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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3이 되었다. 새 학기의 설렘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어수선한 교실은 정체만이 가득했다. 여주는 괜히 문제집을 펼쳤다가, 넘겨보다가, 귀퉁이에 문제를 푸는 데에는 하등 쓸데없는 함수식을 끄적여봤다. 어제 백일주 정도는 마셔줘야 수능 대박이 터진다면서 놀이터에서 병나발을 불던 정국과 윤기는 맛이 간 채였다. 그나마 젊은 피라고 옆자리에서 여주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던 정국도 1교시가 지나자 윤기를 따라 책상 위로 엎어졌다. 혀가 꼬인 윤기의 연락을 받고 건장한 남정네 둘을 집까지 끌고 가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한 놈을 들춰업으면 한 놈이 찡찡대고, 또 한 놈을 달래니 다른 놈이 지랄하고. 5분 남짓한 거리를 한 시간동안 걸어오느라 지친 다리가 아직까지 욱신거렸다. 한심한 새끼들. 그러나 여주는 속으로 욕을 곱씹으면서도 담요랑 가디건을 각각 하나씩 너른 등에 덮어주었다. 윤기는 자고 일어나면 추위를 타 가뜩이나 예민한 성정이 더욱 지랄맞아졌고, 전정국은 덩치는 산만해선 잔병치레를 자주 겪었다.


문득 아슬아슬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10년 지기는 다들 이런 건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선을 넘나들고 있지만 지적질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이게 엿인지 간장인지도 구분을 못하는 그런 상황일지도 몰랐다. 아니 여주는 속으로 그리 확신하고 있었다. 다들 진창에 하도 오래 굴러서 정상이랑 비정상을 구분하는 혜안이 흐려진 것이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아주 이상하다고. 그녀는 여름밤 습도랑 비슷한 눅진한 목소리로 자기에게 매달리는 어제 정국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좋아해. 정말 좋아해. 피식 올라가는 입꼬리는 너무나 가벼웠지만 여주에게는 무엇보다도 버거운 진심이었다. 사실 다 알고 있는데. 저를 바라보는 눈에 열기가 섞인 것을. 입으로는 장난스레 욕설을 주고받으면서도 행동은 그리하지 못하는 것을. 여주는 정국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울망 거리며 좋아한다는 말을 토해내는 정국에게, 여주는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으니까. 너도 날 보면서 이런 동정을 할까? 그건 좀 끔찍한데. 여주는 멀찍이서 취한 채로 이족보행을 막힘없이 수행해나가는 윤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무것도 듣지 못한 눈치다.


좋아해. 


"…그리고 여주는 선생님 좀 따라와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벌써 조례가 끝났다. 정신이 깨어있던 몇몇의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뭐라뭐라 씹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슬리퍼가 차고 딱딱한 바닥에 맞닿는 간헐적인 소리 사이로 빗소리가 무자비하게 퍼붓는다. 교무실까지 이어지는 일직선의 복도가 그날따라 참 길었다. 생기부 한 줄 더 채워보려 아양 떠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소 담임과의 교류는 없다시피했다. 둘러싼 침묵이 숨 막혔다. 먼저 안부 인사라도 건네볼까, 하던 차에 담임이 먼저 입을 땠다. 그래서 여주는, 생각해둔 대학은 있니?


방금까지 맞은편에서 한 숨 붙이고 있는 늙은 남자 선생의 꾸벅이는 고개를 멍하니 바라보던 여주는 그제야 자신이 교무실에서 입시 상담을 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아, 소리를 내며 멍청하게 구는 여주를 보고 담임이 인자하게 웃었다. 이놈아. 니 미래가 달린 일이야. 정신 차려. 여주는 담임이 프린트기에서 뽑은 모의고사 성적표와, 엑셀에 칸칸이 나열된 대학 이름들을 쳐다보았다. 여기는 내 성적에서 안정권이고, 여기는 지금보다 점수를 좀 더 올리면 갈 수 있는 곳. 담임은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명문대로만 도배가 되어 있었으니까. 실적 하나는 먹고 들어가는 셈이었다. 여주는 표를 눈으로 무심하게 훑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두 멍청이는 여기 절대로 못 올 텐데. 아니, 애초에 한 놈은 음악 하느라 대학 갈 생각도 없어 보이고.


상담은 길게 끝나지 않았다. 여주는 의욕 충전 겸 담임이 손에 쥐여준, 대학 이름이 적힌 자그만 종이 쪼가리를 손에 달랑달랑 들고 교실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윤기는 언제 깼는지 이어폰을 낀 채 공책에 뭔가를 끄적이기 바빴고, 정국은 자리에 없었다. 18번 오래. 여주는 쿨쿨 잠을 자고 있는 다음 타자를 깨우기 위해 어깨를 손으로 흔들었다.  18번은 꽤 긴 시간 동안 잠이 덜 깼는지 헤롱헤롱대다가, 제 어깨에 여주의 손이 올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여주 본인 또한 그리 상쾌한 기분은 아니라 금세 손을 떼고 자리로 향했다. 윤기는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어폰 한 쪽을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 손에 작은 종이 쪼가리를 쥐고 멍청하게 서있는 여주가 보였다. 왔냐? 윤기가 물었다. 여주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게 숨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응."


숨까지 가다듬으며 대답한 것치곤 무미건조하게 잘 나왔다. 여주는 만족스러워하며 자리에 앉았다. 윤기는 여주의 손에 들린 것이 못내 궁금했던 모양이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여주의 팔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채는 것을 보면. 방금 간신히 괜찮아졌는데. 이러니까 다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잖아. 여주는 찹쌀떡같이 하얀 윤기의 얼굴을 한 번, 제 팔목을 잡은 예쁘고 큼지막한 손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살갗이 닿은 곳에 윤기의 손 모양 그대로 화상 자국이 날 것만 같았다. 여주가 그러든지 말든지 윤기는 여주의 손에서 종이를 뺏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 가차 없이 그녀의 팔목을 내려놓았다. 


"대학 이름이 뭐 이렇게 하나같이 재수가 없냐."


시력이 그닥 좋지 않은 윤기는 자그마한 글씨를 찡그려서 본다. 안 그래도 시력 거지 같은데 너 그러다 진짜 눈 병신 된다. 시신경 다 늘어나고.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윤기는 제 나쁜 버릇을 고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윤기를 좋아하면서 여주는 윤기의 찡그린 표정까지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뭐라 한 마디 하려다가, 그냥 실없이 내가 원래 좀 재수가 없어, 하고 대꾸했다. 어쩜 미간이 저렇게 보기 좋게 구겨질 수가 있지. 티가 나지 않도록 귀엽게 꿈틀거리는 눈썹을 몰래 눈에 담았다.


"중학교 때는 공부라면 칠색 팔색을 하더니."

"……"

"배신쩌네. 전정국이랑 나 빼놓고 서울 가서 잘 먹고 잘 살겠다. 너. 왜 이렇게 변했냐."



왜긴.


니가 공부 잘하는 여자 좋아하니까 그렇잖아.



턱 끝까지 올라온 말은 그대로 삼켜냈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윤기에게 그리 톡 쏘아붙일뻔했다. 윤기는 애 같은 여자를 싫어했다. 어른스럽고, 똑똑하고, 시원시원한 여자가 이상형이었다. 애 같고, 멍청하고, 소심한 자신과는 180도 다른. 이상형의 틀에 맞지도 않는 몸을 끼워 넣는 짓은 참 고역이었다. 난 사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니네 빼고 서울  가서 재미 볼 생각하니까 배 아파?"

"어. 진짜 존나 빡쳐."



여주는 여유로운 척 객기를 한 번 부려봤으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윤기는 이제 대화 자체에 흥미를 잃고 흐릿한 동태눈을 했다. 여주와 대화하느라 잠시 빼놓던 왼쪽 이어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등을 돌리려 하는 차에, 여주는 다급하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윤기야, 나 대학 가지 말까?"


그 말에 윤기는 잠시 멈칫했다. 그 엉겁 같은 시간에 여주는 빌고 또 빌었다. 빈말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가지 말라고 한 마디만 해달라고. 내 뒤에는 이제 물러설 곳 없는 절벽이니. 제발 나를 그만 밀어달라고.


"미쳤냐."


하지만 윤기는 무심한 세 음절로 모든 것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참고 있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국과 여주는 열아홉, 윤기는 스물. 원래대로라면 윤기는 진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남았어야 했지만 중학교 때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알바를 하다 교통사고가 크게 나는 바람에 그의 모든 시간은 1년씩 뒤처지게 되었다. 몇십 년 만의 폭염이라며 온 뉴스가 떠들어대던 유난히 지독했던 여름. 여주는 딱딱한 윤기의 깁스에 팔병신윤기♡ 따위의 시덥지 않은 낙서를 하고 정국은 그런 그녀를 거들며 그냥 뒤져버리지 왜 살아서 돌아왔냐 같은 인신공격을 퍼부어대던, 윤기가 이제 갓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유성병원. 성가신 엠뷸런스 빨간 불빛. 전신에 소름이 돋게하는 봉고차의 경적소리.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인데도 그때를 되짚으려 하면 낡아 헤진 사진을 들이키는 것처럼 아득했다. 그 냄새는 너무 퀴퀴하고 음습해서 윤기는 가급적이면 그런 우울한 생각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오늘 같이 비가 오는 여름밤이면 일련의 노력들은 늘 속수무책이 되곤 했다. 그래. PTSD 인지 PDST 인지, 의사가 지껄여대던 그 망할 알파벳 네 글자는 2년 동안 윤기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이딴 전문용어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그가 그 첫 글자 P는 Pain의 P일 것이다,라고 추측을 하게 만들 정도로.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팠고, 어깨의 통증은 자연스럽게 사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아, 진짜. 좆같이 아프네. 윤기는 진통제를 탈탈 털어 입에 집어넣고 물 없이 그대로 씹어 삼켰다. 입안이 지독하게 썼지만 이러면 약효가 더 빨리 돌지 않을까 싶어서. 윤기는 그런 것이 버릇이 되고 말았다. 진통제를 씹어 삼키는 게. 그렇게 사는 게.



"비 많이 오네."



윤기야 딱히 야자를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종이 땡 치자마자 석식도 거르고 장비와 건반이 있는 골방으로 튀어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지만, 여주는 달랐다. 아홉시 반이 되어서야 야자가 끝났고, 그 뒤에는 입시 학원인지 뭔지에 가서 또 진탕 굴러야 했다. 걔가 등교할 때 우산을 들고 있던가. 윤기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결국 손을 휘적여서 가디건을 집었다. 이런 날에는 정말 그 얼굴 마주하기도 싫었지만 그것보다도 애 혼자 기죽어선 교문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큰 장우산이라도 하나 쥐여주고 싶은데 현실은 작은 남색 접이식 우산뿐이다. 윤기는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들어올리곤 비 사이를 뚫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만 쥐여주고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여주는 윤기의 예상대로 교문 앞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교문 앞으로 하나둘씩 학부모들의 차가 학생들을 실어나르고 그렇지 못한 애들은 지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우산을 쓰고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륵 거리며 빗속을 뛰어가는 동안 여주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진짜 어떻게 우산 같이 쓰고 가자는 새끼가 한 명도 없지? 사람 서럽게… 애꿎은 돌멩이만 툭툭 치면서 여주는 계단에 쪼그려앉았다. 방금까지 그렇게 불편했던 전정국이 절로 보고 싶어졌다. 아, 그 새끼는 왜 하필 오늘 같은 날에 스타크래프트 한다고 피씨방을 쳐 가서는… 10 : 00 pm. 여주의 전자 손목시계에서 열 시를 가리키는 정갈한 글씨가 깜빡, 깜빡거렸다. 야자가 끝난지 벌써 삼십분이 지났다. 학원이 열 시 십 분에 시작하니 빼도 박도 못하게 지각이었다. 오늘은 진짜 가기 싫다. 숙제도 안 했는데. 가면 또 이 나이 먹고 회초리로 손바닥 처맞을게 뻔한데. 





가기 싫다는 생각은 어느새 가지 말자는 다짐으로 바뀌었다. 선생님, 저 여준데요… 오늘 감기 몸살 기운이 있어서 학원에 못 나갈 것 같아요. 여주는 변명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하며 학원에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지잉-울리는 소리와 동시에 엄지보다 조금 큰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평소에는 잠잠하기만 한 핸드폰인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부재중이 34개나 찍혀있었다. 들어가서 확인해보니 발신인은 모두 전정국이었다. 성격상 안 읽은 메시지나 뭐 그런 걸 싫어하고 못 참는 터라 하나하나 확인하며 기록을 지워나갔다. 여주는 불과 10여 분 전으로 찍혀있는 기록에 잠시 멈칫하다가, 민윤기 이 새끼는 죽어도 문자 한 번을 안 하네, 하고 자조했다가, 그런 기대를 품은 자신을 혐오했다. 그리고 무심코 앞을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그곳에는 남색 우산을 쓰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민윤기가 있었다.




부디 지나가던 길이기를 바랬지만 윤기는 학교 이름이 한자로 박힌 낡은 철창을 넘어버린 지 오래였다. 여주는 뒷걸음질 쳤다. 이유는 몰랐다. 나 말고 다른 애를 데리러 왔을까 봐 겁이 나서? 그렇다기엔 이제 학교에는 저 말고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 시발. 시발. 진짜 존나 꼴 보기 싫은데 지금. 여주는 자기도 모르게 계속해서 비속어를 남발했다. 제발 저리 가버리라고. 계속해서 빌었다. 그래도 자신을 숨 막히게 하는 그림자는 점점 커져만 갔다. 빗소리가 다른 모든 소리를 좀먹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귓가에 윤기의 발자국 소리가 쿵. 쿵. 하고 울려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무엇인가 한계에 다다른 순간, 훅하고 익숙한 체향이 자신을 덮었다.



"하아…"



눈앞에는 정국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커다란 장우산을 들고, 머리에 나뭇잎을 하나 매단 채로. 그것을 보니 담을 넘어서 허겁지겁 뛰어왔을 정국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귓가를 미친 듯이 울리던 괴물 같은 발자국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실제로 윤기는 발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멈춰서, 그 자리에 서서, 여주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10년을 함께 했지만 여전히 윤기의 속은 읽을 수가 없다. 여주는 정국의 너른 상체 너머로 윤기의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손을 들어서 정국의 머리칼에 그림처럼 붙은 나뭇잎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친구들이랑 피씨방 간다며."


목소리가 마치 남자친구 책망하는 것 같이 다정하고 애교스러운… 자기가 말을 내뱉고 자기가 놀라 여주는 티 나지 않게 나뭇잎 쥔 손을 떨었다. 그 이질적인 분위기를 정국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정국의 눈이 가늘어졌다. 집요하게 자신의 손끝 하나까지 모조리 따라잡았다. 대체 그동안 나한테 얼마나 데였으면 고작 이거에 의심부터 하니. 너는. 한편으로 죄책감이 들면서도 여주는 정국의 촉을 흩뜨려놓기 위해 무딘 애를 썼다. 윤기는 이제 우산을 뒤로 넘긴 채 대놓고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 형형한 눈빛에 여주는 머리카락이 삐쭉 서는 것을 느꼈다. 정국이 여주의 어깨에 제 커다란 겉옷을 둘러주며 무심코 뒤를 확인해보려 하자, 여주는 정국의 허리를 감싸 그를 돌려세웠다. 정국이 제 뒤에 서있는 윤기를 발견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진득하고 불길한 직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뒤돌아보지 마. 정국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쁘게 굴까."



장난과 진심의 경계를 아찔하게 넘나들며. 평소 같았다면 정국이 이런 식으로 굴 때마다 윤기가 자신에게 그리했던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기며 지랄. 미친놈. 온갖 욕을 박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저 정국의 허리께를 감싼 옷자락을 더 꽉 쥐는 것 밖엔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아예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정국의 머리카락으로 흐릿하게 가려진 시야 너머 윤기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는 것이 슬로모션처럼 재생되었다. 또 썩은 동태눈을 하고, 나 같은 건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아까까지는 그렇게 피하고 싶어 했으면서.



여주는 정국의 입술을 머금었다. 상당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정국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토끼같이 크고 순한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여주는 정국의 품에 안겨 정국의 목을 감싸 안은 채, 윤기를 곁눈질했다. 윤기는 일말의 동요조차 없이, 여주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고 있었다. 아니 그런 척을 했다. 여주는 우산을 쓴 윤기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그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짜릿하다 못해서 절로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나왔다. 호흡이 가빠 왔다. 더 이상  숨 쉬는 게 힘들다고 느껴질 때쯤에, 정국은 제 입술을 여주에게서 떼어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여주를 향하지 않았다. 아, 그제서야 여주는 윤기가 주는 쾌락에 취해 정국을 돌보지 않았음을 자책한다. 셋의 시선이 허공에서 엇갈린다.



[방탄소년단/전정국/민윤기] 어항 속의 해일 A | 인스티즈





"…여주야.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전정국."


"뒤에 민윤기 있었다고."




정국은 비릿하게 웃다가, 그마저도 힘에 부쳐 결국 표정을 굳혔다. 상처받은 정국의 얼굴에 그제서야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파악했다. 여주는 온몸을 잘게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여주가 한 발 뒷걸음질 치면 정국은 두 발 다가왔다. 두 손목이 거칠게 잡혔다. 정국은 자기가 덮어준 겉옷 사이로 단단한 손을 집어넣어 여주의 허리를 감쌌다. 젖어서 달라붙는 하복 사이로 정국이 척추뼈를 매만지자 여주는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 틈에 정국은 다시 한 번 저를 여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주는 정국을 힘겹게 받아내면서, 폭풍 사이로 멀어져 가는 윤기의 어깨를 눈에 담았다.













10년 동안 지겹게 이어지던 소꿉놀이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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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61.42
와... 대박...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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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와 진짜 너무 사랑해요 와 대박ㅠㅠㅠㅠ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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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와... 진짜 이런류의 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ㅠㅠㅠ
다음 글도 기대할게요!!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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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139.164
와... 미친거같아요작가님...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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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4
글 분위기 너무너무 좋아요 다음 글도 기다리겠습니다 ㅜㅜ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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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5
저지금 처음으로 신알신 했습니다 기대할게요 ㅠㅠ
7년 전
비회원도 댓글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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