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했으면 자
너에게서 연락 한 번 없던 오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며칠 째 너는 내 전화도 잘 받지 않고 문자에도 단답형으로 대답한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 되서 물어봐도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고. 아무래도 내일은 시간을 내서 너와 만나야겠다고 생각한다.
골목 어귀를 돌아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너의 지정 벨소리. 거리에 울려 퍼지는 단내 가득한 러브송이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어, 성열아."
"...김명수."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너는 어두운 목소리다. 조금 많이 취한 말투로 나를 부른다.
"술 마셨어?"
"김명수. 명수야아."
"어, 그래. 성열어. 나야."
"하....우리 명수."
"이성열. 너 어디야? 술 많이 마셨어?"
"...."
"주변 사람 좀 바꿔줄래? 아니면 너 어디 있는지 말 좀 해봐. 내가 그리로 갈게."
늘어진 목소리로 나를 불러대던 성열이가 갑자기 똑바른 소리를 냈다. 술이 깼나 싶어서 괜찮냐고 물어 보니까 엉뚱한 말을 한다.
"명수야. 우리... 이제 끝났다."
"...어?"
"그만 만나. 끝내자, 우리."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야. 왜 끝내자는 말을 해.
"...무슨 소리야. 취했어?"
"아니. 정신 멀쩡해. 나 너한테 헛소리 하는 거 아니야. 진심이야. 헤어지자."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너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해보려 했다. 그러나 정리되지 않았다. 정리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갑작스런 이별 통보에 차분히 생각이나 정리할 여유란 게 없는 놈이었다, 난.
"너...지금, 니가 무슨 말 했는지 알아?"
"어. 알아. 헤어지자고 그랬어."
너무 담담한 목소리라서 내가 다 목이 메었다.
"나 그냥 잊어. 넌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내가 널 어떻게 잊을 수 있다고 널 잊으래. 너 말고 더 좋은 사람이 어딨다고 딴 사람 찾으래.
"이만 끊을게."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아니."
"그럼 왜 그래. 나 요즘 너한테 잘하잖아. 약속 시간도 잘 지키고, 담배 줄이고, 술도 끊었어. 너한테 그동안 잘못한 거 많은 거 알어. 그래서 더 잘하려 그랬고!!"
나도 모르고 욱, 화가 치밀어 소리를 질러버렸다. 움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왜 안 마시던 술을 마시고 그래. 나 집에 다 왔다. 피곤해서 먼저 잘게. 너도 잘 자. 내일 전화해."
전화를 끊고서도 계속 심장이 두근거렸다. 너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올까봐. 또 이별을 말할까봐.
머리를 비우고 잠들려 노력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설핏 잠이 들 때마다 네가 나타나서 헤어지자고 말했다. 싫다고 말하면 네 손을 붙든 내 손을 네가 억지로 떼어내면서 필사적으로 이별하려고 했다. 너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꿈에서조차 너와 나는 헤어지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잠들 수 없었고 결국 밤을 지새웠다.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가 일어나 앉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네가 일어났을 법한 시간이다.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다 갈라지고 탁한 목소리로 네가 전화를 받았다.
"나야. 속은 좀 어때."
"...괜찮아."
머린? 정신이 좀 들어?"
"....어."
"어제..나한테 전화 한 거 기억나?"
"....."
"괜찮아. 취하면 그럴 수도 있어. 근데 또 그러진 마."
견디기 힘들어지니까. 뒷말은 애써 삼켰다. 헤어지자 말하는 것도 힘들었을 취한 너를 배려한 거였다.
"해장은 했어?"
"...아니."
"같이 밥 먹을래? 나도 좀 시원한 게 먹고 싶다."
"됐어."
그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지마. 귀찮다는 듯이 대충, 그렇게 대답하지 좀 마. 답답해서 속이 끓는데 내가 얼마 전에 너에게 했던 모진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있잖아. 며칠 전에 우리 싸운 거. 내가 꺼지라 그러고 욕한 거... 미안해."
"....."
"너 걱정할 까봐 그랬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내 말 신경 쓰지 마. 알잖아 나 원래 말 막 하는 거. 미안해. 고칠게."
대답 좀 해. 성열아. 평소처럼 그냥 장난치듯이... 그렇게 풀자, 우리.
기죽지마. 내가 너 잘 아는데.. 원래 이런 걸로 풀 죽어 있을 사람 아니잖아, 너.
왜 이래 바보같이. 자꾸. 진짜 헤어지려는 것처럼.
"...끊을게. 그리고, 어제 한 말. 허튼 소리 아니야. 진짜야."
"잠깐만!! 잠시만.. 기다려줘, 잠깐. 그러니까, 내가 다 잘못했어. 거칠게 군 거, 무심한 거 다. 나 정말 너랑 이별 생각해 본 적 없어, 진짜야. 그러니까 성열아..."
"...."
"...그래. 일단 더 자고.. 내가 이따 다시 걸게. 잘 자. 사랑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이대로 더 통화를 했다간 정말로 이별할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별을 생각해왔던 건지 성열이의 목소리에서 망설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방을 이리 저리 맴돌다가 벽에 걸린 달력에 눈이 갔다. 오늘이 우리의..천 일.
성열이가 날짜를 하나하나 세어가며 직접 달력에 써주던 모습이 생각난다. 내가 그런 걸 뭐하려고 쓰냐며 퉁박을 주자 그 커다란 눈을 예쁘게도 접으면서 웃었다.
일 때문에 바빠서 아무 것도 준비 못한 우리의 500일.
내가 또 무심하게 넘겨버린 600일.
너와 하루 종일 만나지 못했던 700일.
너와 기어코 싸워버렸던 800일.
아예 모르고 넘겨버렸던 너와의 900일.
이렇게도 무심하고 못된 나에게 너는 하루하루 지쳐만 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넌 늘 이해한다고 웃어주었고, 안아 주었고, 키스해주었다. 너의 이 은혜로운 사랑을 나는 너무 당연하게 받기만 했다. 네가 화가 난 것도 당연하고 홧김에 이별을 말한 것도 당연하다. 내가 너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않는 이상, 너는 내게 돌아오려 하지 않겠지.
핸드폰이 울린다. 익숙한 벨소리.
이번에는 너에게 정말로 용서를 구해야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해야지.
"여..."
"넌 항상 그런 식이야. 니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다야?"
"...성열아."
"내가 너 때문에 아프다고, 힘들다고 수백, 수천 번을 말했어도 듣질 않더니, 뭐? 미안해? 고칠게? 사랑해?
이게 사랑이야? 이게 니 사랑이야? 그런 거면 안 받아. 니 사랑 안 받아!!"
"성열아 진정해. 너 지금 이러는 거, 실수야. 제발 화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내가 무슨 말 하는 지 좀 들어 달라구, 니 멋대로 판단하지 말고!! 실수 아니야. 너랑 이별하는 거, 너한테 아프다고 말했던 만큼, 힘들다고 소리 질렀던 만큼 많이 생각했어. 늘 니 맘대로 하려는 너한테 맞춰주면서, 그러고도 돌아오는 게 고작 꺼지라는 말이었는데도 널 사랑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어."
"무슨 말 하는 거야, 너. 정신 차려!"
"이제 더는 버틸 수가 없다. 니 변명 듣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니 무관심도 신물이 나."
"이성열. 똑똑히 들어. 난 너랑 이별 생각한 적 없어."
"너야 말로 내 말 들어. 난 이제 너 사랑 안 해. 끝났어. 사랑도, 정도, 인내도. 다 사라졌다고."
"야, 이성열. 만나. 만나서 얘기해."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내 맘 안 변해."
"성열아.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봐. 오늘 우리 천 일,"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야."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