 덕분에 씩씩함이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석진이 바라본 유지의 첫인상이었다. 인사팀인 석진은 면접 때부터 유지를 눈여겨 봤었다.
서류를 보고 들었던 생각은 ‘운동을 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사회생활을 할 수나 있겠어,’ 였고, 면접을 보고 들었던 생각은 ‘이 사람을 인사팀에 넣긴 힘들겠고, 내가 부서를 옮겨야 되나?’ 였다.
언제나 능글맞다는 이야기를 듣는 석진이지만, 유지에게서 느끼는 호기심은 진심이었다. 진정으로 자꾸만 궁금해졌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눈으로 계속 쫒고있었다.
“근데 안 내려가세요? 1층.”
아, 너무 깜짝 놀란 탓에 입은 안 떨어지고 고개만 끄덕였더니 목이 조금 아프다.. 엘리베이터에 누가 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석진이 다시 한번 말을 걸자 끄덕이던 고개를 멈추고 정신을 차린다.
급하게 1층을 누르려고 손을 뻗어 버튼을 누르자, 다른 쪽에서 동시에 1층 버튼을 누른 석진. 동시에 눌린 버튼은 다시 빨간 불빛을 번쩍이다 사라진다. 눈이 마주친 둘은 푸핫, 하고 웃어버린다.
“그럼, 제가 누를게요.”
둥글게 휘어져 보기 예쁘게 웃는 석진이 유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팔을 뻗어 버튼을 누르고, 그제서야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여전히 빤히 쳐다보는 석진의 눈빛에 어색함을 감출 수 없는 유지.
“야근 자주 하시나봐요?”
“아, 네.. 늦게 일을 시작해서, 많이 어렵네요 하하”
말에서 어색함이 뚝뚝 떨어지는 유지는 마른 입을 계속 뻐끔거린다. 눈을 올려 엘리베이터 층수를 확인하지만, 왜인지 느리게만 내려가는 듯하다.
“저는 원래 야근 잘 안하는데, 오늘은 하길 잘했어요.”
계속 말을 거는 석진에게 큰 대꾸 없이 하하 웃음으로 넘겨보는 유지. 석진은 그런 유지를 쳐다보며, 입술을 한번 물어 뜯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말한다.
“오늘 치킨 먹을래요? 좋아해요 치맥?”
“아..? 네?”
갑작스럽게 제안해온 석진의 말에 석진을 올려다보는 유지. 왜인지 강아지 같이 쳐다보는 석진이 너무 귀엽게만 보여서 대뜸 눈을 피해버린다. 그러자, 몸을 조금 옮겨 고개 돌린 유지의 앞에 바로 서는 석진이다.
“치킨...말이죠..?”
아까와는 다르게 공기에 숨이 막히는 유지는 이상할만큼 느린 말투로 말끝을 늘리지만, 그 전보다 더 반짝이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석진 때문에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좋아ㅇ..”
‘1층입니다.’ 안내음에 맞춰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 개미만한 목소리로 대답하던 유지의 목소리가 안내음에 묻혀버린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문 앞에 서 있는 남자. 덕분에 서로를 쳐다보던 둘은 자연스레 시선이 떨어진다. 문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엘리베이터 안의 두 사람을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다, 유지와 눈이 마주치니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딱인다.
“윤기오빠?”
죽을 만큼 숨 막히던 공간에서 벗어나나 했더니, 대뜸 문 앞에 서 있는 윤기 때문에 몸이 굳어버리는 줄 알았다. 윤기의 고갯짓에 느릿느릿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유지. 뭔가 들켜버린 듯 한 기분에 찝찝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들어내는 유지다. 유지 뒤를 따라 내리는 석진이는 어리둥절 해보이지만, 윤기는 상관 없다는 듯 여유롭게 석진에게 목례를 한다. 따라 짧게 목례하는 석진. 누구인지 어떤 상황인지 설명이 필요한듯한 석진은 유지를 쳐다보지만, 석진의 눈에 보이는 유지 또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자신보다 더 당황한 듯한 모습에 또 다시 웃음이 터져나올 뻔 했지만, 손가락으로 광대를 꾹 눌러 참아내는 석진.
“아부지가 너 오늘 도장에 잠깐 들러보래. 뭔 회사가 이렇게 늦게 끝나냐.”
“아.. 미리 연락을 하지, 계속 기다렸어?”
“아니야, 방금 왔는데 뭐.. 됐다. 가자”
뒷머리를 긁으며 귀찮다는 듯 말하는 윤기에게 지금까지 보인 모습 중 가장 편안해 보이는 모습의 유지다. 자신의 말에도 선뜻 움직이지 않는 유지에게 뭐하냐 라는 뜻으로 눈썹을 꿈틀이자, 쭈뼛이며 석진에게 몸을 돌리는 유지. 석진은 이미 상황이 파악된 듯 유지에게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아쉬움과 유지에 대한 새로운 궁금증이 생겨있다.
“저.. 어쩌죠,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유지가 낯선 남자와 건물을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는 석진. 아까 웃음을 참느라 꾹 누른 광대가 그제야 조금 아픈지 손가락으로 둥글게 굴려본다. 이제는 웃음을 참지 않고, 환하게 웃는 석진은 그 웃음이 아주 해맑다. 자신도 퇴근하기 위해 차키를 찾아 주머니를 더듬던 석진의 손에 진동이 울리고 있던 핸드폰이 잡힌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니, 동시에 끊기는 전화. ‘백변호사님’. 한 사람에게만 9통의 부재중 전화가 남겨져 있다.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석진의 얼굴에서 웃음을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싸늘하게 변해버린 석진. 뒷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 빠르게 건물을 나가는 석진이다.
“오빠 덕분에 살았다 진짜.”
“뭔 헛소리야, 배고파 진짜”
나란히 앉아 버스에 몸을 싣는 유지와 윤기. 꼼짝없이 불편한 석진과 치킨을 먹게 될 줄 알았던 유지에게 윤기의 등장은 히어로와 같았다. 왜 관장님이 자신을 찾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 저것 물어보다간 이미 귀찮음으로 똘똘 뭉친 윤기가 자신에게 화를 낼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그냥 얌전히 따라가는 유지다.
조용한 태권도장. 도장 문 앞에 가까이 가니 그제야 희미하게 들리는 거친 숨소리. 오랜만에 온 도장이라서 그런지 유지는 이유 모를 두근거림으로 온 몸이 저릿하게 느껴진다. 조심스럽게 잡은 도장 문을 밀고 들어가자 훅 느껴지는 뜨거움. 오랜 열기와 땀으로 후끈해진 도장 내의 공기가 단번에 느껴지자 갑자기 신이 날 것 같은 유지였다.
혼자 남아 익스트림을 연습하던 정국. 흰 도복 사이로 넓게 벌어져 있는 어깨와 가슴이 땀에 흥건하다. 도장의 문이 열리자, 운동을 멈추고 문을 바라보는 정국. 그 곳에 서 있는 유지의 모습에 땀을 대충 소매로 닦더니 뛰어간다.
엄마를 기다린 애기마냥 자신을 보고 뛰어오는 정국의 모습에 익숙한 듯 한숨을 쉬는 유지다. 유지는 뻔한 레퍼토리이기에 이후 정국이 어떤 행동을 할지 알고 있었다. 자세를 고쳐잡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그런 유지의 준비를 무시하는 듯 번쩍 들어 안아 올리는 정국이다. 놀랄 정도로 키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리는 정국 때문에 새삼 운동을 오래 쉬었구나 싶은 유지다. 사실은 당연하게 나는 체격 차이 때문이지만, 그것만큼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한 유지의 본심이다.
“아내, 왔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안아 올린 유지를 쳐다보는 정국은 놀리는 듯한 말투로 유지에게 말을 건네지만, 어딘지 확신에 찬 말투이다. 그만 좀 하라는 듯 화내는 유지의 주먹질에도 끄떡 없는 정국은 여전히 안고 있는 자세로 유지의 가방을 어깨에서 내려준다. 한 팔로 엉덩이 아랫쪽을 받친 채, 다른 한 손으로 신발을 마저 벗겨주는 정국이다. 그대로 도장의 한 가운데에 서서 유지를 빤히 쳐다보는 정국의 눈빛에 포기한 듯 내려다보는 유지가 땀에 젖은 정국의 앞머리를 손으로 탈탈 털어준다.
“뭐요, 전정국씨?”
“결혼은 언제합니까 송유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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