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용기를 내서 말을 걸겠노라고 다짐을 했건만 여적 실행에 옮기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날이 또 지나 모의고사도 치르고 1차고사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4월의 후반부가 되었다. 남녀공학인 중학교 때와는 다르게 1차고사가 다가오는 남고의 칠판에는 4교시의 수학 선생님이 풀어놓은 공식들 외에는 아무것도 적힌 것이 없었다. 중학교 때는 여자애들이 D-10 이런것도 적어놓고 그랬는데. “…….” 얼마 남지 않은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농구하자고 보채는 지민을 떼어놓고 정국은 태형을 보러 교실로 들어섰다. 하지만 의외로 목석처럼 앉아 공부하는 몇몇 애들말고 태형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기에, 오늘은 말 걸 수 있을까 부풀어올랐던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덮여 가라앉는 기분을 내색치 않을 수 없었다. 애써 농구도 안 하고 그냥 올라왔더니…. 평소엔 접착제라도 붙은 것 마냥 자리를 지키더니 어딜 갔지. 한숨을 푹 쉬며 사물함에서 칫솔을 꺼내 치약을 주욱 짜놓고 입에 넣으려다 멈칫. 물 묻히고 닦을까. 아무래도 바꾼지 얼마 되지 않은 칫솔이기에 물을 묻혀야 치약 거품이 더 잘 나고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결국 칫솔을 든 채로 뒷문 손잡이를 잡아돌렸다. “…헐, 미안.” “아…괜찮아.” 조끼에 질퍽하게 묻어있는 하늘색의 치약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문 앞에서 만난 건 좋은데 왜 상황이 이러냐고. 저번 필통 이후로 처음 하는 대화는 이번에도 제 잘못에, 제 사과로 시작했다. 그냥 존나 미안하고 빡친다. 오늘도 그저 괜찮다며 배시시 웃고 있는 태형의 손목을 잡고 화장실로 직행한 정국은 대뜸 그의 조끼를 벗겨냈다. 정국의 손길에 따라 순순히 팔을 빼내어 조끼를 벗어주면서도 잔뜩 당황한 표정의 태형에게 제 칫솔을 건네주며 정국은 세면대 물을 틀어냈다. “내가 빨아줄게.” “아니, 내가 해도 돼….” 당황하여 빠르게 제게 다가서는 태형에게 물 묻은 손 대신 턱짓으로 괜찮다며 움직임을 막아낸 정국이 보글보글 조끼에서 나오는 치약의 거품을 없애려 부던히도 애를 썼다. 아, 새 칫솔이고 뭐고 그냥 닦을 걸. 그렇게 축축하게 젖은 데다가 물기를 짜낸 덕에 정국의 손길대로 쭈글하게 주름진 조끼를 받아들고 태형은 또 그저 웃어보였다. “고마워.” 내가 잘못한 건데 왜 네가 고마워. 뭐만 하면 다 괜찮아, 고마워 그리고 웃음. 딱히 잘못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정국은 뭔가 그 모습이 마냥 맘에 들진 않았다. 뭐지. 왜 맘에 안 들지. 미쳤나.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는 정국의 손은 전에 봤던 것처럼 하얗고 예뻐서, 그에게 칫솔을 돌려주며 태형은 다시 제 손가락을 손바닥 뒤로 숨겼다. 정국이 가면 빡빡 손이나 씻을까.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다시 반까지 가기 귀찮다는 판단에 얼마 남지 않은 치약으로 이를 닦기 시작하는 정국 때문에 태형은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결국 주춤주춤 화장실을 나섰다. 그렇게 혼자 화장실에 남은 정국은 빼꼼 고개를 내밀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머리를 쥐어뜯고 발을 구르며 소리없이 악을 질러댔다. 존나 한심해, 전정국!! 태형이 화장실을 나가기 전 꼭 말을 걸겠다 다짐했는데 또 헛소리가 되고 말았다. 사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말은 많았다. 나 너랑 친해지고 싶어. 내가 자꾸 실수만 하네, 미안해. 나 네 핸드폰 번호 알려주라. 밥 먹었어? 어디 갔다 와? 너 내 이름 알아? 등등. 하지만 오글거리고 입이 안 떨어져서 실패. 두고 보자. 기필코 꼭…! 한 편, 혼자 교실로 돌아온 태형도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정국은 다른 남학생들과 다르게 배려심이 깊었다. 지금처럼 제 조끼를 손수 빨아준다는 것은 괜찮다 한 마디로 웃어주면 미안하다 말하며 그냥 지나치는 게 대부분인데. 학교에선 다른 친구들과 같이 말끔하게 멀쩡한 모습을 하려 부던히 애쓰는 자신과 달리 정국은 그냥 그 자체가 말끔하고 멀쩡했다. 정갈한 머리카락은 좋은 샴푸향이 배어있었고 교복 와이셔츠도 구김살 없이 하얗고 반듯한 모양새였다. 늘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환하게 웃는 정국이 부러웠다. 어쩌다 뒤를 돌아본 정국과 제 눈이 마주치면 씨익 자연스레 웃어주는 것에 괜한 기대감을 품고 말이라도 걸어볼까 몇 번이나 그의 등을 두드리려 손을 뻗었다가 그만두곤 했다. “더러워.” 혼잣말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익숙한 말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진 지겹게도 들었던 말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그런 말을 대놓고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 참 좋았다. 뒤에서 말하는 건 안 들리니까 상관없었다. 정말 내 손이지만 어떻게 이리 더럽냐. 흉터와 반창고 보다도 아무리 손을 씻어도 다시 검게 물들 제 손톱이 더럽고 불쌍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저번에 떨어진 필통에서 굴러나온 필기구들을 주워주고 잠시 제 손에 머물렀던 정국의 시선을. 바로 시선을 떼며 방긋 웃어주는 모습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긴 했지만 배려심이 깊다고 감동받았었는데 시곗바늘이 째깍째깍 움직일 수록 머리는 또 제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야, 너 쟤 손 봤냐? 씻지도 않나봐. 더러워. 집 존나 가난한가봐. 불쌍해. 멍하게 손을 내려다보다가 버릇처럼 주먹을 꼭 쥐었다. 정국에게 말을 걸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다. 손만큼이나 더러운 나 자신이 말을 걸어도 될까 하는 소심함 때문이었다. 정국이도 나 안 들리게 뒤에서 친구들이랑…. “창가에 널어놓지.” “그냥….” 손등으로 입가의 물을 닦으며 의자에 널린 조끼를 가리키는 정국에게 어물쩡 대답한 태형이 대답만큼 어색하게 웃었다. 방금 꽤 자연스레 말 잘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별로였나?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하는 저를 보며 당황한 기색이 조금 내비치는 정국에게 좀 미안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정국이 좋았지만, 정국의 속을 다 알지는 못 했고 아직은 혼자가 편했다. 지금은 무서워서 안될 것 같았다. 또 말을 걸 태세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국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태형은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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