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큰 마음을 먹고 온 뉴욕은, 별 거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01.
더 자고 싶었지만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람에 겨우 눈을 뜨고 부실 기세로 아이폰을 꽉 쥐었다. 또르릉 울리는 시계모양 밑에 곱게 새겨진 글씨, '오늘 첫 출근!' 아... 맞다, 오늘부터 나 회사 다니지. 일어나자마자 뻐근하게 아려오는 뒷통수와 굳어있는 몸의 통각에 눈썹을 찌푸리며 입가에 머물러있는 침을 대충 닦은 채 몸을 일으켰다. 분명히 말을 하지 않아도 꼴이 엉망일 게 뻔했다. 어제 뉴욕에 온 기념으로 친구와 함께 한바탕 논 탓인가, 어떻게 집에 온 지도 모른 채 하이힐까지 신은 상태로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니 머리가 저절로 아파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 오늘 첫 출근이라 했는데... 빨리 씻고 옷을 입어야겠다 싶어 하이힐을 아무렇게 벗어 집어던진 채 나를 계속 붙잡는 포근한 이불을 애써 무시한 채 침대를 벗어났다. 얼마나 어제 술을 먹었길래 이렇게 몸이 녹진한가 싶을 정도로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몸이 저절로 비틀거렸다. 아, 두야... 벽에 잠시 머리를 기대고 좁은 화장실로 들어가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뭐야, 이거..."
꽤 충격적인 몰골은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니라 상관은 없었기에 능숙하게 평소처럼 세수를 하기 위해 수도꼭지를 트는데 쇄골 쪽에 박힌 빨간색 모양이 눈에 거슬려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게 되었다. 뭐지... 눈을 끔벅거리며 어느덧 흐릿해진 거울을 손으로 대강 닦은 채 눈에 힘을 준 채 시선을 던지자, 헛것이 아니었는지 쇄골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빨간 자국이 다시 보였다. 당황스러움에 칫솔에 치약을 짜던 것도 잊은 채 쇄골 쪽에 손을 가져대어 설마 립스틱 자국인가 싶어 벅벅 문질렀지만 그럴수록 알싸하게 통증만 더 몰려올 뿐이었다. 아, 오늘 첫 출근인데 왜 하필이면... 어떻게 가리면 될 것 같은데 누군가 자세히 보면 티가 날 자국이라 입술을 깨물었다. 신입이 음란하다, 문란한 생활을 즐긴다 이런 소문이 퍼지면 절대로 안 되는데.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멀쩡한 여자의 쇄골에 이렇게 입술을 박은 건가 싶어 기분 나쁨이 몰려오려는데
![[방탄소년단/김태형] 김태형의 50가지 그림자 A | 인스티즈](http://file3.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8/05/07/0/125e4ebd900fddf586c06e5ae2ef822d.gif)
'또 놓아주면 도망갈 게 뻔하잖아"
'으응? 도망이라니'
'저번에도 그렇고, 웃기는 사람이네.'
문득 갑자기 생각나는 얼굴과 음성에 그 자리에서 칫솔을 떨어트렸다. 아예 완전히 암전이면 좋을텐데 물방울에 물감 한 방울 떨어트리 듯 서서히 생각이 나는 어제의 일에 발끝에서부터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술에 완전히 취한 채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베시시 웃음만 짓던 나와 그런 나를 내려보던 한 남자. 이 기상천외한 물건은 뭐지, 생각을 하며 나를 바라봤던 것 같은데... 웃기게도 이 대화 말고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다는 것이다. 뭐지,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다시 칫솔을 문 채 머리채를 잡아뜯었다. 아무리 제 자신을 고문을 해도 기억은 우습게도 전혀 나지 않았다. 설마 핸드폰 번호까지 막, 교환한 건 아니겠지. 절대로 뉴욕에 와서 사고는 치지 않겠다 부모님께 장담드리고 왔던 나였기에 식은땀을 흘린 채 변기 커버 위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을 주시했다. 그런 나와 장난을 하자는 건지 갑자기 울리는 문자벨에 놀라 후다닥 핸드폰을 집어들자
[JM - 오늘 첫 출근이라면서, 끝나고 연락해라]
다행스럽게도 뉴욕에 아는 몇 되지 않는 친구들 중 한 명한테서 온 연락이었다. 나의 부모님보다 내 취업을 더 축하해줬던 장본인. 물론 자신은 이미 더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이번에는 부모님께 명품백 하나 쥐어줘서 항상 내가 친구 겸 라이벌(jm은 나를 라이벌로도 생각하지 않다)로 생각하고 있지만.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답장을 보내려는데 문자 하나가 더 왔다.
[JM - 일어나고 보니깐 막 호텔방인 건 아니지?]
[ 나 - 그게 무슨 말이야]
[JM - 어제 만났던 남자랑 나갔잖아]
이건 또 무슨...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여졌다. 그럼 나, 어제 만났던 남자한테 내 집주소까지 아무렇지 않게 알려준 거야? 기함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물론 좁은 원룸에서 누군가 숨어 있을 공간따위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진짜 미쳤구나. 벽에 이마를 박은 채 막힌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젠장, 어제 그렇게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었는데... 취업에 성공했다는 이유 하나로 부어라 마셔라 취해라 이 세 가지 공식을 열심히 실천했던 내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 이러다가 무슨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지, 불안감이 몰려와 앞으로 JM네 집에서 자야겠다 싶은 생각을 하는데 빨리 준비하라고 독촉하는 듯한 알람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세수를 한 채 나와 얼른 준비를 했다. 첫 출근인데 이런 기분으로 가다가는 역사적으로 첫 출근에서 잘린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
Visual. 내가 다니게 될 회사이자, 뉴욕에서 가장 유명하고 거대한 잡지사였다. 회장이 동양인이라고 들었는데 수려한 외모와 모델을 뺨치는 기럭지 덕분에 잡지에서도 종종 얼굴을 비추곤 했다. 신문에서는 음란한 그의 생활을 까내리고 파파라치들은 그의 집 앞까지 찾아가서 기다리기에 바빴다. 물론 그들이 건진 것은 창문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내민 채 비웃는 V의 얼굴 뿐이지만. 한국 이름은 절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어쩌면 예명일 지도 모를 알파벳 하나를 쓰는 탓에 모두 V의 실제 이름을 알고 싶어하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의 애인들마저도 이름을 알지 못한다니, 애인을 예명이라 부른다고 하면 얼마나 기분이 이상할까 싶기도 했다.
솔직히 한국에서 공부를 잘한 것은 맞지만 뉴욕에서는 그것을 능력으로 잘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똘끼, 창의성, 그리고 능숙하고 세련된 언어 구사능력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대학에서 하도 무시를 당해 코피를 쏟아가며 미드를 보고 그것만 분석을 하며 나 홀로 스피킹 능력을 향상시킨 결과, 언어 구사능력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이 뉴욕에서 견딜 수 있는 똘끼나 창의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했으므로 을의 위치에서 갑의 명령을 따르고 조용히 약속이나 잡아주는 비서 자리가 조금은 탐이 났었을 지도 모른다. 돈을 버는 동안 그 창의성을 상향시키기 위해 공부를 할까 싶어서. 솔직히, Visual이라는 큰 회사의 비서 자리가 아무리 힘들고 머리가 다 빠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도 그 명성이 따르니 이미 나 같은 애들은 다 탈락시켰을 거라 생각을 해서 지원을 했던 건데 이렇게 덜컥 붙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정말 우리에게 구세주와 같은 연락이었어요"
"그럼. 저번에 일을 했던 톰도 동양에서 왔었거든요 말도 잘 듣고 착실해서 좋았는데 V가 하도 구박을 많이 해서 저기, 컴퓨터 키보드 하나 박살내고 그대로 나갔어요. 정말 착한 사람이었는데..."
눈에 파란색 아이 섀도우를 칠한 채 나의 손을 잡으며 거의 울먹이는 여자에 하하, 그저 헛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아니, 얼마나 힘들면 건장하고 착한 남자도 저 키보드를 하나 부시고 가? 그들의 말로 따르면 항상 패션을 지적하고 밤마다 그를 불러 강아지 산책을 시켰다고 한다. 한국보다 더 심한데? 얼마나 이 사장이 128차원인 지 알려주는 듯 해서 나도 곧 그 남자의 운명을 뒤따르겠구나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냥 몇 가지만 주의해주시면 돼요. 지각 절대로 금지, V가 무슨 말을 할 때면 무조건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꾸물거리지 않기, 모든 건 꼼꼼하게"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 자세 좋아요, 제발 이번에는 오래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 곧 V가 오니깐 옷매무새 잘 정돈하고 계세요. 워낙 까탈스러운 분이라 직원들 옷차림에도 신경을 쓰시거든요"
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회사의 배경이 영 적응이 되지 않아 고개만 끄덕거리는 나를 사장실 앞에 둔 채 제 명패가 놓여져있는 자리로 돌아가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금발에 늘씬하고 '나 뉴요커에 잡지사에서 다니는 유능한 비서입니다' 알려주는 것만 같은 비주얼에 옆에 있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취직을 하기 전 부모님께서 사주신 -브랜드가 있는- 정장을 입고 온 나에게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V가 8시 30분 즈음에 온다고 했지... 10분 정도 남자 직원들 모두 거울을 바라보며 립스틱을 바르고 넥타이를 정돈하는 등 바쁘게 자신을 꾸미고 있었다. 회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꾸미는 데에 혈안이 된 기괴한 모습에 이때부터 약간 무언가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0분이 이렇게 급박하게 지나갈 줄 상상도 못하고 있는데 곧 유리문이 덜컹- 소리와 함께 열렸다. 직원들이 낼 수 없는 그 웅장한 문을 여는 소리에 그가 왔구나 직감을 할 수 있었다. 후다닥, 책상 위에 놓인 너덜너덜한 공책과 펜을 들고 뛰어가는 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도 전 모습을 드러낸 V에 입을 저절로 열 수밖에 없었다.
![[방탄소년단/김태형] 김태형의 50가지 그림자 A | 인스티즈](http://file3.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8/05/07/0/ec1dafa276d7ed8f27ccc17d71c42b88.gif)
한 손에는 애인한테 받은 건지 꽃 한 송이를 든 채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저 문 하나를 열었을 뿐인데도 존재감 하나로 회사 내부에 있던 모두가 조용해졌다. 구찌 블라우스, 프라다 가방, 롤렉스 시계. 저 몸에 걸친 것이 아마 내 월급의 100배 정도 되겠지... 브랜드 옷들이 완전히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찰떡같이 입은 V의 기럭지에 감탄이 새어나왔다. 와, 장난 아니다...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이미 외모나 차림새로 놀란 뒤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였다. 뉴욕에서 제일 성공한 동양인 중 한 명이라고 했는데 이런 회사에 취직한 내가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고, 또 한편 이런 대단한 회사에 내가 어떻게 취업을 한 건지 의문까지 들기도 했다. 모두들 나와 같은 생각인 건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90도로 허리를 숙인 비서에게 대충 손짓을 한 채 뚜벅, 뚜벅. 내 월급의 5배 정도 되어 보이는 비싼 구두 소리를 내며 사장실 앞에서 머뭇거리는 내 쪽으로 걸어 오는 V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나를 한 번 흘깃, 바라본 V가 아무렇지 않게 제스처를 취하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도대체 회사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방금까지 받은 메일 보니깐 그런 잡지를 만들 바에야 어린이 잡지 하나 만드는 게 더 적성에 맞을 것 같더군. 월급을 받는 주제에 그런 생각밖에 못 하면 월급 봉투대신 해고 통지서를 받게 될 거라고 존에게 알려놔. 그리고 그 모델은 이런 고가의 옷과 안 어울려. 왜 그런 신입을 쓴 거지? 존이 스폰을 해주는 건 알았지만 그런 형편없는 여자애를 해주는 줄은 전혀 몰랐군. 사이즈도 안 맞을 뿐더러 피부색이 영 마음에 안 들어. 난 초콜리색과 같은 부드러운 색을 원하지 그렇게 투박하게 막 태우고 온 색을 원하지 않아"
"다시 전달하겠습니다"
"다시 이런 피곤한 일로 휘말리게 하지 말아줘. 아, 그리고 그 약속 하나 잡는 게 그렇게 힘들던가? 전화 한 통 넣고 시간 말해두면 되는 것을 왜 질질 끄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던데"
"죄송합니다, 사실 어제 연락이 닿아서,"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 9시 30분에 그 여자한테 파티 하나 잡았으니깐 애들을 적당히 데리고 가라고 해, 운전 기사한테는 8시 정도에 말을 해놓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지금 내 심부름을 하느라 조금 멀리 있으니깐. 피터 회장에게 미팅 언제 할 거냐고 문자도 넣어두고 꼭 앞에 정중하게 인삿말을 전하도록 해. 그 말 한 마디로 인해 거래가 성립되는 거 알고 있지."
"9시 30분, 8시... 알겠습니다"
솔직히 랩을 하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말솜씨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그걸 다 알아듣고 노트에 바쁘게 써내리는 여비서에게. 그렇게 빠르게 말을 하면서 정확한 발음 구사하던 그가 선글라스를 벗자 서늘한 삼백안이 나왔다. 이런 회사를 혼자 힘으로 세웠다기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였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되는 외모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데 그런 나를 한 번 발견한 그가 레나를 바라보며 외투를 벗어던졌다 - 그의 뒤에서 레나가 익숙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바닥에 조금이라도 닿으면 그 자리에서 불같이 화를 낸다고 했기 때문일까 - 서늘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오금이 저절로 저리는 것 같아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이 회사에서 나를 뽑은 것이 착오 아닐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서류가 섞여다던가, 그 날따라 회장이 술에 취했던가. 이렇게 다들 한껏 멋을 내고 오는 회사인 줄 알았으면 나도 화장 좀 진하게 하고 올걸. 취업 성공이라 축하한다며 JK가 쥐어준 구두도 이 공간에서는 싸구려로 취급 받을 것 같았다.
"아..."
그렇게 멍을 때리기도 잠시 어느새 내 앞에서 삐딱하게 선 채 묻는 그에 머뭇거리며 재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전혀 모르겠어서 입술을 웅얼거리고 있는데 뭔가를 줍는 척 나를 따라 허리를 숙인 레나가 이름을 말을 하라고 급하게 입모양으로 전해주는 것이 눈에 보였다. 지금 저 눈을 마주할 용기가 전혀 나지 않지만 주먹을 꽉 쥔 채 허리를 다시 세우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제나, 입니다"
모두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사실 영어 이름을 마땅히 지을 게 없어서 주변에 있던 사탕 가게에서 따온 것이기도 했다. 거창하게 영어 이름을 준비하기엔 그때 나는 영어 공부만 하기에 너무 바빴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V에 발가락이 저절로 꼬이는 기분이 들어 구두 안에 숨어있는 엄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동자의 깊이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이라 나도 모르게 마른침만 삼키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손을 내민 V였다.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한 채 큰 손을 내미는 그에 악수 신청을 하는 건가 싶어 어떨떨한 표정으로 나도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아, 근데 뭔가 익숙한데...
뭔가 처음 잡은 손이 아니라는 걸 몸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갸웃 거리며 애써 웃음으로 포장한 채 손을 흔드는데 그런 나와 V를 뒤에서 바라보던 두 명의 비서가 눈치를 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안 돼, 그럼 이 사람한테서 어떻게 빠져 나와...? 차마 그 외국배우 뺨치는 외모를 가까이서 바라볼 수가 없어서 V의 등 너머만 바라보는데 그런 나의 눈 앞에서 손가락을 튕기는 그였다. 마치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듯. 정신을 차린 채 다시 그와 눈을 마주하자 그제서야 다시 인자한 미소를 지은 V였다.
"V입니다"
"아... 네. 잘 부탁드려요."
어차피 이 부서에 조금만 일을 한 다음 경력을 조금 채운 다음에 이 회사의 마케팅 부서로 옮길 예정이었다. 지금 자리가 이 곳밖에 비지 않아서 울며 겨자먹기로 들어온 것이기도 했다. 워낙 사장이 까칠하고 옆에 있다가는 자신의 생활따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잡지에서조차 다룰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너무 오래 손을 잡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또 나를 빤히 바라보는 V에 입꼬리가 흔들렸다. 왜 자꾸 이렇게 물끄러미 보는 건데... 하하, 억지로 웃음을 지은 채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그런 나의 손을 억센 힘으로 잡은 V였다.
"그때 집에는 잘 들어갔으려나 모르겠네요"
"...?"
"저번에도 그렇고, 웃기는 사람이네"
"...!"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앞에서 미소를 지은 V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무슨 상황이지. 머릿속이 완전히 새하얗게 물들여지는 기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상처럼 굳은 채 서있기만 하자 그제서야 손을 놓은 그가 주머니에서 고가의 브랜드가 박혀있는 담배 케이스를 꺼내어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인 그가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아 자책을 하고 있는 나를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아, 그 기상천외한 물건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똑같았다. 담배 연기를 마시는 것마저도 하나의 화보처럼 느껴져 그저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자 그런 나와 눈을 마주한 V가 연기를 내뿜었다. 지독한 담배연기 사이에서 보이는 번득한 삼백안은 마치 제 암컷을 찾은 수컷과도 같았다. 아, 잠시만 이 사람 애인도 있, 있지 않았었나...? 눈물이 맺힐 정도로 매운 연기에 기침을 하면서 V를 바라보았다.
"제가 비서를 뽑을 때 2가지를 보거든요. 패션 감각과 낯이 익은 얼굴인지 아닌지"
젠장, 맞는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이 못 알아듣게 나의 귓가로 입술을 옮겨 한국말로 조곤조곤 말을 하는 그에게서 머스크 향이 났다.
"당신같은 경우는 후자에 가까워서 뽑은 것 같네요"
"설마..."
"머리 굴리는 소리 여기까지 들려요"
"..."
"제나라고 했나..."
잘 해봤으면 좋겠어요. 담배 연기를 한 번 더 내뿜은 다음 긴 손가락을 들어 셔츠를 억지로 올려 가린 자국이 숨겨져있는 나의 쇄골 쪽을 한 번 건드린 그에 하마터면 욕짓거리가 나올 뻔했다. 완전히 굳어버린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는 소리가 위에서 들렸다. 아... 탄식을 내뱉으며 후끈 올라오는 알 수 없는 열기에 입을 틀어막은 채 다시 구두소리를 내며 유유히 사장실로 들어가는 V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높은 하이힐로 발등을 살짝 찍어봤지만 눈물만 핑 돌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정리해보자면, 클럽에서 술을 부어라 마셨고 취했고 거기서 직장 상사도 아닌 회장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만나기만 한 게 아니다, 이 말인데...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난다고 하는 걸 보면 아마 내가 갔던 클럽마다 그가 있었던 건 아닌가 이런 소름이 돋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와 못지않게 사생활이 문란한 JM 또한 비밀리에 성사되는 파티를 많이 알고 있어 같이 다니곤 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아, 두야... 정말 이번에는 머리가 아파왔다.
"제나는 거창하게 할 업무같은 건 없고 그냥 V가 부르면 달려가면 돼요. 저희는 일을 하느라 바빠서요"
"...네?"
"원래 남자 프리랜서만 뽑았는데 이번에 특별히 여자분 뽑은 거니깐 영광이라고 생각하세요"
언제 저런 톱스타 못지않는 사람 옆에서 일을 해보겠어요. 내 어깨를 장난스럽게 치며 꺄르르 웃는 레나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깐 V가 사적인 일로 부를 때마다 다 내가 가야 한다는 말이지. 말이 좋아서 업무지 완전히 심부름꾼이 아닌가. 아, 아버지, 날 보고 있다면 정답을 알려줘...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모티브를 했습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남주 성격을 닮을 것이기 때문에 제목으로 썼구요... ㅎㅎ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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