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
너를 놓지 못했던 그 많은 날들을 뒤로하고, 어느새 가벼워진 마음으로 너를 보낸다.
비로소 너는 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간다. 운명이란 말로 질기게도 잡아놨던 고통스런 시간을 너도, 나도 놓는다.
너는 이렇게 나를 울리고, 나는 죽어서도 너를 잊지 못할 것이다.
리타르단도(Ritardando)
w. 손끝
"찬열이 산소호흡기……."
"……."
"……빼주세요."
찬열아, 우리 충분히 고통스러웠지?
넌 진작 갔어야 하는 운명인데도 내 욕심 때문에 널 더 아프게 한 것 같아 죄스럽다.
너의 흔적들 천천히 지워가면서, 너를 천천히 추억하면서 네 소원대로 느릿하게 따라갈게.
-백현아.
-응?
-이건 무슨 표시야?
-이건, 리타르단도.
-리타르단도……. 뜻은 뭐야?
점점 느리게. 내 말이 끝나자마자 깊은 생각에 잠긴 너를 바라보며 난 악보의 모양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곧 눈을 반짝인 네가 항상 무언갈 끄적이던 너의 작은 수첩에 여느 날과 같이 정성스레 글자를 적는다.
무얼 적느냐며 호기심에 몇 번이고 달려들던 나도 슬슬 제 풀에 지쳐 하염없이 너와 너의 수첩을 바라본다.
이내 뿌듯한 표정으로 수첩의 표지를 덮은 너는 살며시 나의 목을 그러안는다.
-점점 느리게…….
-그 말이 그렇게 맘에 들어?
-응, 난 뭐든 느린 게 좋아.
난 느린 건 질색이야. 그러곤 혀를 끌끌차며 다시 피아노의 딱딱하면서 가지런한 건반을 꾹 눌렀다.
너는 따뜻한 입김을 내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내 귓가에 닿는 너의 숨소리는, 사실 피아노의 깊은 소리보다 몇 배는 좋았었다.
"오전 6시 27분 48초입니다."
너로 가득찼던 내 눈 앞에는 흐릿해진 흰 천의 구김만이 어지러이 보였다.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지는 동안에도 너의 손때묻은 수첩은 품 안에 꼭 껴안은 채다.
차갑게 식어가는 너에 비해 내 몸속의 사랑은 타들어갈 듯 뜨겁기만 하다. 가슴이 너무 뜨겁고 아파서, 숨이 안쉬어진다.
너에게 고통의 시간만 남긴 채, 결국 이렇게 끝날 삶이었다. 좀 더 빨리 보내줄걸, 이제 와서 나는 쓸모없는 후회만 한다.
"가족 여행 갔다오면 같이 여행 가자며……."
-그냥 부모님 모시고 유럽 구경하고 올거야.
-오래 있다 올 거야?
-한…… 한 달 걸릴 것 같아. 기다릴 수 있지?
-당연하지, 갔다 오면 우리도 여행 가자.
-찬열아, 나 가있는 동안 뭐할거야? 바람 피진 않겠지?
-절대! 내가 예쁜 너 두고 바람을 왜 펴. 난 아마 바쁠 것 같은데.
-왜? 연락은 할 수 있지, 우리?
-글쎄…… 너랑 여행 가려면 돈 열심히 모아야 하잖아. 너 입맛 고급이어서 비싼 것만 먹여야지.
-그래도 하루에 한 번씩, 꼭 전화하자.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너의 눈에 서려 있던 미안함과 고통을.
결국 여행 한 달동안 난 너와 연락이 닿질 않았고, 내가 한국에 오자마자 들은 건 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소식이었다.
[백현이가 고백을 받아줬다. 말도 안돼! 이제 이 수첩은 그 애 얘기로 가득찰 것 같다~]
수첩의 첫 장은 내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왜인지 원래 있던 앞 장들은 지저분하게 뜯긴 채였다.
내가 고백을 받아줬던 2년 전 겨울 때부터 썼었는지 수첩 모퉁이엔 작은 눈사람과 큰 눈사람이 나란히 서있었다.
수첩에는 그 동안 나와 만났던 수 많은 날들을 자잘하게 그려놓은 너의 섬세함이 넘쳤다.
[백현이랑 너무 심하게 싸웠다. 어떻게 풀어주지? 미치겠다. 요즘 몸이 이상하게 안좋아서 백현이한테 신경질을 부렸다. T.T]
[뭐지? 뭘까……. 몸에 이상한 게 있는 것 같다. 나 어떻게 되는 거지? 음……. 백현이한테 말해도 될까?]
[빌고 빌어서 겨우 화해했다. 신난다! 다시는 백현이랑 싸우지 말아야지.]
나는 손으로 너의 글자들을 쓸면서 미소지었다. 하지만 곧 너의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준 단어가 눈에 띄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크게 맺혀서 너의 작은 흔적들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너는, 얼마나 고통스러웠니. 꾹꾹 눌러 쓴 흔적이 남은 글자는 내 마음에 꾹꾹 박혔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찬열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사실상 환자 상태가…….
-제발…… 살려주세요……. 저도, 찬열이도 살려주세요…….
-저희가 노력을 기울여서 최대한,
-……많이 아파요, 찬열이?
-…….
-손도 못 쓸 정도예요?
-……죄송합니다.
눈 감고 천사처럼 잠든 너의 평온한 모습에 다시 눈물부터 났다. 사실 너는 생사의 경계에서 그만 날 놓아달라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을텐데.
그냥 내가, 욕심 많은 변백현이 끝까지 널 놓치기 싫어서 너의 고통을 외면했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도 안된다. 왜 하필이면 찬열일까. 너처럼 착하고 좋은 사람은 또 없는데. 정말 하늘에 천사가 모자라서 그래서 널 데려가는 건가, 찬열아?
의미없는 생각을 하면서 너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앙상하게 마른 손은 미동도 없었다. 네 탓도 아닌데 네가 너무 원망스러워 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누가 내 심장을 꾹 쥐고는 놔주지 않는 것처럼 버거운 숨을 쉬며 너를 바라보면, 또 계속 눈물이 흐를 뿐이다.
-사랑해…….
한적한 바닷가의 바람부는 언덕, 찬열이 네가 살아생전 그렇게 좋아했던 장소다.
언젠가 우리가 왔을 때 앉아있었던 곳에 다시 너를 앉히고, 옆에 나도 함께 앉았다.
너는 짙은 초록의 이불을 덮은 채 자연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그런 너의 작은 집을 쓰다듬으며 멍하니 바다를 쳐다보았다.
[그 바다에 묻히고 싶다. 스며들고 싶어.]
너의 수첩 속에 적혀있던 소망은 내가 이렇게 이루어 주었어. 그러니 이젠 깊은 잠을 자면서 이 곳에서의 일은 하나씩 정리해 나가자.
수첩은 마지막 한 장만을 남기고 다 읽어내려갔다. 네가 쓴 우리의 추억은 다시금 나를 눈물 짓게도, 웃음 짓게도 했다.
하지만 도저히 너의 마지막 흔적은 차마 볼 용기가 나질 않아서, 지금까지 읽지도 않았어.
뭐가 써져있을까, 궁금한데도 다 읽어버리면 너가 아주 가버릴까봐 무서워서 손도 못댔어.
나는 가볍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수첩의 마지막 장을 쓸었다. 곧 네가 나에게 절대 알려주지 않았던 끝이 보였다.
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소리내어 울었다. 끝까지 나를 위해주었던 너의 따뜻한 사랑이 뒤늦게서야 와 닿기 시작했다.
[리타르단도, 점점 느리게. 예쁘게 피아노 치는 백현아. 내가 빠르게 떠나도 너는 느리게 쫓아와라.
우리의 사랑이 빨랐던 만큼 빠르게 쌓인 추억들, 너는 조금씩 속도를 늦추면서 정리해줘.
가고싶지 않아도 갈 사람은 가야하니 이렇게 먼저 떠납니다, 백현아. 제발 너는 천천히 걸어와.
이게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고, 마지막으로 주는 애정이야.]
"잘 가."
너를 놓지 못했던 그 많은 날들을 뒤로하고, 어느새 가벼워진 마음으로 너를 보낸다.
비로소 너는 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간다. 운명이란 말로 질기게도 잡아놨던 고통스런 시간을 너도, 나도 놓는다.
너는 이렇게 나를 울리고, 나는 죽어서도 너를 잊지 못할 것이다.
完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조카 봐줬는데 새언니가 화났어요.. 이유가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