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영혼들이 깨어나는 자정에 산짐승만 드글대는 으슥한 숲에
근방에 있는 아름다운 것과는 비교도 안될 사슴이 하나있었으니, 그를 새벽사슴 루한이라 불렀다.
그의 아름다움에 결점이 없는것이 결점이니라, 지나가는 나비마저도 더 이상 형용할수없는
그의 아름다움에 취해 정신을 못차렸지만 그에게는 오직 단 하나만의 사랑, 유화라 불리는 아름다운 꽃이 있었다.
마치 어미새가 새끼새에게 하루의 식량을 주듯이 사슴은 꽃을 보살피고 보살폈으며
그 꽃은 그의 애정을 아는듯이 단한번도 지지않고 아름답게 피어나갔다.
감히 누구도 범접할수없는 그 아름다움속에 칼날보다 매섭고 새벽공기보다 푸르고 차가운 눈빛의 늑대, 청랑이 나타났다.
늑대는 단숨에 꽃을 뿌리채 뽑아가고 아름답기만 하나 무능력한 사슴은 그의 꽃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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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는 갑을년, 영조가 위독한 병에 걸리고 위태로운 날들이 지남에도 나타나지않는 출산소식에 합방일 수가 늘어났고,
고된 노력과 백성들의 기도 끝에 푸른늑대를 닮은 아이 청랑이 태어났다.
하늘에서 보내신 아이라 여기며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청랑은 4년뒤 루한이 태어나자 질투의 눈빛으로 루한을 베곤했다.
평소 계집같지만 한편으로는 사내의 향기가 물씬 풍기던 루한은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궁녀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알게모르게 입소문을 탔고 그의 일거일수투족은 여러사람들의 입에 실시간으로 들락날락거렸다.
자신의 사랑을 뺏어간데다가 빼어난 외모와 바른 행실은 청랑에게 더 많은 질투를 샀고
결국 청랑과 루한의 사이에는 견제라는 무너질수없는 벽이 쌓였다.
정치와 학문에 발을 내딛는것마저도 소름이 끼쳐하던 루한은 환복을 해서 시장을 돌아다니는것을 매우 좋아했다.
숨이 턱 막히는 공기의 궁속에서는 느낄수 없던 자유로움과 온몸을 타고흐르는 전율은 마치 약물같은 중독성을 느낄수 있었다.
시장을 들어선 루한은 이미 수백번도 가본듯 익숙한 발걸음을 옮기며 방앗간과 화원집을 드나들었다.
방앗간에선 이쁘장하게 생긴 부잣집 아들내미를 병아리보듯이 귀여워해주며 항상 뜨끈뜨끈한 가래떡에 꿀을 찍어 먹였고
화원집에서는 아직 루한의 눈에 익지 않은 꽃들을 설명해주었다.
루한은 평소 꽃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궁궐 주변에 피어난 꽃이란 꽃은 모두 꿰뚫고 있었다.
이 꽃은 안개꽃 저 꽃은 방울꽃. 척 보면 척으로 꽃의 화려한 겉모습만 보고선 꽃의 이름과 그 화려한 겉모습속 소박한 내면을 알아냈었다.
그런 루한이 가장 좋아하는 꽃은 바로 채꽃이었다.
언뜻보면 보랏빛이 도는 민들레씨 같기도 한게 보라색 꽃잎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꽃가루가 휘날리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꽃가루가 빛나는 햇살과 만나 코끝을 간지럽혔을때 느낀 미묘한 설레임의 감정은 충분히 루한을 사로잡을수 있었다.
루한은 곧바로 궁녀들에게 저 꽃을 궁 곳곳에 심을것을 명령했고
여러차례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더니 어느덧 봄이 다시 찾아와 궁 전체가 보랏빛깔로 물들었다.
봄의 싱그러운 냄새와 소용돌이치는 보라색의 향연은 모두의 눈과 코를 즐겁게 했다.
하지만 이 마저도 눈꼴이 시려웠던 청랑은 채꽃을 눈에 닥치는데로 뽑아버리고 샛노란 금송화를 심을 것을 명령했다.
어린 왕자들의 싸움을 귀엽게 여기던 궁녀들은 채꽃은 그대루 두되 사이사이에 금송화를 심었고,
다음해에는 보랏빛 캔버스에 노오란물감이 튄것같은 오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보라색과 노란색으로 입혀졌던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색을 잃어 모두 흑백으로 변해버리고
루한이 10살, 청랑이 14살이 되던 여름, 왕세자 책봉이 이루어졌다.
하늘에서도 이 날을 축복하는지 평소의 무더위가 아닌 따스한 햇볕을 선물해주었다.
궁안의 큰 행사을 맞이 각자의 업무를 맡은 궁녀들이 바삐 몸을 움직였다.
기미상궁은 조식을 올리기위해 색색별별의 어육과 야채를 장국과 함께 끓여내 먹는 신선로와 걸쭉한 잣죽을
맛보느라 혀를 바삐 움직였고 최상궁은 쌍동계와 칠장복을 준비해 루한이 청랑과 지내는 자선당을 향해 발을 바삐 움직였다.
청랑은 벌써 인정전에서 교육을 받고있었다.
루한은 조개껍질을 갈고 얇게 깔아 사슴의 문양으로 발린 장롱을 열더니 붉은 수상자를 꺼냈다.
매번 시장으로 나갈때마다 입고 나가는 보랏빛 옷을 숨겨놨었다. 어라.분명 여기있을텐데.
예상치 못한 옷의 사라짐에 당황을하며 허둥댔다.
궁의 옷을 입고 나갈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옷 또한 채꽃빛깔이 난다해 아끼는 복장이였다.
루한은 이 장롱 저 장롱 열어보며 뒤졌다. 반포기 상태로 수상자가 있던 장롱을 한번 더 열어보니
상자가 있던 곳 밑에 보라색 천이 보였다. 이게 왜 여기있지.
당황스러움이 아직 가시지않은채 신나는 하루를 생각하며 루한은 옷을 갈아입고 상자 속에 환복한 옷을 꼭꼭 숨겨놓았다.
경회루 옆 돌담에는 작은 구멍이있는데 그것을 막아놓던 석기를 치우고 그 자라난 풀을 걷어내다보면
루한의 몸집에 딱 맞는 구멍이 있었다. 새벽이슬이 맺힌 풀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파헤치던 루한은 구멍을 금세 찾고
엉금엉금 기어나와 궁궐 밖으로 빠져나왔다.
촉촉한 이슬을 잔뜩 머금은 옷이 질퍽거렸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루한은 신나는 걸음걸이로 방앗간을 향해 걸었다.
아직 열지 않은 방앗간을 보고 루한이 방앗간 옆 작은 바위에 걸터 앉았다. 발이 박자를 맞춰가며 바위에 쿵쿵 부딪혔다.
`나만의 님이여 어디계신가
너무나 아름다워 꼭꼭 숨겨져 있다네
빛처럼 들어가 바람처럼 나가시면 아니오리다
오늘도 내님을 꿈꿔보리다`
한참이 지났을까 어디선가 샘물을 머금은 듯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전 처음들어보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흠뻑 취하던 루한은 벌떡 일어나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울림이 큰것을 보아 탁트인 공간은 아닐터 비실한 황토집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밀폐된 공간이란건데.
워낙 복잡한 시장인지라 서쪽인지 남쪽인지 구분이 안갔다.
한참을 방황하던 루한은 문득 사흘 전 오미자꽃이 폈다는 화원집 아저씨의 말에 향했던 곳을 떠올리며 걸어갔다.
시원시원한 여름 바람을 타며 종이가 휘날리던 상가 옆에 있는 텅 빈 목재창고 벽을 따라 오미자 덩굴이 엉켜있었다.
저만한 울림통을 가질만한 건물은 그 목재 건물 밖에 없어 그 창고가 아니고서야 저런 울림이 나올 수 없었다.
창고 문앞에 다다르자 노래소리가 뚝 끊겼다.
살짝 열린 문 하나를 두고 조마조마해하던 루한은 혹시나 자신 때문이 아닌가 싶어 안절부절해했다.
한참을 문 하나를 두고 정적만이 흐르다 조용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앞에 서있는 한 계집은 루한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였다.
루한을 보자마자 똥그랗게 눈이 커진 아이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뒷걸음질치다 결국 지푸라기 더미에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당황한 루한이 이성보다 몸이 앞선채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세웠다.
정신을 차리고 본 아이의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꽃송이 하나 같았다.
고양이를 연상캐 하는 매서운눈매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눈빛에서 우러나오는 오묘한 부드러움에
깊은 눈망울에서 빠져나올수없을것 같았다. 똑부러진 콧대와 동그란 아이의 얼굴형의 독특한 매력은
정갈하게 땋아 댕기로 묶은 머리를 타고흘러가 어느새 둘이 맞잡은 손에 와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한은 아이와 손을 잡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고 급히 손을 떼 바지 뒷주머니에 두어번 슥슥 문질렀다.
그게...노래 소리를 듣다가 나도모르게... 말을 버벅거리던 루한이 아이의 눈치를 보다 그만 풀이 죽어 고개를 떨궜다.
미안. 루한이 애써 변명거리를 찾다 결국 이실직고를 하는바람에 멍하니 듣던 아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괜찮아. 내 이름은 유화야. 너 노래 듣는 솜씨가 꽤 좋구나?`
장난기 가득한 유화의 말에 루한이 긴장을 풀었다.
`내 이름은 루한.`
통성명을 마친 유화와 루한은 묘한 설레임 속에 서로를 쳐다보다 금세 친해져 이야기 꽃을 피웠다.
유화는 우참찬 대제학의 여식으로 꽤나 부유하게 자라왔다고 설명했다.
워낙 조상 대대로 엄격한 집안 분위기 탓에 발 하나 삐끗하면 왕창 혼났다며 찡찡대는 유화의 모습을 루한은 넋놓고 바라봤다.
어느새 유화의 얘기가 끝나고 루한의 차례가 왔을때 루한은 순간 내적갈등을 느꼈다.
유화의 아버지가 정 2품에 위치하시기에 만약 자신이 왕자라는것을 밝힌다면 분명히 궁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자신의 궁 밖에서의 이중생활을 들킬것이 분명했다.
`나는... 난... 고아야!`
루한의 귀티나는 차림새와 어딘가 어색한 말투를 보면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유화는 곧이곧대로 믿고 싱긋 웃는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살짝 위로 올라갔던 고양이 눈매가 밑으로 축 쳐지며 금세라도 건드리면 툭 떨어질것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자신도 모르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버린 루한은 예상치 못한 유화의 눈물에 당황을 하며 아니야,아니야 장난이야 라며
유화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아직 작은 크기의 손바닥으로 본능적으로 가려버린 눈이었지만 그 손의 온기는
유화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유화가 다시 고르게 호흡하며 생기를 찾자 루한은 손을 조심히 떼고 유화의 손을 잡았다.
` 난 사실은... 궁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고 유화와 눈을 마주치던 순간 루한의 하루에 계획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난입 했다.
` 이런 차림으로 이런 곳에서 뭣하시는겁니까. 어서 인정전으로 모시겠습니다.`
난데없는 최상궁과 궁녀들의 출입에 경직한 루한과 유화는 최상궁에 의해 맞잡고 있던 손이 끊겨졌다.
최상궁의 어깨에 쌀 포대기처럼 걸쳐진 루한은 발을 허공에 아둥바둥대며 짧은 팔을 유화를 향해 뻗었지만
금세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밖으로 빠져나와 눈부신 햇빛이 루한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루한이 강렬한 햇빛속에 눈을 찡그리며 유화를 향해 뻗었던 손으로 최상궁의 등을 퍽퍽 치는동안
창고 안에 혼자 남겨진 유화는 문틈 사이로 그의 모습을 멍하니 처다봤다. 대체 뭐야.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듯 적만만이 흐르던 창고의 문틈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조용히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
예전부터 상궁들이 눈을 판 사이에 항상 감쪽같이 사라지던 루한의 행방은
궁녀들에게 언제까지나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다. 소꿉친구도 없을 뿐더러 청랑과의 사이도 썩 좋지않은데
놀러갈 곳이 궁안에는 마땅히 없었던 것이다. 왕비의 출산 이후 급격히 건강이 더욱 더 악화된 전하의 귓속에 들어가면
분명 큰 호통을 내리실 것이에 궁녀들은 조용하지만 신속하게 루한을 찾아와야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매번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는 루한은 궁녀들이 자신의 행방을 찾고있다는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일도 없었단듯이 자리에 와있었다.
한바탕의 수색이 이루어진 후 지친 궁녀들은 다시 자선당으로 돌아오면 태연하게 앉아 말똥말똥 쳐다보는 루한을 볼 수 있었다.
어느날 루한이 잠든 사이,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며 이를 갈던 궁녀들은
목숨을 담보로 자선당 안에 들어가 방에 있는 장롱을 뒤졌다.
유난히도 달빛이 잘 들던 루한의 방은 달빛이 장롱위의 사슴장식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고 있었다.
손도 대지 않은듯 먼지가 가득 쌓여있는 책 여러권과 어떻게 구했는지 금서로 지정되있는 만화책이 나오더니
마지막 장롱에서는 붉은 수상자가 나왔다. 별 감흥 없이 수상자를 열어보다 보라색의 저고리와 색감이 살짝 더 연한 바지를
찾을 수 있었다. 영문을 알지 못한채 루한이 엄마의 젖을 빨던 시절서부터 함께 지내던
최상궁에게 옷을 전달하자 최상궁은 직감이 온듯이 옷을 한참 바라보더니 다시 원래자리에 되돌려놓으라 명령했다.
사슴장식 장롱을 열고 마치 손을 대지 않은듯 옷을 놓고 그 위에 수 상자를 놓았던 모순은 루한은 별 생각 없이 넘겼던 것이다.
왕세자 책봉 당일날 최상궁은 오늘 하루 루한의 작은 몸에 얹혀져 있을 쌍동계와 칠장복을 가지고 자선당 안에 들다
루한이 방 안에 없는 것을 확인해 급히 옷을 내려놓고 인정전에 달려가 궁녀에게 도련님은 잘 지키고있느냐, 물었다.
지금 궁녀들이 잠복해 루한을 따라가고 있다는 루한의 말에 최상궁은 급히 환복을하고 궁 밖을 나섰다.
궁녀들과 시장 골목길 끝에서 만난 최상궁은 돌위에 걸터 앉아 다리를 가만히 두고 있지 못하는 루한을 볼 수 있었다.
` 내 어디서나 체통을 지키고 가만히 앉아있으라 그렇게 일렀거늘…`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신의 자식처럼 걱정하던 최상궁은 갑자기 두리번거리며
어딘가를 향하는 루한의 모습을 보며 뒤돌아 궁녀들에게 쥐새끼처럼 조용히 따라가라 명령했다.
갑자기 골목사이로 사라져버린 루한을 다시 놓쳐버린 궁녀들은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한참을 해매다 혹시나 들여다본 창고안에 루한을 발견하고선 안심한 최상궁은
루한과 유화의 맞잡은 손을 보고선 순간 소름이 끼쳐 얼른 들어가 손을 끊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채로 루한을 번쩍 들어올린 최상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고를 빠져나왔다.
나머지 궁녀들은 최상궁의 묘한 태도에 어리둥절해하다 멍하니 앉아있는 유화를 쳐다보니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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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파다가 디자인에서 막혀서 그냥 글잡에서 임시로 연재!!!
여체화 아니에요 ㅠㅠㅠ 아직 기나긴 스토리 전개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앞부분이니 주의깊게 읽어주세요♥
과연 민석이는 언제 등장하는것이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맞춤법지적 달게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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