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생전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해본 건
처음이었다.
당신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제 1장>
-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 -
아, 개같다. 째랑째랑 울려대는 알람을 신경질적으로 끊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4시 30분. 출근 준비를 하기에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분이 이렇게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이유는 일주일간 지속됐던 야근과 어젯밤 배터지도록 먹은 부장님의 욕짓거리 때문일 것이다. 하는 일은 없으면서 사원들 갈구기가 일쑤인 분 덕분에 하루에 사직서를 낼지말지 12번은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아침에 기분나쁜 꿈을 꾼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찜찜해.
"오늘은 왜 금요일인거야"
토요일은 언제 오니? 젠장, 우울하다. 미친듯이 출근하기 싫다. 출근 싫어! 온 몸으로 출근을 거부한다는 듯이 침대에서 어기적댔지만 결국 나는 월급에 노예인가보다. 5분도 채 안 돼서 현실을 직시했다. 먹고는 살아야지. 암 그렇고 말고. 이불을 걷어내고는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은 또 어떤 개같은 일이 일어날려나. 끔찍한 하루가 또 시작됐다.
***
"안녕하세요"
"탄소씨 왔어? 좋은 아침"
"네, 호석씨는 오늘도 기분 좋아보이시네요"
"허허, 나야 매일 기분 좋지"
탄소씨는 오늘따라 유독 피곤해보인다? 예, 뭐. 요즘 야근이 잦았잖아요, 하하. 내 얼굴을 살피던 호석씨는 '쉬엄쉬엄해'라고 말하고는 커피 한 잔을 쓱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이런거 가지고 뭘. 씩 웃어보이고는 오늘도 힘내라고 말해주시곤 자리로 돌아간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세상에 호석씨 같은 사람만 있다면 얼마나 살기 좋을까? 아니다, 하다못해 호석씨 같은 상사만 있었어도 대한민국에 나이문화는 없었겠지. 시답지 않은 생각들을 멍청히 늘어놓다가 내 자리로 걸어갔다. 책상을 보니 어제 급하게 업무를 끝내곤 치우지 않은 서류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아, 죽고싶어"
"에이, 김주임 그 정도로 죽으면 곤란해"
"아, 놀래라. 놀랐잖아요, 김대리님"
"안 그래도 작은 부서에 일은 산더미인데 김주임 한 사람 빠지면 우리 부서가 얼마나 난감해지겠어, 안 그래?"
"김대리님은 말을 어쩜 그리 짜증나게 하시는지 존경스럽네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는 내 모습이 꽤나 볼만 했는지 흐흥거리며 웃어보이는 대리님이었다. 김대리님이 정호석씨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때 갑자기 내 귀쪽으로 얼굴을 훅 내민다. 그리곤 나에게만 들리게 속삭인다.
"오늘 데이트 하자, 야근 빼줄게"
"그거 권력 남용인 거 아세요?"
"권력 남용은 무슨?"
내가 네 일까지 다 할 건데?
그렇게 말하고는 내 책상에 있던 주요 업무서류를 가져가버린다. 얘 뭐래니? 다급하게 김태형의 팔목을 붙잡았다. 너 뭐하냐라고 큰 소리로 말하려다가 누군가 들을까 서둘러 목소리를 낮췄다. 이를 악물었다.
"그걸 왜 네가 해?"
"말 했잖아. 데이트 하자고"
"내 일이야. 남한테 떠넘길 생각없어"
의아했다. 갑작스럽게 정적이 흘렀다. 얘 갑자기 또 왜 이래? 고개를 살짝 떼어내고는 김태형을 바라봤다. 묘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표정. 분명 기분이 몹시 불쾌할 때 김태형이 과감하게 드러내는 표정이었다. 내가 무슨... 아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가 남은 아니잖아?"
이런, 씨발. 역시나였다. 묘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김태형을 모르는 척 했다. 아니 그게. 어떻게든 수습해야 하는데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감이 안 잡혔다. 미친, 입이 방정이지. 자기야. 어떻게 말해야할까 엄청 고민하고 있는데 김태형 특유의 낮고 차분한 음성이 귀 속을 타고 들어왔다. 어? 이건 압수.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김태형이 싱긋 웃어보이더니 호석씨가 타준 커피를 휙 가로챈다. 멍청히 뺏긴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외간 남자가 준 음식 함부로 받아 먹지 말고"
그리곤 내 손에 자기가 들고있던 커피를 쥐어주곤 자기 자리로 가버린다. '정사원 커피 잘타네'라는 시답잖은 말은 옵션으로 해주고 말이야. 의자에 털썩 앉았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오늘도 김태형한테 말렸다. 아침부터 피곤해졌다. 멍청히 고개를 들고 하얀 천장을 바라봤다. 또, 도움받네. 벌써 몇 번째야. 저번 야근때도 도와줬고 계속해서 김태형에게 도움받았던 일들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자꾸 이렇게 도움받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인턴이었고 나는 대학졸업한 백수였으니 연애초부터 그에게 준 것보단 받은게 많았다. 평소 남에게 도움받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고 말이야.
"김주임, 인상 좀 피시죠"
익숙하지만 편하지 않은 이 목소리. 나는 저절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민과장님이었다. 민과장님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눈이 저절로 감기면서 머리가 아팠다. 아침부터 일진이 왜 이리 사나운 걸까. 아, 민과장님이시군요. 보면 모릅니까? 눈썹이 나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하하, 그럴리가요. 좋은 아침입니다.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았다. 난 좋은 아침인데 김주임은 별로인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 새끼는 아침부터 지랄이야?
"요 며칠동안 야근을 했더니... 하하"
"야근 몇 번 했다고 그 상태면 업무처리 속도가 대강 보이네요"
이건 오늘 해야할 업무입니다. 그렇게 타박을 주고는 자리로 가는 민과장님이다. 저 성격으로 어떻게 과장까지 간 건지 의문이야. 눈으로 민과장님께 욕하고는 자리에 앉아 오늘 업무를 확인했다. 지난 일주일동안 해온 것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무엇보다도 김태형이 아까 밀린 업무를 가져간 덕분에 오늘은 정상 퇴근이 가능할 것 같았다. 다행이다. 야근을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데이트 때 뭘 해야할지 고민이 됐다. 무슨 영화가 재미있더라. 타자를 치는 내내 고민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회사 쪽지가 띠링-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울린다.
<김태형 대리님>
김탄소씨, 이번에 개봉한 영화 봤어? 반응 좋다던데
어쩜 생각하는 게 둘이 거기서 거기인 걸까. 쪽지를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고 자연스레 김태형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 역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으며 입모양으로 내게 말했다.
'끝나고 역에서 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업무에 집중했다. 김태형과 연애한지도 벌써 5년이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그와 만났으니까 5년쯤 된 게 맞는 것 같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구나.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때 김태형이 있는 걸 보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여기라곤 생각도 못했지. 귀찮게 어디 다니는지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애초에 '대한민국에 기업이 몇 개인데 설마 내가 들어간 회사에 김태형이 있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이 초래한 결과였다. 정말이지 직장 동료로 만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으니까. 그것도 같은 부서로 말이야. 그래도 회사에 입사한지 1년이 지난 지끔까지 순탄하게 잘 연애해왔다. 가끔 김태형이 아슬아슬하게 '탄소야!'라고 불러버렸을때 가슴이 처렁한 적이 한 두번 있었지만 어찌됐든 아직까지 우리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 됐다. 자, 모두 주목. 바삐 움직이던 사람들의 손가락이 일제히 뚝하고 멈췄다. 이 목소리는 부장님의 목소리였다. 아, 오늘은 또 무슨 지랄을 하시려나. 모두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두 바쁠텐데 한 가지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사정으로 인해 그만 둔 임사원의 빈자리를 채워 줄 새 식구가 왔습니다"
모두가 수군대기 시작했다. 새 식구라. '불쌍한 어린 양이 또 들어오는구나'라고 모두들 생각했을거다. 한숨이 나왔다. 얼마 전에 그만둔 임사원은 내 옆자리였다. 내 기억으로는 꽤나 건강이 악화돼서 그만뒀던 것 같다. 그러면 내 옆자리로 배정될려나. 신입사원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귀찮음이 몰려왔다. 안그래도 이것저것 부장님이 시켜먹어서 야근도 잦은데 옆자리로 배정되면 신입사원의 도우미는 자동적으로 내가 될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이것저것 알려줘야 되는데 할 일이 늘어나 버리잖아.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귀찮아. 잘못하면 오늘 정상 퇴근이 늦어질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자, 어서 들어와요. 부장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두 톤이 높다. 그건 아마도 새 신입사원이 남자에 아주 잘 생겼거나 아주 일을 잘 한다는 말이겠지. 모니터를 쳐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영업부에서 일하게 된 28살 전정국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샐쭉 웃는 모습이 28살같지 않게 풋풋한 남자였다. 앳된 얼굴. 그리고 그가 낯익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다 또렷하게 기억난다. 아니, 보자마자 알아봤다. 지금 상태를 말로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한 단어로는 정의할 수 없다. 영화필름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앞에서 스르륵 하고 지나가는 느낌이라고 말하면 될까. 저 옆모습이 천천히 돌아 나와 눈이 마주쳤을때, 괜히 나를 향해 웃는 것처럼 보였다. 애써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심란한 마음이 짜증났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까닭이었을까 딱히 시선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안들었다. 전정국씨? 먼저 시선을 피한건 부장님에게 불린 그였다. 시선이 끊어지자 심란한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차피 그는 나를 기억도 못할 것이다.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고는 업무를 진행했다. 그러다 내 이름을 언급하는 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전사원 자리는 김탄소 주임 옆자리에요. 모르는 게 있으면 김주임한테 물어보면서 회사에 차차 적응하세요"
어째서 불안한 예감은 항상 벗어나지 않는 걸까. 오늘 데이트할 수 있으려나. 머리를 쥐어싸맸다. 귀찮았고 복잡했고 불안했다. 복잡? 사실 복잡할 거 따위는 없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내가 아는 선에서 대답해주면 됐다. 근데 뭐가 복잡하다는 걸까. 불안. 내가 그를 기억하고 있어서? 아니 어차피 그는 나를 기억도 못할텐데 왜 불안한 건데. 사실 기억하는 거에 앞서 그가 나의 존재자체를 알고있었기나 했어? 도대체 왜 내가 이렇게 심란해야 하는거지. 속이 울렁거린다. 짜증나 돌아가시겠다.
"열받아.."
"김탄소 주임님?"
머리를 쥐어싸매다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 전사원의 큰 눈을 정면으로 마주해야했다. 초롱초롱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때문에 일시적으로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아, 미안해요. 갑자기 안 좋은 일이 떠올라서 그만. 웃기게도 미안하다는 말과 달리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기분이 상했다. 내 존재 자체를 알지도 못하는 이 남자에게 혼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똑같네요. 살짝 웃어보이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똑같네요..? 순간 숨이 멈췄다. 네?
"팔찌요"
저도 그거 있어요, 보실래요? 그리곤 그가 내민 그의 손목에는 정말로 나와 똑같은 디자인에 색상만 다른 팔찌가 묶여있었다. 팍 하고 숨이 트였다. 아. 탄식이 세어나왔다. 이해했다는 의미의 탄식이 아닌 아쉬움이 묻어난 탄식이었다. 그럼 그렇지. 나는 도대체 그에게 무엇을 기대한 걸까. 나를 기억해주기라도 바란거였나. 그의 손이 내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리고 그의 입이 차츰 열리기 시작했다.
"잘 부탁드려요. 많이 가르쳐주세요, 주임님"
"잘해봐요, 전사원"
"편하게 정국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요"
입사 축하드립니다, 전정국씨. 이상하게도 그의 이름을 부를때 더욱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내민 악수에 응한다는 의미로 나도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손까지 잡으니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29년 인생 중 가장 우울하고 심란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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