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아무렇게나 던져둔 핸드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린다. ‘내일 뭐해?’ 그녀와 어느덧 4년째 교재 중인 남자의 메시지이다. 여자는 빛이 들어온 화면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핸드폰을 덮어버린다. 그러다가도 문자에 답을 하지 못한 게 끝내 마음에 걸렸는지 애써 웃으며 답장을 한다. ‘내일 집에 있을 예정인데, 데이트할까?’ 화면 밖의 남자는 애써 힘들게 짓는 여자의 미소를 볼 리 만무한데 말이다.
나와 정호석의 관계를 정의하자면 ‘연인’ 이라는 단어로 우리를 묶을 수 있겠다. 호석은 나와 4년째 연애 중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또한 날 사랑하냐고? 글쎄, 아마 처음부터 날 사랑한 적이 없을 것이다. 처음엔 그가 날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날 사랑한다 말하는 그의 눈은 텅 비어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빌어먹을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내가 정호석을 아직도 사랑하니까. 나 혼자 그를 사랑하니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어쩌다 사랑하게 된 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의 온도가 좋았다고 답할 것이다. 내가 이리저리 치였던 하루, 날 안아주던 호석의 품의 온도가 좋았다. 강의실에서 교수님의 손가락질을 받을 때, 내 손목을 잡고 강의실 밖으로 같이 나가주던 그의 손의 온도가 좋았다. 내가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날, 대답 대신 내 입술로 다가오던 그의 입술의 온도가 좋았다. 그의 따뜻함을 난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의 온도가 변하지 않은 지금, 난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온도는 중탕을 한 초콜릿처럼 달고 따뜻해서 사람을 울리기에도 웃게 만들기에도 적합하니까.
다시 한 번 핸드폰이 짧게 울린다.
“내일 저녁 같이 먹자.”
이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입가에서 피어나는 미소를 감출 수 없다. 내일 저녁에는 그가 날 사랑한다는 눈으로 봐줄 것만 같아서, 내일이 되면 이제야 주는 사랑이 아닌 주고 받는 사랑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이런 헛된 희망을 품은 지 4년 째, 정호석은 아직도 날 사랑하지 않는다. 그의 입은 날 사랑한다고 속삭이지만 그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한 번도 내게 마음을 내어준 적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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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석이를 만날 생각에 종일 얼마나 들뜨면서도 우울했는지 모르겠다. 널 만난다는 생각에 들떴지만 너의 공허한 눈을 보게 되면 난 오늘 네 눈을 피해야할까, 아무렇지 않은 듯 너의 눈을 쳐다보아야 하나. 별 사소한 것들이 고민으로 다가왔다.
저번 데이트 때, 네가 사준 옷으로 갈아입고, 네가 좋아하는 머리로 드라이도 마쳤다. 진한 화장을 싫어하는 너이기에 최대한 안 꾸민 듯 꾸민 화장을 하니 어느덧 약속 시간에 임박했다. 어릴 때부터 누군가와의 약속을 깨는 걸 싫어하던 너이기에 늦을 것 같다는 문자 한 통을 보내고 서둘러 택시를 탔다.
‘다치지 말고, 천천히 와.’
이러니까 내가 널 못 포기하지 정호석. 이렇게 너의 특유의 온도로 날 녹이는 너인데, 내가 널 어떻게 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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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었어, 우리 데이트 진짜 오랜만이다 여주야”
저녁을 함께 먹은 뒤, 오늘은 걸어가고 싶다는 내 말에 호석이가 버스 정류장 앞까지 날 데려다줬다. 보고 싶다는 저 말도 거짓일까. 아님 사랑은 안 하지만 정말 보고 싶긴 했던 걸까. 오늘도 호석이의 눈을 오래 쳐다보지 못했다. 우린 4년째 연애 중인 연인임에도 서로의 선이 존재하고, 아직 서로가 불편하다. 남들은 이걸 긍정적인 의미로는 아직까지도 서로를 보면 설레이는 콩깍지라고 하던데. 난 이것을 ‘갑과 을의 관계 ’라고 정의한다. 네가 날 놓으면 끝날 관계, 설령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아 헤어지자고 하더라도 넌 미련 없을 그런 관계. 우리의 관계에서 정호석, 너는 철저한 갑이고 난 아마 을도 아닌 병이나 정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러게. 자주 만나면 좋을 텐데. 요즘도 회사 일로 바빠?”
하나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호석이는 J그룹 손자이다. 아직 할아버지가 회사를 경영하고 계시지만 곧 장남인 호석이의 아버지께서 경영을 물려받을 것이고, 호석이는 회사에서 높은 직급을 맡게 되겠지. 호석이는 명목상 인턴으로 J그룹 마케팅부에 있지만 그가 어찌 일반 인턴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평일에는 근무하느라, 주말에는 후계자 수업을 듣느라 바쁜 그에게 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나 또한 V그룹 인턴으로 취직하긴 했지만 고작 인턴이 미래 경영자에게 줄 도움이 뭐가 있겠는가. 난 그저 그가 날 짐으로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해 홀로 시간을 더 보내고, 연락을 줄이고, 그와 덜 만나는 것. 그것밖에 하지 못한다.
“나야 매번 그렇지 뭐. 얼른 시간 나서 너랑 종일 데이트하고 싶다.”
“버스 왔네, 얼른 가서 연락해 여주야.”
날 사랑한다는 듯한 저 말과 온도 그리고 내게만 보여주는 너의 그 예쁜 보조개까지. 결국 난 오늘도 너에게 졌다. 날 사랑하지 않는 너를 사랑한다. 그것도 지독하게. 오늘 같은 날 비가 내리면 딱일 텐데. 내가 버스를 타서 창문 밖을 바라보자 넌 그 자리 그대로 날 보며 웃고 있다. 그렇지, 이게 너와 내 사이의 거리인 거지, 호석아. 내가 너보다 앞에서 가든 뒤에서 가든 넌 항상 그 자리이니 결국 내가 돌고 돌아 힘들게 널 찾아오잖아. 마치 네가 돌아올 곳은 여기라며 내게 속삭이는 거잖아. 사랑이 원래 이런 거라면 난 그만하고 싶어.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도중 이대로 집에 들어가게 되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제 나도 정신 차려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우울해할 수는 없지 않은가. 힘없이 걷던 발걸음의 행선지를 정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어디든 가고 싶다, 네가 생각나지 않고 혼자 우울하지 않을 곳이면 어디든지.
결국 정처없이 걷던 내 발걸음이 멈춘 곳은 분위기 있는 바(Bar)였다. 쓸쓸하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이 곳. 입구 근처에 걸린 'Luce in Altis' 라는 네온사인이 밝게 빛난다.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라.’ 정호석한테 어울리는 말이네. 가게 주변을 둘러보니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자리에 앉아 익숙한 칵테일을 시키고 각각 홀로 온 사람들을 쳐다봤다. 이 술집이 쓸쓸한 느낌이 들었던 건 내가 쓸쓸하기 때문일까 아님 저기 있는 사람들이 외롭기 때문일까. 실연을 당한 것 같은 여성, 영문 없이 우는 남자 그리고 나. 저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그저 하루에 지친 사람으로 보일까, 아님 애인에게서 사랑 받지 못하는 여자로 보일까.
문득 이 술집이 익숙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이곳 또한 호석과의 데이트 중 왔던 곳이다. 왜 자꾸 내 주변에는 너만 가득한 걸까. 이럴수록 너에게서 도망치기가 힘든데. 연인이 오기엔 이질적인 분위기를 하고 있던 이 술집이 기억난다. 네가 날 이곳에 데려왔던 이유도 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님 너 때문에 혼자 청승을 떨 날 예측했기 때문일까. 술을 마신 상태에서 우울한 생각까지 겹치니 코도 찡해지고 눈가가 붉어지는 느낌이 든다. 이런 느낌 정말 최악인데. 바깥 공기라도 좀 마시면 나을까.
가게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가을 밤공기가 날 감싼다. 인위적인 따뜻함보단 차라리 차가움이 낫기에. 비스듬히 건물 외벽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서울의 밤이 야속하기만 하다. 차라리 별이라도 밝았으면 위로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한숨을 내쉬니 뿌연 입김이 생긴다. 오늘도 난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술 기운이 날 덮치는 것만 같다.
“가을 밤공기는 차가워요. 이렇게 밖에 있으면 감기 걸릴지도 모르고요.”
이상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냥 주변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겠거니 싶어 남자를 외면했다. 날 언제 봤다고 걱정을 하는 건지 싶기도 했고 더 이상 누군가와의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싶었다. 그러나 따뜻함을 외면하진 못했다.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에 소중히 넣어두었던 핫팩을 내 손에 쥐어주는 것을 멍하니 받았다.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따뜻함이 어색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지쳐 있는 지금, 남자를 잡고 어느 헛소리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변에 참 관심이 많은가봐요. 전 그럴 여유가 없어서요.’
따뜻함을 원했던 마음과 달랐던 각지고 모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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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에 온다고 했는데 마음에 드는 움짤이 없어서 계속 찾다가 늦어졌네요 죄송해요
여기서 호석은 여주에게 마음이 없으니 호석은 인위적인 따듯함에 해당돼요! 그러니 여주는 인위적인 따듯함보단 차가움이 낫다며 술집에서 나간 거고요
정국이가 남주이길 바라는 분들이 아마 생길 것 같은데 작가 또한 남주는 아직 미정입니다! '역하렘'물이니 다른 남주들 매력도 느껴봐요 우리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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