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너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 밤새 비가 내렸는지 열어놓은 창문 새로 눅눅한 흙냄새가 났다. 이불을 덮고 자지 않았던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탁상을 열어 항우울제 몇알을 삼켰다. 그리곤 침대에 걸터앉아 천장을 보는데, 네 생각이 많이 났다. 이 침대에서 뒹굴기도 했고, 풋풋한 사랑고백을 받기도 했었는데. 하얗던 천장이 누렇게 바랜것처럼, 너도 우리 사이에 변화를 느꼈던 걸까. 위태롭다는 생각은 했다. 또, 머지않아 맞게 될 너와의 이별도 예상했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와 부쩍 잦아진 통화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통보받은 너의 이별에 나는 덤덤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는데, 가능한 한 빠른게 좋겠지. 너도, 너의 애인에게도. 나는 부러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한 뒤, 재빨리 끊어버렸다. 그 이상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어떻게 돼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너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끊어버렸다.
볼을 타고 귓가로 흘러내린 눈물이 차가웠다. 정말 이러면 안되는데. 너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어선 안 됐다. 황급히 눈물을 닦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1시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나는 부러 느릿하게 준비를 했다. 다른 여자와 환하게 웃고 있는 너를 보기는 싫었다. 그저, 식이 끝날 때쯤 가서 조용히 인사만 해주고 오면 되는 거다. 수도 꼭지로 흘러나오는 물이 차가웠지만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
일부러 늦게 준비를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늦어버린 시간에 서둘러 차를 잡아탔다. 너에게 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었다. 그저 이런 사람이 있었다, 네가 이런 애가 연애를 했었다. 그 정도만 각인시켜 주고 싶었다.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게 해주려는 유치한 발상이기도 했다. 나는 예식장을 향하는 동안, 애꿎은 손톱만 뜯었다. 너는 내가 손톱을 뜯는 것을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식장에 도착했지만 택시에서 내리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28살이나 먹고도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엉엉 울고 발버둥 치면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올까. 가망이 없었지만 나는 조금의 기대를 걸었다. 빨리 내리라는 택시기사의 촉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궁지에 몰리면 물 불 안가린다더니, 딱 내 꼴이었다. 어리석은 상상이나 하고 있는 꼴이라니. 고개를 내저으며 택시에서 내리자 커다란 건물이 눈앞에 들어왔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 도경수??"
낯익은 목소리였다. 낮은 저음에 맞지않는 활기찬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녀석이었다. 빨간머리에 정장을 차려입은 찬열은, 아이돌이 됐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티비에서 본 것 같기도 했다.
"와 진짜 오랜만이다.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냐?"
"....어..좀 그렇게 됐어."
"근데 진짜 한결같네. 키도 그렇고."
"너도 여전하네. 장난 치는거 보니까."
"어디 가는 길이었어?"
"어...어?"
바보같이 되물었다. 녀석은 예식장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나는 설마, 설마 하며 물었다.
"혹시. 끝났어?"
"아 결혼식? 왜 안 오나 했다. 그거야 방금 끝났지."
"뭐??"
"당연히 끝났지. 지금이 몇시.."
인사도 못한 채 그대로 예식장을 뛰어 들어갔다. 설마.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었다. 꼭 와 달라던 백현의 말이 머릿속에서 웅웅거렸다. 제발. 백현아.
".....아."
변백현. 눈 앞으로 걸어오는 변백현이 보였다. 애인에게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변백현이. 진심으로 사랑스럽다는 듯한 눈길에 마음이 아렸다.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변백현이 나를 발견했다. 곧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너..."
"오빠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
나는 왠지모를 위압감에 뒷걸음질 쳤다. 내가 도망칠것이란 걸 알아챈 변백현이 잡았던 손을 풀고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뒤돌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등 뒤로 다급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변백현이 가까워졌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붙잡혔다.
"너 어디가."
"..."
"너 꼭 오랬잖아."
"....갈게."
"끝까지 넌.."
"놔줘."
"내 말 좀 들어!!!"
예식장 안으로 녀석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럴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너에게 화를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너는 왜 …
"따라와. 할 말 있어."
"..왜? 잘 웃고 다니더만. 또 할말이 있어?"
"야!! 그건.."
"너 나랑 헤어지고 나서 바로 결혼한다고 청첩장 날렸지. 너 진짜 재수 없었어. 알아?"
"....야. 그게 여기서 왜 나와."
"나 진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온갖 애란 애는 다 먹었어. 근데 너..."
입술이 닿았다. 뒷목을 잡은 변백현의 손이 뜨거웠다. 주변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벌인 행동이었다. 나는 화가 난 나머지 녀석의 몸을 거세게 밀었다. 변백현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답지 않게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제발..백현아."
"...."
"잘 있어. 행복하게 지내."
"..."
입술을 닦고 빠른걸음으로 예식장 안을 빠져나왔다. 무슨 생각으로 입술을 갖다댄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지, 입을 막으려고? 우리는 헤어진 사이이다. 그런건 전에나 가능했던 이야기였다. 아니면 다른 … 나는 복잡해진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냥 빨리 가서 쉬고싶은 마음만 들었다. 눈 앞이 빙빙 돈다고 생각 할때 쯤, 나는 힘없이 쓰러졌다. 등 뒤로 변백현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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