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때 잘 하지 그랬어? (2)
Written by 옥금
손을 들어 짧게 두 번, 엑소라고 쓰여있는 대기실의 문을 노크했다.
잠깐의 텀을 두고,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에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기분이 생각보다 묘했다.
내가 생각치도 않았던 이 상황이 가까이에 다가왔다는게, 묘했다.
들어오는 나를 보고 일어서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대는 엑소를 향해 나 역시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어, 그런데 저희 대기실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리더가, 이름이 수호였었나. 아무튼 그 사람이 묻길래 '아, 잠깐 제가 뭐 드릴 게 있는 분이 있어서...' 하고 말 끝을 흐리자, 놀란 눈으로 멤버들을 돌아본다. 마치 너희 중에 저 선배와 친한 사람이 있었냐는 듯이.
엑소의 근처로 가면서 양해를 구했다. 어, 잠시만요.
멀대같이 우르르 서 있는 그들을 헤치고 앉아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그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에 메이크업을 하던 코디가 자리를 비키고, 그제서야 그가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
그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확인함과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비밀스럽게 멤버들도 모르게 연애를 하던 두 그룹의 남녀. 그 중 여자가 대외적으로는 전혀 친분이 없다고 알려진 남자의 대기실에 찾아갔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여자는 왜 남자의 대기실까지 찾아갔을까?
변백현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앉아 있었고, 나는 서 있었다.
그런 그에게 빙그레 웃어보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다름이 아니라 백현씨가 떨어뜨린 물건을 하나 주웠거든요. 별로 소중한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주인을 알고있는 이상 돌려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이렇게 실례지만 드리러 왔어요. 다른 사람들 보는데에서 드리는건 서로 좀 그렇잖아요."
나의 말에 그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제가 뭘 잘 흘리고 다니는 성격이라.... 하하..."
안심하는 웃음을 짓는 변백현에게 나 역시도 마주 웃어주었다.
"그러게요, 제가 알고보니까 백현씨가 이것저것 잘 흘리시고 다니더라구요. 예를 들면, 웃음 같은거?"
내 말에 순식간에 화기애애하게 흘러가던 대기실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멤버들은 당황한 표정이었고, 변백현 역시도 방금 자신이 들은 소리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나 혼자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 하하하.... 선배님은 농담도 참 잘하시네요! 하하....."
"농담이요? 전 농담 잘 못해요~ 원래 거짓말을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하하."
어떻게든 덮으려던 찬열이었나? 하여튼 그 애의 말을 내가 부정하자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아, 내 정신 좀 봐. 백현씨, 손 좀 주세요. 떨어뜨리신 거 돌려드려야죠."
내 말에 변백현이 머뭇거리더니 슬쩍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변백현에게 웃어주며 주머니를 뒤졌다.
잡히는 물건을 그대로 변백현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웃으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변백현의 표정이 굳었다.
변백현의 손바닥 위에는 반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누가 봐도 커플링 같아 보이는.
"............"
"저희 숙소, 그러니까 제대로 말하면 저희 그룹 막내 방에서 제가 발견했지 뭐에요.
막내한테 물어봤더니 두 사람 사실 그런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면서요? 막내 대신에 제가 왔어요. 저희 막내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 겸...."
내가 숙소, 막내 방 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변백현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반지를 꽉 쥔 손 끝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나머지 멤버들도 그 소리에 웅성웅성 자기들끼리 이야기했다. 대충 이게 무슨 소리냐부터 언제부터냐 정도까지?
아직 이야기 안 끝났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아, 맞다. 이거 말고도 하나 더 있는데, 제가 가장 중요한 걸 까먹을 뻔 했네요!"
내 말에 떠들던 엑소 멤버들이 이쪽을 향해 다시 주의를 기울이고, 변백현의 시선 역시도 내게로 올라왔다.
흔들리는 그 눈빛에, 나는 여전히 웃어주며 변백현의 손을 잡았다. 반지를 쥐고 있는 손을.
하나 하나, 접혀있는 손가락을 펴고는 내 오른손을 펴들었다.
저절로 모두의 시선이 내 손에 모여지고, 천천히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내었다.
변백현의 눈빛이 겉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나는 빼낸 반지를 변백현이 쥐고 있던 반지의 옆에 내려놓았다.
두 반지는,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반지의 모습이 같다는 걸 깨달은 엑소 멤버들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와 변백현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김여주....."
"헤어지자. 그동안 나 속이면서 만나느라 너무너무 고생많았어.
너는 3년 넘게 만난 나한테 끝까지 참 별 짓을 다 하게한다. 그렇지, 백현아?"
설마 하던 사실이 내 입 밖으로 나타나자 다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변백현은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표정 지으면 안되지, 네가. 누가 보면 내가 바람 난 줄 알겠어-
너는 절대 모를거야, 백현아. 내가 그 반지를 막내 방에서 발견했을 때의 그 심정을."
내 말에 변백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잠시만, 여주야. 자기야, 나랑 얘기 좀 하자. 제발, 응?"
고개를 저었다.
이미 우린 끝났어.
"우리 사이에 더 이상 할 얘기도, 하고 싶은 얘기도 없어. 난 지금 네 얼굴 보는 것도 고역이야.
쿨하게 끝내, 변백현. 지난 3년동안 우리가 남 처럼 지낸 것 처럼 앞으로는 정말 남으로 지내면 되는거야.
나 더 이상 너희 멤버들 앞에서 추태부리기 싫어. 얘기는 끝났어."
여주야, 제발.... 한번만 얘기 좀 해. 변백현이 손목을 붙잡는 순간, 거세게 그 손을 뿌리쳤다.
변백현이 손을 잡은 그 부위가 더러워지는 느낌이었다.
"....내 몸에 손 대지마, 더러운 자식아. 넌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개새끼야.
너 같은걸 만난다고 낭비한 지난 3년을 돌려받고 싶은 심정이니까, 가까이 오지마."
충격받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서 날 바라보고 있는 변백현을 뒤로 하고 나머지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후련하기도 했고, 미묘한 감정이었다.
이제 더 이상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건, 후련했지만 아팠다.
".....미친놈,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좋겠다, 낯짝 두꺼워서."
"...너 같은 새끼를 좋다고 만난 김여주만 병신된거네. 축하한다, 헤어진 거."
멤버들의 질타를 받아내며 묵묵히 앉아만 있던 백현이 경수의 말에 반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수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여주의 이름에 반응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은 듯 싶었다.
백현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여주의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하자, 경수가 비웃었다.
"새끼, 반응 한 번 참 빠르네.왜, 내가 김여주 이름을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서 놀랐냐?
그런데 어쩌지, 네가 모르는게 하나 더 있는데."
"......너 뭐야."
백현의 말에 경수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로 자신의 상태를 체크하던 경수가 뒤를 돌아 대기실을 나가려하자 준면이 불러세웠다.
"경수야, 어디가게?"
준면의 부름에 경수가 나가다 말고 뒤를 돌았다. 멤버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백현도 있었다.
경수가 웃었다. 백현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경수가 대답했다.
"이상형 틈새시장 공략하러요. 3년만에 온 기회라 놓칠수는 없어서."
경수가 웃으며 대기실을 나섰다. 다들 벙쪄있다가 백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백현은 말 없이 두 손을 모은데다 고개를 숙였다.
".............."
백현의 두 손에 쥐어진 반지 두 개가 손가락 사이로 비춰졌다. 한 순간의 유희에 휩쓸린 본인을 자책했다, 백현은.
익숙함에 빠져 소중함을 잊지 말자는 약속을 어긴 백현은 한순간에 그녀를 잃고야 말았다.
회색빛인 제 세상에서 유일하게 색을 가지고 밝게 빛나던 그녀를.
감긴 백현의 두 눈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간절하게 빌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제 손을 잡아주길.
못났지만, 못난 제 손을 잡아주며 한번만 더 예전처럼 웃어주길.
미련한 착각이었지만, 백현은 바라고 또 바랬다.
백현은, 그녀를 다시 찾을 수 없을 거란 현실을 부정하며 바라고 또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