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공기가 찼다. 이제 봄이 절정으로 다가오는 시기인데도. 가디건이라도 하나 걸치고 나올 걸 그랬나. 살짝 쌀쌀한 느낌에 팔을 문지르면서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이게 얼마만이지. 방송에다 대고 한강에 가는 게 취미라고 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바빠서 한국에 잘 못 왔던 탓도 있었고, 뭐, 팬들이 워낙 따라다녀서 못 온 것도 있긴 했지. 기분이 좀 안 좋아서 모험을 무릅쓰고 나온 건데, 역시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흐읍, 후우. 숨을 깊게 들이고 내쉬자 찬 공기가 폐부를 도는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삼십 분쯤 걸었을까, 돌아갈 생각이 들어 강변의 벤치에 앉았다. 잠깐만 있다 가야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이어폰은 한 쪽만 꽂고서 음악을 틀었다. 아, 좋아. 좋다. 좋아.
그 때였다. 누군가 타박타박, 소리를 내며 걸어 와 옆의 벤치에 앉은 건. 설마.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온 몸을 굳히고 바짝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애써 귀에 꽂아놓은 노래도 듣지 못한 채, 그 채로 삼사 분은 지난 것 같았다. 탁, 치익-. 꿀꺽꿀꺽, 크-. 캔 따는 소린데. 아까 흘긋 보니까 교복이던데. 맥준가? 에이 콜라겠지. 캔까지 사온 거 보면 나 쫓아서 온 건 아닌가 보다. 휴우. 짧은 새 많은 생각이 지나고, 그 새 한 캔을 다 마신 건지 탁, 치익-. 또 다른 캔을 따는 소리가 들린다. 탄산이든 술이든 저렇게 급하게 마시면 아플텐데. 쓸데없는 오지랖. 팬만 아니면 됐다.
I can't believe, Yes it's tr-,
"여보세요."
어, 내... 노래다.
"나? 한강. 죽긴 뭘 죽어. 맥주 마시는 중. 야, 이거 맛있다. 윽, 알았어. 좀만 마실게."
맥알이도 없이 웃는다. 아무리 많아봤자 스물? 스물하나?로 밖에 안 보이는 여자가.
"어, 들어가야지. 걱정 말고 먼저 자라. 사감한테 말해서 외박증 끊고 나온거야. 내일 아침에 들어가."
사감? 기숙사 사는 건가...
"응응, 아가씨. 아가씨 고-운 피부 상하시겠어요. 끊는다. 잘 자."
전화를 끊자마자 잠시 멈췄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한다. 도대체 저 가방 안엔 맥주가 몇 캔이나 들어있는 걸까. 끝도 없이 나오네. 쓸데없는 감상으로 입을 헤-, 벌렸다. 그러다, 자기를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졌는지,
"아, 시끄러우셨어요? 죄송합니다. 조용히 했어야 하는데, 제가 좀 취한 건지, 생각을 못했네요."
"아니, 괜찮아요. 너무 많이 마시지 마세요. 몸에 안 좋아요."
"어...... 아, 네."
내가 말을 너무 길게 한 걸까. 팬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너무 놨던 건지. 내 목소리를 알아 들은 듯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던 여자가 살짝 웃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고개를 돌린다. 나 별로 안 좋아하나. 종현이 형만 좋아하나. 이게 무슨 못된 심본지 괜히 뾰루퉁해져서 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 때였다.
"저기... 바쁘세요?"
"예, 예? 아, 아니요. 아직 한... 이십 분 정도는 괜찮아요."
"별건 아니고. 그냥, 고맙다구요."
"...?"
뭐라고 대답하기 애매하고 뜬금없는 말에 황망하게 쳐다본 내 얼굴이 웃겼는지 작은 소리로 웃는다. 그게, 그러니까.
"제가 요새, 음... 뭐라고 부르지... 당신들 때문에 살거든요."
"저희요?"
"네. 진짜, 진짜, 지겨워 죽겠는데. 그래도 당신들 노래 듣는 재미에, 당신들 방송 보는 재미에 살아요."
"아... 감사해요."
아련하게 말하더니 갑자기 끅끅대고 웃는다.
"내가 처음보는 사람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취했나 봐요, 그냥 주정이라고 생각하세요. 평생 볼 일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눈 앞에 있으니 놀라서 그랬나."
"아니에요. 저희 좋아해주신다는데, 감사하죠."
"거짓말.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 게 뭐 힘든 일이 있길래 한탄이냐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자기만큼 힘들지도 않으면서, 이러고 비웃고 있잖아요. 그죠."
"아니, 진짜 아니에요! 진짜요!"
"알았어요. 믿어줄게요."
저 사람의 표현을 빌리지면 '새파랗게 어린 거'한테 휘둘리고 있다. 그래도, 어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탁, 치익-. 나랑 얘기하던 중이었는데, 도대체 언제 한 캔을 비운 걸까. 그래도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서 자리를 옮겨 캔을 뺏었다.
"...에?"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새파랗게 어리다고 하니까 어른으로서 참견하는 거에요. 술은 혼자 마시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막 들이키는 것도 아니에요. 이 캔은 내가 비울테니까, 그만 들어가요. 여자가 찬데 너무 오래 앉아있네."
"오, 잔소리해주는 거에요? 기분 좋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한테 잔소리도 해주고. 알았어요. 들어갈게요. 오늘, 진짜, 반가웠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캔을 들고 있는 내 손을 턱, 잡는다.
"그래도 나름 팬인데, 이렇게 무방비하게 옆에 앉으면 안 돼요. 앞으로 만날 일 없을 테니 기념으로 염치 없는 짓 한 번 했어요. 너무 미워하지 말고, 고마워요 진짜. 어쩐지 사감한테 혼나면서도 나와야 할 것 같더라니. 진짜 가요, 안녕히 가세요, 당신도."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손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하는 말에 홀렸다. 홀린 것 같이 팔을 턱, 붙잡았다.
"왜 앞으로 볼 일이 없어요. 그리고, 새파랗게 어리다고 하는 사람이, 버릇없이 당신이 뭐에요. 오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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