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석]하지 못할 부탁 1
나를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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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풀리지 않은 날씨가 으슬하다 생각했다.햇빛은 봄이 완연한데 바람은 날이 섰다.바람에 몸을 배였으면 했다.갈기갈기 찢겨 내 속에 있는 더럽고 추악한 무언가도 베어버리고 싶었다.빈 껍데기만 남은 나를 어서 처치하고 싶었다.그런 되지도 않을 생각을 하다가 집을 나섰다.시골이라 그런지 확실히 식물이 많다.하다못해 대문을 열고 길거리로 나와도 이름모를 꽃들이 대게 있었다.작은 꽃을 바라봤다.나는 이런 작은 꽃보다도 못한 존재이다.하루일과가 시작됨과 동시에 시작되는 자기 비하와 폄하.이렇게라도 나 자신을 힘들게 해야 속이 편했다.
못난 날씨가 기승이였다.쉬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탓에 애써 정리하고 나온 머리를 다시끔 손으로 쓸어내리면 더욱 장난이라도 치듯 심한 바람이 몰아쳤다.입고 있던 아우터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정류장으로 향했다.어젯밤 통화 끝에 잡은 약속과는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이렇게 굽이굽이 산골자기 안인 이곳에서는 되도록 빨리 출발하는 것이 나을 듯 했다.서울에 있을 때나 의자에 앉아 편히 버스를 기다렸지,이곳은 그저 버스정류장이라고 덜렁 서있는 푯말을 뻬곤 아무것도 없는 빈 도로였다.이럴 땐 시골에 들어온 것이 조금 후회되긴 한다.
이어폰을 핸드폰에 꽂고 몇곡 안되는 곡을 재생시켰다.시내로 나가려면 1시간 가량 걸릴텐데 그나마 심심함을 달래줄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래봤자 3곡뿐인 곡이 계속 돌아가며 반복되겠지만.몸 속 깊은 곳에 위치한 한숨을 꺼냈다.햇볕이 잘드는 정류장이 미웠다.손을 머리 위로 들어 얼굴로 내리쬐는 햇빛을 가렸다.내가 서있는 곳 반대편은 소나무가 심어진 숲이였다.울창하고도 어두웠다.저 속으로 빨려들어가기라도 하는 듯 노려보았다.제법 눈이 아파질 즈음 전형적인 시골버스가 덜컹거리며 다가왔다.
몇 번 타본 버스였기에 안면이 있는 버스기사와 눈인사를 나누곤 창가자리로 가 앉았다.10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여서 그런지 사람은 적었다.1시간이다.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애매모호한 시간.시내로 나가는 건 저번주에 한번 크게 장을 봐온 후로 처음이였다.시내라지만 시골이였다.사람도 10명이 채 안 사는 이곳에 비하면 시내라는 것이다.창밖으로 경치를 감상했다.서울이였다면 감히 보지도 못했을 것들이였다.속도를 좀체 내지 않는 버스덕에 느리게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봤다.꽤나 길었던 겨울탓인지 아직 얼어붙은 땅이지만 이제 곧 꽃이 피고,곤충이 날아들고,따듯해지겠지.이미 마음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못 보고 가는 것은 좀 아쉬웠다.
시골 버스가 한참을 달려 시내에 도착했다.버스기사에게 안전운행하시라며 흔하고 형식적인 인사를 건내며 내렸다.몇 번 와본 시내였지만 마트를 가본 이외에는 어느 곳도 가본적이 없었기에 그저 막막했다.더군다나 나는 길치였다.좀..심한 길치였다.약속시간은 지나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는데도 같은 길을 여러번 뱅뱅돌며 좀체 길을 찾지 못했다.생소한 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걷다 겨우 찾은 장소를 보곤 간판을 본답시고 높이 빼고 걸었던 목을 여러번 주물렀다.막상 오니 한숨부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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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 위치한 곳이여서 좀 경사가 높은 계단을 아슬아슬 걸어 올라왔다.작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침 점심식사 중이였던지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편안한 차림새로 티비를 보며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언제했는지도 모르는 때지난 예능프로를 보며 피식피식 웃는 남자를 내려다 봤다.나도 그 뒤에 서서 한참을 조용히 보다가 말라버린 목에서 잔기침을 냈다.내 기침 소리에 놀란 건지 먹던 짜장면 그릇을 내려놓고 입에 묻은 소스를 옷소매로 쓱쓱 닦더니 죄송하다 사과를 했다.생김새도,하는 행동도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그리 믿기지 않았다.
남자가 낡은 쇼파에 앉으라며 자리를 내줬다.낮은 쇼파에 앉아 눈을 이리저리 돌려 내부를 보았다.참 볼품없다 생각했다.남자는 옷을 갈아입고 온건지 한결 말쑥해진 옷차림새로 내 앞에 앉아 종이컵에 담긴 차를 내밀었다.둥글레차의 구수한 냄새가 올라왔다.아직도 작게 소리를 내며 깜박거리는 티비가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리 상관을 없었다.남자는 차를 한모금 마시는 나를 따라서 종이컵을 입에 가져다 댔다.
"약속시간 지나도 안 오시길래,그냥 마음 접으신 줄 알았어요."
"아..길을 못 찾아서"
"아..하긴 길이 좀 복잡하긴 하죠..어제 전화하신 분 맞죠?그 청부살인"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남자의 생김새를 살폈다.아무리 봐도 이런 일이랑은 안 어울리는 페이스라 생각했다.남자는 자리에서 잠깐 일어나 책상에서 종이와 펜을 가지고 오더니 다시 내 앞으로 와 앉았다.이미 다 마셔버린 종이컵끝을 손가락으로 만지다가 버릇대로 틱틱치기 시작했다.그런 내 행동을 보다가 남자가 자신을 오재석이라고 소개했다.그에 따라 나도 갖고 놀던 종이컵을 내려놓고 내 인사를 건냈다.
"그럼 청부살인 할 분 이름이랑 나이 좀 알려주시겠어요?"
"스물여섯이에요.그리고 저를 죽여주시면 되요.나랑 같이 얘기도 하고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이 되면 놀러도 다녀주세요.그렇게 내가 당신하고 정을 꽤 쌓아갈 즈음,나를 죽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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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필명에 쓰는 거라 쓰는 방식도 느낌도 다르게 써봤어요.
나를 아시는 분이 있을까 모르겠어요.
저녁에 또 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