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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U - 혼자 있는 방

 

 

사랑제곱

 

 

친구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설렁탕집에 왔다. 꼴에 사람이라고 친구 하나 정도는 사귀어둔 게 다행이다 싶지만, 문제는 이 친구가 인맥이 과도하게 넓은 바람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 한 서 너명이면 몰라, 어림잡아 열명은 되어보였다. > 서로 마주보며 넘어가지도 않는 설렁탕을 맛있는 척 삼켜대느라 기 빨렸다.

반찬으로는 열무김치가 나왔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열무김치 몇 조각만. 다들 서로 눈치를 보는지, 건드리지도 않고 열심히 설렁탕만 지 연인 보듯이 쳐다보며 마시듯 먹고있다. 태초부터 설렁탕을 제일 좋아하게 설정 된 인간들도 아니면서, 누가 물어보면 ' 저는 설렁탕을 제일 좋아합니다! ' 라고 당장이라도 꼿꼿이 일어나 외칠것처럼 눈을 번뜩이며 마시고 있다. 딱히 편식은 하지 않지만 별로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설렁탕을 정말 맛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먹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보았지만 그런건 없었다.

열무김치를 살짝 베어먹었다. 고장난 마우스 휠처럼 기분이 그나마 좋아질까 느끼한 설렁탕에서 벗어나려 위로 올라가려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거꾸로 밑으로 내려갈 뿐이었다. 축 처진 표정으로 열무김치를 씹다말고 휴지 위에 뱉어냈다. 적어도 책상위에 뱉거나 하는 무지식 인증은 하지 않는다. 나는 지조있는 남성이었다.

열무김치를 참 좋아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나는 시큼한 맛때문에 중간에 먹다가 항상 인상을 쓰며 뱉어버린다. < 타인들은 어떻게 느끼는 지는 모르겠다, 열무김치 먹을 때 시지 않니? 라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으며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그래도 억지로 처음의 매콤한 맛이 그리워 자꾸만 먹었다, 뱉었다 한다. 사람들은 내게 물어보지 않고 ' 열무김치를 싫어하는 애 ' 로 단정지어 버렸다. 나는 사람들의 생각을 정정해 줄 생각이 없었다. 평생 오답이나 끌어안은 채 살아라.

 

" 어, 너도 그렇구나. "

 

아까까지만 해도 땀을 열심히 흘리며 쟁반을 나르던 또래 < 로 추정되는 > 남자 아이가 대뜸 나에게 물어왔다. 처음보는 아이의 말에 대답해줄 깡은 없었으며 대충 대답하기는 더더욱 싫어 경청하는 척이라도 했다.

 

" 나도 열무김치 좋아하는데, 신맛때문에 항상 중간에 뱉거든. "

 

옅은 동질감이 들었다.

 

" 근데 귀찮아서 아예 안 먹어. "

 

이상했다. 경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열무김치를 잘게 씹어 삼켰다. 셨다.

 

 

-

 

 

" 도와줘서 고맙다, 나머지 놈들도 와줘서 진짜 고마워. "

" 뭘, 부랄친구 좋은게 이런거지. "

 

아까 그 대뜸 들이대던 남자애에게 날 초대했던 설렁탕집 주인 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서는 감사인사를 했다. 인내하고 인내하며 설렁탕 다 마셨는데, 오는거라곤 딱히 없구나. 경수는 좋은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 초대받을 땐 메인음식부터 묻겠다고. 하긴, 설렁탕 집에 오는데 메인음식이 설렁탕인건 당연한 거겠지. 경수는 혼자 실없이 생각하다 혼자 웃었다.

 

" 혼자 웃는거에 취미있어? 뭘 그렇게 왕따같이 혼자 웃고있어. "

" 혼자 웃으면 왕따인가? "

 

발끈하여 대답했다. 아까 그 남자애였다. 하교 후인데도 사복으로 갈아입지 않아 하복 와이셔츠는 땀으로 가득 차 보였다. 사실 뽀송뽀송해보였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겨드랑이는 땀이 났었으니까.

 

" 아니. "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남자애가 넌 왜 사람 말에 대답을 안하냐며 타박했다. 내 의견에 동의를 해주었는데 더 붙일 말이 뭐 있겠는가. 경수는 개구리가 내게 사랑고백하는 것보다 더 어이가 없었다. 주인댁 아들에게 인사라도 할까 했는데, 더 여기 있다가는 이 남성의 표적이 될 것만 같아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분명 내일 왜 그냥 갔냐고 다구리 맞겠지.

 

" 여기. "

 

갑자기 그 남자애가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어쩌라는 건지, 갖고 튀기라도 해줘? 물음표를 빼다박은 표정을 지으니 남자애가 웃었다.

 

" 번호 눌러줘. "

" 싫은데. "

" 그럼 내가 번호 누를게. "

 

별 황당한 방식으로 인연을 쌓는다. 그깟거 더 거절하기 귀찮아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주겠다. 하는 생각으로 휴대폰을 건넸다.

 

" 내 번호 잘 생각안나. 번호 따인적이 없어서. "

" 멋쟁이 변백현이라고 저장한다. "

" 넌 작명센스가 그게 뭐냐. "

 

멋쟁이라니, 차라리 방가방가 햄토리나 하이루 변백현으로 하지 그랬냐. 정말 멋이 없는 멋쟁이었다.

 

" 교보고등학교? "

" 스토커? "

" 아니, 그냥 거기 다닐 것 같이 생겼어. "

" 그러는 너도 교보 고등학생이면서, 왜 남 학교 말하듯이 해. "

" 여기 오기 싫었거든. "

 

본의 아니게 싫은 학교에 온 모양인데, 그러면서 교복은 또 짜증나게 잘 어울린다. 어깨가 좁아서 어깨선이 약간 밑으로 내려간 것도 아니고, 띠꺼웠다고 하기엔 너무 어린 표현이고. 여튼 보면 마음이 텁텁한 몸매였다.

 

" 내 몸 보면서 무슨 생각해. "

" 왜, 벗기는 상상이라도 했을까봐 무섭냐. "

" 아니, 반갑지. "

 

헤헤 웃으며 말하는 남자애의 얼굴이 왠지 순정만화 속 주인공으로 보일 것만 같아서 눈을 꼭 감았다 떴다. 역시 순정만화 주인공은 아니구나. 역활 변경. ' 설렁탕 집 아들내미의 어장관리를 당해 열심히 서빙하던 인정하긴 싫지만 좀 잘생기고 교복핏 텁텁한 남자 1 ' 로.

 

" 집에 바래다줄까. "

" 무슨 초면에 집을 바래다 줘. 우리집이 어딘지 알긴 하냐. "

" 아니. "

" 그럼 됐어. "

 

초면에 집 주소를 안다는 건 무서운일이지, 그럼그럼.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는 인사 같지도 않지만 사실 인사인 인사를 했다. 뭐가 좋은지 실실 쪼개는 꼴이 참 잘생겼다. 기분 나쁘게 잘생겼다.

 

 

-

 

 

「 울 옙흔이 경뜌 뭐하세용 ~~? (이모티콘) 」9 : 31

「 되게 안 그럴것 같이 생겼는데, 그런 말투 쓰지 말아줄래.

당장 핸드폰을 던져 버리고 싶어. 」 9 : 33

 

손가락이 두꺼운 건지, 자판 간격이 좁은건지 자꾸만 오타가 나는 터에 원래 타자 속도가 느린 탓도 있지만 고작 저 두 마디로 이루어진 한 문장 보내는데에 2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변백현은 내 답장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바로 읽어냈다. 조금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근데 조금이다, 조금.

 

「 타자 되게 느리닼ㅋㅋㅋㅋㅋㅋ (이모티콘) 」 9 : 33

 

독보적으로 느린 내 타자 실력에 태클을 걸 생각이라면 뭐하러 카톡을 한 거야. 경수는 액정에 뜬 백현의 메시지를 보며 생각했다. 보낼 답은 없었다. 사람 할 말 없에 만드는 재주가 있는 바람직한 아이였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재주가 하나라도 있는가 보다. 경수는 다시 휴대폰을 키고 어렵게 느린 타자로 백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축하해. 」9 : 35

 

그러자 바로 답이 왔다.

 

「 뭘? (이모티콘) 」 9 :35

 

대답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자꾸만 괄호 이모티콘 괄호를 보내댔다. 그렇게 깜찍한 것도 아닌 단무지와 복숭아들을 왜 자꾸 보내는지.

 

「 이모티콘 보내지마. 」 9 : 38

 

읽지 않았다. 답이 없었다. 자는건가? 자든 말든 별로 상관은 없었다. 경수는 휴대폰을 충전기에 꽃아놓고 불을 껐다. 포근한 이불속이 엄마 뱃속으로의 회귀같다고 해야하나. 여튼 그랬다. 행복했다고.

 

 

-

 

 

까먹고 있었다. 오늘은 휴일이었다. 내일 학교에 가는줄만 알고 알람을 설정해두었었는데, 괜히 일찍 깼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한번 일어나면 다시 잠들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누웠다 일어났다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를 반복하다가,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왔다.

할 거 진짜 없네. 원래 혼자 생각이나 혼잣말들을 많이 하는 타입은 아닌데, 뭐 말할 사람이 있어야 하든 안하든 하지. 그냥 뭐에 홀린 사람처럼 길을 걸었다. 알람이 울렸다.

 

「 뭐해? 」 9 : 22

「 집 밖에 나왔어. 」 9 : 23

「 뭐하러? 」 9 : 23

「 집 안에 있기 싫어서. 」 9 : 24

 

딱히 할 것도 없어 딸기주스 하나를 시켜놓고 카페 창가에 앉아 사치를 즐기는 중이었다. 삼만원이면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한달 의료식비 … 로 시작하는 멘트가 잠시 떠올랐지만 이 생각은 괜시리 죄책감만 불어일으켰다.

 

「 어딘데? 나도 할거 없는데 거기갈까? 」9 : 30

 

6분후에서나 메시지가 왔다. 6분이나 흘렀다는 걸 ' 혹시 외계인이 나를 감시하고 있지 않을까? ' 하는 괜한 망상을 하느라 몰랐었던 경수지만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왜 놀라는거지? 내가 뭔데?

 

「 오던지. 」 9 : 31

「 어딘데? 」 9 : 31

 

' 별상자. 왜 그 교보중 있는데에 좌회전하면 번화가 나오잖아. 거기. ' 라고 전하고 싶었으나 경수의 타자 솜씨는 결코 주인이 컨트롤하지 못할 항목이었다. 경수가 컨트롤 하지 못할 항목에 타자 솜씨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는 지능인이라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했다.

 

" 전화 좀 떨리는데. "

" 뭐라는 거야. 나 지금 별상자야. 교보중 있는데 좌회전하면 번화가 있는데 거기 있어. "

" 오케이, 금방 간다. "

" 어. "

 

전화를 끊고 생각해봤다. 어제 만난 아이와 이렇게 일대일로 만난 적이 있는가? 단답으로 전화를 해본적은? 나름대로 길게 이어진 것만 같은 카톡을 해본 적은? 이름 앞에 별칭이 있었던 적은? 머리가 복잡했다. 머리를 싸매봤지만 결론은 얘 좀 이상한 것 같아. 였다. 원점이었다. 원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었다.

경수의 휴대폰 액정화면에 멋쟁이 변백현이 떴다. 멋쟁이 변백현이 떴다. 라니까 왠지 별빛다방이 생각났다. 커피 맛 구리던데. 어렸을 적에 아빠 손 잡고 갔었지. 추억에 잠겨 그 추억감회의 원인은 ' 멋쟁이 변백현 ' 은 잊혀져 액정엔 부재중 전화 1통이 뜰 뿐이었다.

 

「 너 왜 전화안받아? 」9 : 35

「 아, 미안. 뭘 좀 생각하느라. 」 9 : 36

「 내 생각 또 했지? 」 9 : 36

 

잠깐동안 멋쟁이 변백현을 꾹 눌러 뜨는 알림창의 마지막 항목이다 싶은 차단을 누를까 싶었지만 단순하게 아니. 라고 보내는 것으로 끝냈다.

입구의 문에서 종소리가 났다.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누가 커피라도 한 잔 훔쳐갈까 설치해놨는지, 종소리는 또 과도하게 커서 시끄러웠다. 내심 사장이 각박해보였다. 그냥 손님이 또 왔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그건 또 아니었다. 약간 숨을 몰아쉬는 백현이 앉아있는 경수를 내려보다 자리에 털썩 앉았다.

 

" 뛰어왔냐. "

" 응. "

" 왜? "

" 빨리 오고싶어서. "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별상자를 좋아하나보지. 아님 별상자 종소리를 좋아하기라도 하나? 그럼 꽝인데.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을 했다.

 

" 카페에서 뭐 해. 심심하지 않냐. "

" 그럼 넌 카페에서 뭐하려고 여기까지 뛰어왔어. "

" 그러게. "

" 그러네. "

 

바보같은 대화가 오고갔다. 결론은 ' 노래방에 가자. ' 였지만 백현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노래방은 무슨 노래방이야, 아까도 생각해봤지만 만난지 24시간도 안되는 아이와 내가 정말 싫어하는 노래방에 간다는 건, 여간 싫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현은 상처받은 척한 표정을 지었다. 신기하네.

 

" 아, 가자. "

" 싫어. "

" 그래. "

 

포기가 빨랐다. 웃음이 나 잠깐 미소를 지었지만 금새 다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주제답지 않게 남에게 웃는 걸 보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꼴에 포커페이스였다. 백현은 턱을 괴고 내 면상이 뚫어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처럼 날 쳐다보았다.

 

" 왜? "

" 그냥. "

" 그냥 왜? "

" 생각을 해봤는데. "

 

얘도 생각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동안 들었다.

 

" 너 좀 잘생긴 것 같다? "

" 뭐? "

" 이런 말 처음해본다. 생각도 처음해봤어. "

" 나도 그런 말 처음 듣는데. "

 

서로 기우뚱한 모습이 참으로 웃겼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잘생기긴 했지, 눈코입 다 있으니 말이다. 얼굴이 대빵만하게 큰 것도 아니다. 이런 부분에서는 잘생겼다고 할 수 있다. 서로 아무 말 없었다. 쌍방과실이구나. 무턱대고 알지도 못하는 애 부른 내 잘못, 무턱대고 알지도 못하는 애 부름에 달려온 얘 잘못.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 더 크다.

 

" 아, 할거 더럽게 없네. "

" 나랑 있으면 할 게 샘솟아 오를 줄 알았어? "

" 아니. "

" 그럼 됐어. "

 

아니, 그럼 됐어. 라는 말의 대화 패턴을 참으로 자주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대화하니 상관은 없다. 백현의 재촉에 못이겨 오락실이라도 가기로 했다. 왠 오락실이냐 하지만, 꽤 수도권에서 먼 지역이라 아직 00상회 같은 건물이 많이 남아있다.

뉴스같은데에 많이 나올만한 으슥한 동네로 들어와야 겨우 보이는 좁은 오락실이었지만, 어렸을 때 자주 온 까닭도 있고 서로 가본 곳중에 거의 유일하게 겹치는 곳이었으므로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다. ~ 려고 했다. 로 끝나는 것은 문이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코난 주인공처럼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백현은 제법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나랑 그렇게 오락이 하고 싶었니? 하고 물으면 왠지 ' 응! ' 이라며 사람 무안하게 만들것 같다. 하나 더 찾았다. 변백현 재주.

 

 "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이 왜 이렇게 지났냐. "

 

사실이었다. 아무생각없이 나와 아무생각없이 불렀지만 시간은 우릴 위해 멈추지 않는다. 딱히 멈추라고 원한 것도 아니지만은. 경수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 더 놀고싶어? "

" 근데 놀 곳이 없잖아. "

" 영화보고 싶어. "

" 영화? "

 

백현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꽃도 아닌 주제에 꽃 같았다.

 

 

-

 

영화관은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이 시간에 영화를 자주보러 오지는 않았지만 한적한 동네라 사람이 거의 없을 줄 알았다. 물론 사람이 많아야 활기차긴하다. 영화관 건물주의 지갑사정까지 걱정하는 참으로도 배려심 깊고 깊은 경수였다.

 

" 뭐 보지. "

" 말레피센트? "

" 그거 재밌어? "

" 아님 엑스맨. "

 

백현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라는 말을 들은 듯 인생 최대의 고민을 하는 듯, 세상 고민을 다 떠 안은 듯한 표정을 짓고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백현의 눈이 굴러떨어질 것만 같아 말레피센트를 보자고 했다. 백현은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바로 수긍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백현은 고개를 박고 졸았다. 영화 표값이 아까워서라도 꾸역꾸역 보던 경수도 꾸벅꾸벅 잠이 오기 시작했지만, 억지로 백현을 깨우다가 서로 또 꾸벅꾸벅, 꾸역꾸역. 하다 결국 영화는 끝이 났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 아, 재밌었다! ' 보다 ' 아, 잘 잤다! ' 라는 말이 나오는 서로를 보며 피식거렸다.

 

" 이럴거면 영화보러 왜 왔지. "

" 재밌었는데? "

" 뻥. 하나도 안 봤으면서. "

" 들킴. "

 

마지막 마디의 백현은 굉장히 짖궃은 장난꾸러기 같았다. 호탕하게 웃는 백현에게 장단을 맞춰주며 허허. 하며 웃다가 시계를 보고선, ' 오늘 재밌었다. 다음에 봐. ' 라는 친구사이 기본 멘트를 날리려고 했던 찰나였다.

 

" 내일은 뭐하고 놀 예정이신가? "

" 집에서 빈둥거릴 예정이십니다. "

" 너네 집 놀러가도 돼? "

 

우리 집에 온다니. 만난지 25시간 된 아이에게 내 금단의 영역을 넘게한다는 건 허락할 수 없었다. 도무지. 교복 와이셔츠 깃을 세우는 것 마냥 경수는 거북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했다. 백현은 또 상처받은 척한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미안했다. 또 하나의 재주를 찾았다.

 

" 그럼 내가 너네 집 갈게. "

" 댓츠 굿 아이디어. "

" 영어 쓰지마. "

" 응. "

 

또 빠르게 수긍하는 백현을 보며 경수는 미소지었다. 가끔은 일상에서의 도피가 필요하다. 라고 생각하는 경수였다.

 

굳이 괜찮다는데 집 앞까지 마중받았다. 내가 여자냐고 집에 들어가라고 한사코 거절하는 경수를 질질 끌어다 방향을 묻고, 틀리고, 돌아갔다. 아니 좌회전을 하라는데 왜 오른쪽으로 가냐? 경수는 궁시렁대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올라와 창문을 살짝 염탐해봤는데, 아직도 백현이 서있었다. 스토커냐. 빨리 들어가라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아름답지 않아서 소음공해로 신고받을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그냥 메시지를 보냈다.

 

「 들어가. 」 10 : 32

 

 

-

 

 

여태 친구와 있었다는 말에 엄마가 새삼 놀라워했던 게 눈에 어른거린다. 내가 그렇게 친구가 없었다. 나름 한두명의 절친한 친구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걔네 둘에게 신장을 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얄팍한 친구관계에 내심 질린 경수는 괜시리 비누를 던졌다가 뭉개진 비누를 보며 후회했다. 눌러서 원래대로 만드려고 했는데 더 뭉개졌다. 기분이 나빴다.

머리를 감는데 자꾸만 콧물이 나왔다. 하도 거리를 활보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저 위에 있는 휴지를 가져오기 귀찮아 물에 풀어버렸는데 코감기인가? 할 정도로 코가 많이 나왔다. 하지만 일찍 코감기라고 자부해버리면 내 코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날 까봐 ' 코감기구나. ' 하는 말은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마음이 코에게 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머리를 말리다가 드라이어에 머리를 박았다. 왠지 변백현이 제 자신을 놀리려고 멀리서 원격조정하는 것 같아 괜히 허공에 엿을 날렸다. 혹시라도 신이 착각하면 어쩌지. 나에게 벌을 주시려나? 하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괜히 또 해봤다.

 

이불속은 어제보다 더 포근하고 행복하게했다.

 

 

-

 

" 뭘 그렇게 사왔어. "

" 집들이 하는 기분이라, 뭔가 손이 비어있으면 엄청 미안할 것만 같아서. 근데 생각보다 미안하지 않아서 후회되네. "

" 용돈 낭비했지, 너. "

" 응. "

 

백현은 경수가 제 사비로 사온 < 회사 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여튼 사비였다. > 휴지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 오늘 아빠 늦으신대. "

" 아, 그래. "

" 편하게 있어. "

 

전혀 편하지가 않았다. 남의 집에 놀러간 적이 처음이라 …. 라고 말하면 백현이 비웃을 것 같아서 난 친구집 100번도 더 와봤다! 하는 포스를 연기하며 소파에 나름 편 < 한 척 > 하게 앉았다. 백현은 점심을 먹었냐고 물었다.

 

" 먹었어. "

" 근데 난 안 먹었어. 점심 차릴게. "

 

그럴거면 왜 물어봤냐고. 괜히 또 나오기 시작하는 콧물에 제가 사온 휴지를 써 닦아냈다.

 

백현은 능숙한 듯 콩나물무침 등 < 대부분이 어머니가 해둔것이겠지만 > 여러 풀반찬과 밥을 식탁위에 올렸다.

 

" 미안, 장을 안봐와서. 반찬은 없는데 그냥 먹어. "

" 배 안고파서 괜찮아. "

" 한 숟갈 먹더라도 든든하고 맛있는 밥을 먹어야지. "

" 그렇구나. "

 

경수도 쉽게 수긍하며 콩나물무침을 먹었다. 열무김치를 먹을때는 늘 그랬듯이 중간에 뱉어버렸다. 백현도 그랬다. 식탁의 위에는 휴지 위 쌓인 열무김치가 가득했다. 갑작스럽게 재채기가 나와 백현의 얼굴에 밥을 뱉을뻔했다. 다행히 사고는 면했지만 콧물이 주욱 나왔다.

 

" 감기 걸렸어? "

 

휴지를 찾던 경수가 코맹맹이인 목소리로 응. 이라고 대답하자 백현이 황급히 휴지를 건네주더니 지갑을 가지고 현관으로 뛰어갔다. 어딜가는거냐고 소릴 질러봤지만, 백현이 나간 문은 이미 닫혀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금방 백현은 돌아왔고, 양팔에 ' 수만약국 ' 이라는 대문짝만한 마크가 새겨져있는 비닐봉지를 싸들고 있었다.

 

" 이게 다 뭐야? "

" 빨리 먹어! 물 갖다 줄게. "

 

다급한 백현에 비해 경수는 차분하게 비닐봉지속의 내용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 이건 목감기 약. 이것도 목감기 약. 이건 아기전용 감기시럽. "

" 빨리 먹으라니까? "

" 난 코감긴데 왜 목감기 약만 사왔어. "

" 그거나, 그거나! "

" 파스랑 마데카솔은? 비타 500은 왜 사왔어 또? "

 

경수는 빨리 환불해오라며 백현에게 다시 비닐봉지를 선사하였다. 백현은 씩씩거리며 다시 현관으로 뛰어갔다. 마데카솔은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가지기로 했다. 다시 돌아온 백현은 뺨에 긁힌 상처가 있었다. 살짝 놀라 뭐냐고 물으니, 뛰어오다가 넘어졌다고 한다. 애도 아니고 왜 뛰어와. 마침 챙겨놓은 마데카솔을 백현에게 발라주었다.

 

" 역시, 선견지명이네. "

" 더 칭찬해보시지. "

" 멋지고. "

" 또. "

" 전지전능하신 도경수님. "

" 그 정도는 아니야. "

" 왜 이 정도는 되는데 그 정도는 아니야? "

" 무슨 소리 하는거야. "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았다. 허탈하지 않았다. 재밌었다.

 

또 굳이 백현은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한다. 또 마지못해 집앞까지 끌려왔다. 백현은 또, 또 길을 틀렸다. 그 쪽이 아니라고 말해도 저번에 이 쪽으로 온게 확실하다며 반대쪽으로 자꾸만 돌아왔다. 길치인 것을 확신한다. 10분 내에 충분히 도착 할 거리를 30분이 아슬아슬하게 왔다는게 말이나 돼? 경수는 또 다시 툴툴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몰래 본 창문밖에는 백현이 서있었다.

 

싫지 않은 데자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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