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가쁜 숨소리뿐이다. 그저 도망치고만 싶은 그 시선을, 우태운은 끝끝내 떼어내지 않는다. "...김유권을 어떻게 하지 않은건 미뤄둔거지, 잊은게 아니라고."
"......."
"멍청하게 안심한건지 방심한건지 모르겠지만 너 실수했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낮게 말하는 목소리가 속을 뒤집어놓는듯한 느낌을 준다.
서있기가 힘들다.
"내가.. 가만 놔둘것 같지,너."
언뜻 부드럽게 들리기까지 하는 어조는 몸을 더 긴장시킬 뿐이다.
주체가 안될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꾹 말아쥐어 등 뒤로 숨겨보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안다. 네 앞에서 덜덜 떠는 나를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흔들리는 눈과 아무말도 내뱉지 못하는 입을 보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해? 어둡게 내려앉는 눈에서는 그 무엇도 읽혀지지 않는다. "..그런 애들 장난같은 축구부따위 내가 어떻게 못할것 같아?"
...뭐?
순간, 눈이 크게 뜨여진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내일,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조져버릴 수 있어. 알아들어?"
이를 꽉 물고 씹어뱉듯 사납게 말하는 우태운을 숨도 못쉬고 바라보았다.
그 말 뜻이...
부서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부원들 하나하나에게... 그러니까. 핏기가 가시는걸 느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생각할 것도 없다.
우태운은 둘 중 어느것이든 가능할 테니까. 또다시 내 눈을 노려보는 그 시선은, 내 반응을 살피듯 움직이지 않는다. ".....나갈게."
꿈틀, 우태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여전히 시선은 움직이지 않는다.
"축구부... 나간다고."
"....."
"어차피, 내 의사도 아니었어. 그 새끼들이 맘대로,"
"너."
갑자기 말을 끊어버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표정이 변했다. "뭐야, 너."
"뭐...?"
살짝 얼굴을 들어보니, 찡그린 표정의 우태운이 보인다.
당황스럽게 바라보고 서있자 다시 입을 연다.
"왜 그렇게 순순해, 거기 뭐라도 숨겨놨어?"
갑자기 추궁하듯 묻는 기세에 움찔, 했더니 미쳐버린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어깨를 잡아 벽에 밀친다.
"아...!"
날개뼈가 세게 부딪쳐 고개가 숙여진다.
그마저도 머리채를 거칠게 틀어잡혀, 다시 그 광기어린 눈을 마주해야 했다. "거기가 너한테 얼마나 중요하길래 네가 이래. 뭔데?"
"이거 놔...!"
"거기 마음에 딱 들어맞는 놈이 있었나? 아니면 그 틈바구니에서 허리라도 돌렸어?"
".....!"
"그래, 몇한테나 대줬어? 머릿수가 많으니까 돌려가며 박혔겠네."
"무, 무슨...!"
"왜. 뻔하잖아. 붙어먹는 김유권도 있겠다, 씨발 아주 좋아 죽겠다고 내질렀을거 아니야."
"너...."
무슨 소릴 해도 안들린다. 차갑고 딱딱한 미소가 걸려있는 입과 광적으로 빛나는 눈을 보며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그랬지? 내가 찾지도 않겠다, 그 더러운 몸 이때다 싶어 내줬잖아!! 대답해 이 씨발...! 개같은 년아!!!"
잡힌 머리채가 끔찍하게 아프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대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만 싶다.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올려 머리채를 틀어쥔 팔을 꾹 잡았다. 아파....! 하지만 그 뿐, 볼품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힘도 들어가지 않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쾅!!
"아....." 눈 앞이 하얗게 변한다. 머리를 잡고 있던 손에 그대로 힘이 들어가, 딱딱한 벽과 뒷통수가 강하게 부딪쳤다.
팔뚝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머리가 깨질듯 울리고, 눈에 초점이 흐릿해지며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다. "...아..으..."
메스꺼운 느낌이 올라오며 정신을 못차리는데,
갑자기 머리칼 쥔 손을 당겨 간격을 가까이 하는 우태운. 힘이 풀린 다리는 몸이 끌려가는 대로 주춤거릴 뿐이다.
"....생각났어."
낮게 깔리는 저음이 깨질듯한 머릿속을 파고든다.
흐릿한 시야와 함께 금방이라도 감길것 같은 눈을 간신히 반쯤 올려 바라보자, 무언가를 떠올린듯한 표정의 우태운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순간 눈물이 뿌옇게 고여 느릿하게 감았다 뜨니... 이번엔 그 입을 연다. ".....안재효."
".......!" 털썩...
던지듯 놓은 손에, 힘빠진 몸이 무너져내렸다.
"아...!"
쓰러지면서 무의식중에 몸을 지탱하려 손을 짚은 곳이 도자기 파편들 위였다.
그마저도 덜덜 떨리는 팔이 견디지 못해 꺾이며 팔뚝까지 조각이 박혀들어갔다. 날카롭게 찌르는 고통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금세 배어나오는 피. 하지만 지금은, 손이 문제가 아니라.
"안재효... 축구부 부장이지. 그리고 2학년 6반."
"....."
깨질듯한 머리가 이젠 윙윙거리며 사고를 방해한다.
안돼.
"그래, 그정도면 반반하겠다, 마음에 들었을거야?" 안돼. 안돼.. "네 의사가 아니라고 했지. 그쪽에서 마음대로 가입시킨거라고."
".....!"
"이번만 네가 한 말 믿을게."
안돼...
고개를 들어 힘겹게 바라보니 그 얼굴엔 잔인한 웃음이 번져있었다. "다 그쪽 책임이네. 넌 원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렇지? 믿을게, 네 말.
멍한 표정으로 간신히 올려다보는 날 비웃듯, 우태운은 천진하게 웃었다.
간단하잖아.
중얼거리며 돌아선다. "네 그 형편없는 기억력으로도 절대 잊을 수 없게 해줄게. 다시는 잊을수 없게.
완전히 고개를 돌리기 전 마주친 눈빛은 언제나처럼 노골적으로 말한다.
'기대해.'
- 도저히 잠에 들 엄두가 나질 않는다. 분명히 엉망이 되어 깰거야. 악몽은 둘째치고라도 도저히 늦춰질 생각을 안하는 심박수가 한층 불안감을 더한다. 온몸의 맥이 뛰는 느낌.
따끔거리는 팔이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으나, 차라리 지금 이게 꿈이었으면 싶다.
자잘히도 박힌 도자기 조각을 스스로 빼낼 때,
조각이 사라지면 그 전의 일까지 함께 사라질것만 같은 착각에 미친놈처럼 긁어냈다. 그 무던한 손길에 파편은 더 깊은 상처를 죽죽 그어내렸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며 그렇게 한참을 매달렸다.
피범벅이 된 팔에 멍하니 붕대를 감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닌데..... 냉랭한 웃음으로 뱉어내던 목소리들이 다시금 들려오는것 같다. '....안재효.'
'절대 잊을수 없게 해줄게.' 머리가 아프다. 사고를 아예 멈춰버리고 싶어도, 끊임없이 차오르는 온갖 생각들에 괴롭다.
머리를 부여잡고 차마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는 울음을 꺽꺽대며 삼키길 한참. 결국 날이 새어 아침이 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채 도착한 학교.
그 어느때와도 달랐던 교실에서,
나는 안재효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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