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apatina
루한은 연세대를 다니는 학생이야. 요즘 따라 계속 멍한 기분이 들어. 아마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일 거야. 몇 주 전에 아주 큰 교통사고를 당했거든.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병실에서 눈 뜨자마자 의사고 간호사들이고 다 달려와서 이건 기적이라며 안도의 한마디씩을 하는 거 보면 아주 큰 교통사고였던 것 같아.
그 사고 때문에 한 학기를 반강제적으로 쉬고 다시 복학을 하게 되었어. 물론 루한이 하루 종일 멍한 건 아니야. 멍해있을 틈도 없이 주위에 항상 붙어 다니는 찬열이와 세훈이가 투닥거리니까.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수업만 들으러 다니며 시간은 흘러가. 하지만 그런 루한을 찬열이와 세훈이가 가만히 뒀을까? 아니지 매일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같이 술을 마시러 가.
루한은 왠지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마음이 크게 자리를 잡으면서 그 모임에 자주 끼어서 술을 마시게 돼. 집에 홀로 들어가면 가족이 없어서 그런가 마음이 허하거든. 그리고 그 큰집에 혼자만의 기억은 왜 그리도 많은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고 혼자 어이없어 웃던 일, 여러 음식을 한 번에 먹겠다며 혼자 다 먹지도 않을 두세 명에게도 많은 음식을 하고 남겼던 일, 커피 머신 만지지도 못하면서 갑작스러운 지름신에 냉큼 사와 여러 커피도 내려보고, 화장대엔 자기 피부에 맞지도 않는 크림들이 수두룩하고. 도대체 사고 이전과 이후가 왜 이리 달라졌는지 모르겠어. 분명히 난 지난 추억을 다 가지고 있는데 하며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해.
그러던 어느 날 하필이면 찬열이가 여자 친구에게 차여서 술을 진탕 나누어 마시고 엄청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여차저차 집에 돌아와 잠들었어. 자다가 누군가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오랜만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푹 잠을 잤지. 근데 잠에서 깨 눈을 떠보니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돼지우리 같던 집이 깨끗해. 이게 무슨 일이야, 꿈인가? 아니면 도둑이 들었나? 혼란에 빠져 머리만 굴리던 루한이 문이 열리는 기척에 화들짝 놀라 문을 쳐다보니 웬 고양이상인 깔끔해 보이는 남자가 서있어. 민석이지. 혼란에 빠져있는 루한에게 민석이 다가가 이마에 뽀뽀를 하고 웃으며 아침인사를 건네. 루야, 잘 잤어? 하고.
루한은 기겁을 하며 민석을 밀쳐. 너무 놀라서 별 폭언을 다 퍼부어. 미친 거냐, 이건 주거침입이다, 나는 게이가 아니다, 사람들이 보면 어쩌냐 하면서. 민석이는 쏟아지는 폭언을 그냥 웃으면서 듣기만 해. 조용히 루한이 하는 말을 다 듣고는 씩 웃으면서 한마디 해. 너는 그저 받기만 하라고, 그리고 자기는 영혼이라 남들 눈에는 안 보이니까 걱정 말라고, 잠시 너를 도와주기 위해 찾아온 거라고, 그냥 수호천사라고 생각해라고 말해. 루한은 민석이를 밀어내도 자꾸 자기를 찾아오는 민석이를 보고 포기하기로 결심해. 그냥 집에서 밥 차려주고 필요한 거 가져다주고, 그냥 민석이 말대로 수호천사려니 하는 거야. 그렇게 루한에게는 있는 듯 없는 듯 같이 사는 수호천사 겸 유령이 된 민석이야. 민석이가 다른 사람 눈엔 안 보이니 루한은 고려대, 연세대로 흩어진 자신의 친구들과 놀며 신경을 안 써.
고연전 시기가 되고 루한은 여러 종목에 참여하느라 바빠졌어. 민석이는 그 모습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지켜봐. 고연전 당일 루한이는 은연중에 당연히 민석이는 연세대 응원단 쪽에서 자신을 응원할 거라 생각했는데 고려대 응원석 쪽으로 가려는 걸 보고 경기장 앞에서 크게 싸워. 루한이는 어이가 없지. 자신의 수호천사면 당연히 자신의 모교 연세대에서 자기를 응원해야지. 지금 상대편인 고려대를 응원한다는 거잖아. 민석이는 민석이 나름의 사정이 있어 보이는데 루한이 화내서 말도 못해. 결국 고려대 응원단인 경수와 백현이가 루한이 공기 중에 소리 지르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는 눈으로 제지해. 그러면서 고려대가 최고라며, 고려대가 우승이라고 루한이를 놀려. 루한이는 민석이고 아끼는 동생 경수고 백현이고 머리가 복잡해서 그들에게 연세대가 종합우승할 거라고 크게 반박하고 민석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가버려. 민석이는 미안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경수와 백현이가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조용히 따라 들어가서 관람해. 그리고 자신의 몸이 영혼이라 투과되는 손으로 경수와 백현이를 쓰다듬어줘.
결국 악에 받친 루한 덕분에 연세대가 종합우승을 하고 약이 오른 고려대 경수와 백현이, 이겨서 신난 루한, 찬열, 세훈이는 주막에 모여 으르렁대며 술을 마시기 시작해. 육두문자가 오가고 난리가 난 주막에 민석이는 루한 몰래 경수 옆에 앉아있어. 술을 마시다가 늦게 합류한 크리스는 루한에게 소개팅을 제안해. 루한에게 소개팅을 제안하는 크리스를 경수와 아이들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봐. 루한은 혼자 지내는 것도 신물이 나고 허한 마음을 채우고 싶어서 수락해. 근데 이상하게 잠시 전만 해도 으르렁대던 아이들이 루한보고 자꾸 진짜 소개팅 하겠냐고 물어봐. 그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루한이는 화를 내며 소개팅할 거니까 더 이상 묻지 말라고 이야기를 끝내버려. 그에 경수는 자꾸 한숨만 쉬고 그런 경수를 보고 루한은 이해를 못해. 자기가 여자 친구를 사귀겠다는데 왜 그리 유난인 건지.
술을 진탕 마시고 눈을 뜨니까 벌써 아침이야. 자기가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몰라. 너무 속이 쓰려서 배를 부여잡고 나가니까 민석이가 콩나물국을 끓이고 있어. 루한은 전날에 자기가 크게 화를 낸 터라 주춤대는데 민석이가 일어난 걸 눈치 채고 웃으며 얼른 해장하라고 해. 아마 잊어버린 것 같아 보여서 루한은 사과할 마음을 지우고 허겁지겁 민석이가 차려준 밥을 먹어. 자신을 쳐다보는 민석이에게 루한은 크리스의 제안을 이야기하며 옷을 골라달라고 부탁해. 민석이는 루한을 잠시 쳐다보다가 일어나 드레스 룸에서 옷을 고르기 시작해. 민석이는 그래, 보내줄 때가 된 거야 하며 옷을 꺼내 루한에게 건네. 루한은 옷을 받아보더니 만족해하며 급하게 갈아입고 약속 장소에 나가.
그곳에서 크리스를 만나고 크리스에게 수아라는 여자를 소개받았어. 근데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 나. 수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니 쌍꺼풀 없이 큰 눈과 웃는 입모양이 민석과 닮았어. 루한은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흔들고 수아와의 데이트를 즐기기 시작해. 소개팅 이후로 루한은 수아와 잘 되기 시작해. 루한은 여자 친구가 생겨서 민석이를 생각할 틈도 없이 수아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이 헌신하지.
민석이는 루한 몰래 씁쓸해하면서 루한 앞에서는 웃고. 근데 요즘 들어 민석이는 자기가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해. 루한을 위해 요리를 하려 해도 손이 그릇을 통과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어. 민석이는 자기가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는 거지. 여전히 루한은 수아에게 헌신하고. 사실 민석이는 루한을 너무 사랑해서 하늘이 잠시 보내준 거였거든. 갈 시간이 되었다는 건 자신은 영혼이니까 현실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오래 머물면 안 된다는 거지. 그 사실을 떠올리며 거실에 혼자 멍하니 앉은 민석이는 쓸쓸하게 웃어. 그러면서도 힘든 몸을 이끌고 남겨질 루한을 위해 자신의 흔적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해. 화장대에 있는 루한에게 맞지 않는 제품들을 내다 버리고, 사진도 모아서 버리고, 집을 차근차근 정리해. 그렇게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멍하니 창밖을 보며 루한을 기다리는데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면서 몸이 희미해지는 걸 느껴. 돌아왔을 때도 루한을 생각하고 이 세상의 마지막 시간에서도 루한을 생각하며 그렇게 민석이는 루한과 함께 있던 공간을 떠나.
그 시간에 루한은 수아와 놀이공원으로 놀러 가 거울의 방에 들어갔는데 수아를 놓쳐서 헤매. 그러던 중에 유난히 빛나서 눈에 띄는 유리에 다가가. 신기해서 손을 대는 순간 전체가 정전이 되어버려. 정전이 되는 순간에 비어있던 머리가 빛이 스치면서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이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해. 알고 보니 자신이 비어있다 느낀 그 기억의 중심이 민석이었어.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에 자신이 그동안 민석이에게 대한 게 기억이 나고 사고 당시도 기억이나. 사실 자신이 겪었던 기억들은 민석이와의 추억, 그러니까 반쪽이 잘린 기억이었던 거야.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고 혼자 어이없어 웃던 일이 사실은 민석이를 보려 급하게 나가다가 걸려 넘어져서 멋쩍은 웃음을 지었던 거고, 여러 음식을 한 번에 먹겠다며 혼자 다 먹지도 않을, 두세 명에게도 많은 음식을 하고 남겼던 일은 민석이가 아파서 먹고 싶다는 음식을 해주겠다며 허둥댔던 일, 커피 머신 만지지도 못하면서 갑작스러운 지름신에 냉큼 사와 여러 커피도 내려 본 건 민석이의 취미생활을 같이 즐기기 위해했던 거였고, 안방 화장대에 있던 자기 피부에 맞지도 않는 크림들은 건조한 민석이를 위해 자신이 사온 것들이었어. 딱 민석이만 빼고 기억을 한 거지. 기억을 받아들이던 루한은 두통이 일며 사고 당시 운전하던 민석이 사고가 나는 그 순간에 운전석에서 손을 뻗어 자신을 보호한 게 기억이 난 거야. 그렇게 루한을 안은 민석이는 즉사로 그 자리에서 죽고 루한이는 그 덕에 산거지. 그 충격에 루한은 기억을 잃은 거고.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는 걸 깨달은 루한이는 자신에게 영혼으로 돌아온 민석이를 떠올려.
죽기 전에 루한에게 항상 틱틱 대고 냉정하게 대한 연인이었던 민석이는 항상 루한에게 미안했던 거야. 잘해줘야지, 표현해야지 해도 안 되고. 그러던 중에 사고가 난 거고. 그래, 그래서 자신을 찾아온 거야. 술집에서 소개팅 이야기를 꺼내자 한숨 쉰 경수는 민석이 아끼던 민석이의 고려대 직속 후배였고, 소개팅을 얘기하는 루한을 보며 죽은 민석이가 떠올라 소개팅을 반대했던 거지. 모든 걸 기억해낸 루한은 감정을 추스른 다음에 수아를 내버려 두고 내리는 비를 신경 쓰지 않고 집으로 가기 시작해. 지금 당장 민석이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서둘러 집 앞에 도착한 루한은 현관 문고리를 잡고 갈등해. 내가 엄청 소홀하게 대했는데 민석이를 어떻게 보지, 뭐라고 해야 할까, 하면서. 오랫동안 고민하던 루한은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며 민석을 찾아. 근데 뭔가 이상해. 수아가 생긴 근래엔 민석이가 자기를 안 따라다니고 집에 항상 있었단 말이야. 애가 타는 마음으로 집의 방 여기저기를 문을 열어보며 민석을 찾아. 이럴 리가 없는데. 어디 나갔나? 둘러보는데 아니야. 함께 있던 공간인 집에 아무리 둘러봐도 흔적이 없어. 같이 찍었던 사진도, 민석이 쓰던 화장품도, 민석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들에서 민석의 흔적들이 보이지 않아.
언제까지나 자신의 곁에 머물러 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야. 함께 있고 함께 걸어야 하는 그 둘만의 시간에 이제 루한 혼자 남은 거지. 자신을 위해, 자신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 모습도 웃으며 지켜봐 준 그가, 민석이가 없어. 루한은 결국 사랑해서 돌아온 민석이에게 상처만 준 거지. 루한은 거실에 불도 켜지 않고 앉아 비 오는 소리만 허망하게 듣고 있어. 비 오는 날 찾아온 민석이는 비 오는 날 자신을 위해 남겨져있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사라졌어.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을까. 민석이가 사라졌다는 걸 인식한 그 순간부터 루한은 기억이, 그러니까 민석이가 머물다가 간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려. 이젠 정말 민석이의 온기가 없으니까.
그 이후로 루한은 집에서 나가지 않아. 민석이가 혼자 남겨져 있던 공간을 이젠 루한이 지키고 있는 거야. 매일 착실히 수업에 참여하던 루한이 계속해서 수업을 빠지니 찬열이와 경수, 백현이가 집을 찾아왔어. 집의 문이 열리고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놀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정말 루한이 폐인이 되어버렸어. 그런 루한을 안타깝게 쳐다보고 있던 아이들은 기억을 찾은 루한에게 민석이 잠들어있는 나무를 알려줘. 끝까지 모른척하려 했지만 루한이 기억을 찾아버렸잖아. 민석의 나무를 알려주면서 루한에게 민석이 가장 좋아하던 루한의 모습으로 찾아가라고 부추겨. 지금 모습은 누가 봐도 아니거든.
멍하니 민석만 생각하다 아이들을 보낸 루한은 민석을 찾아가기로 결심해. 그렇게 민석이 가장 좋아하던 옷을 고르고, 옷을 골라 입고 거울에 서서 자신을 쳐다본 루한은 오열하기 시작해. 민석이 가장 좋아하던 모습이, 자신이 수아를 만나러 간다고 옷을 골라달라고 했을 때 민석이 골라준 옷이었던 거야. 한참을 울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루한은 민석이 있다는 나무를 찾아가.
다행히 그리 멀지 않았어. 민석이 있는 곳은 루한의 집을 내려다볼 수 있고 햇빛이 잘 비치면서 사람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어. 마지막까지 남겨질 루한을 걱정한 거지. 네 곁에 머무르겠다는 약속을 지킨 거고. 나무 앞에 터벅터벅 걸어가 나무에 기대앉은 루한은 나무에게 말을 걸어. 사랑한다고. 또 미안하다고. 한참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소나기가 오기 시작해. 다행히 루한은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해. 내리는 비를 보면서 루한은 민석이를 그리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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