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뭡니까. 이게."
보면 몰라?
"사직서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변백현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 번진다.
"또 무슨 깜찍한 짓입니까?"
웃음기 섞인 변백현 목소리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사직서요."
딱딱한 말투로 다시 한번 말하고나자 변백현의 입가가 살짝 굳는다. 그래도 여전히 웃고있는 표정이다. 이제야 읽을 맘이 생긴건지 집어던지다싶이 내려논 사직서를 가져간다.
"사아-지익-서."
"..."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그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 미친 씨발 팀장.
사직서를 읽어내려가면서도 재밌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변백현을 보다 못해 변백현의 책상을 내려쳤다.
움찔하며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다시 내눈을 보고 씩 웃는다. 질린다 진짜.
"왜? 사직서 읽어달래서 읽고있는데."
"..오늘 짐 다 빼고 나가겠습니다."
더 이상 말도 섞기 싫어 변백현을 한번 째리고 나가려는데 탐장실 문이 열린다. 변백현의 여비서. 들어와서 날 살짝 흘려보곤 변백현을 향해 고갤 숙인다.
"팀장님 회의있습니다."
"여주야 진짜 나가게?"
"팀장님 회의-"
"내가 어떻게 널 대려온건데."
"이번에도 안나오시면 회장님이-"
"너 이렇게 나가면 또 어디 취직한다고, 이 회사보다 좋은 회사가 어딨어. 응?"
내가 뭐 서운하게 했어? 고칠까?
이어지는 일방적인 말에 말문이 다 막힌다. 자기할말만 해대고있는 변백현은 둘째치고 자기말 씹힌게 무안했던지 여비서는 날 흘겨보고있었다.
아 머리야... 시발 맘대로 회사도 못나가나.
점점 더 굳어지는 내 표정을 보고 벌떡 일어난 변백현이 날향해 다가왔다. 흠칫한 내가 뒤로 물러서자 여비서가 변백현의 셔츠끝을 살짝 붙잡았다.
"팀장님."
"뭐야."
"회장님이 이번 회의는 꼭 참석하시라고-"
"어딜잡은거야 지금."
한순간에 굳어진 변백현의 목소리에 여비서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변백현은 항상 이런식이다. 자기생각 밖에 할 줄 모르는 어린애.
더 씨발스러운건
"자기야아..어제 좀 심하게 달렸다고 사직서를 들고오면 어떡해..오늘은 살살 할게. 응?"
잔머리가 존나게 잘돌아간다는거. 이제 저 비서는 나가서 변백현과 나에 대한 되도 않는 소문을 만들어 떠들고 다닐꺼다. 그럼 난 이 회사를 나가서도 여직원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두고두고 씹히겠지. 변백현이 바라는건 그걸 빌미로 날 잡아두려는거고. 재밌네 아주.
어느새 다가온 변백현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아까와 다른 목소리 다른 말투. 날 끌어안는 변백현의 팔을 밀쳐내려는데
쾅!
화난 여비서가 빨개진얼굴을 하고 먼저 팀장실을 나갔다. 시발 이번엔 진짜 좆됬다. 기대있는 변백현을 밀치고 노려보자 아무 표정없는 얼굴을 한 변백현이 닫힌 문을 보고
"미친년이 어디다 화풀이야.."
입맛을 다시고는 다시 날 보곤 굳힌표정을 풀고 씩- 웃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같은 얼굴로.
"미친새끼야. 누가 누구랑 달려?"
"사직서 낸게 잘못이지."
"저사람이 이제 소문 다 낼거아니야! 너랑 나랑 그렇고 그런사이라고 소문 다 낼거 아냐!!"
시발 누가 누구랑 뭘해? 오늘은 살살한다고? 미친새끼 진짜. 눈물고인 눈으로 변백현을 쏘아보며 말하자 어깰 으쓱한 변백현이 책상위에 걸터앉곤 주머닐 뒤져 담배를 꺼낸다.
"잘 타일러서 소문 안나게 할게."
"..."
"방금 낸 사직서 없던거로 한다는 조건하에."
"..미친새끼.."
"너 이대로 나가면 나랑 놀아났다는 소문 나는거야."
"하."
"그거 막아줄테니까 회사 나가지마라. 응?"
애초에 그 소문의 실마리를 누가 제공한건데 어?
더이상 말할 힘도 없어 뒤를 돌아 그대로 팀장실을 빠져나왔다.
자리에 가서 털썩 앉으니 옆에 앉은 여사원이 의자를 쭉 빼고 다가온다.
"뭐래? 사직서 잘내고왔어?"
"...아니요."
"어머, 왜? 팀장님은 왜 자기한테만 그러는지 모르겠어."
"...하..하 그러게요."
"난 그럼 보고서 좀 팀장님한테 넘기고 와야겠다."
짧은 치마를 더 위로 끌어올린 여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어깨를 두드렸다. 앞에선 나와 함께 팀장님 뭐다 뭐다 욕해주는척 하지만 변팀장 앞에서는 꼬리치느라 바쁜인물이다. 하얀다릴 들어내고 팀장실로 들어가는 여사원을 보며 병신같은 생각을 했다.
진짜 저 여사원이 변백현을 꼬셔서 변백현이 날 놔줬으면 좋겠다.
하는 진짜 병신같은 생각.
-
고등학교때 변백현은 퍽 순수한애였다. 멘토링이다 뭐다 공부 못하는 애들을 공부잘하는 애들한테 한명씩 붙여놓는게 있었는데 그때 변백현이랑 짝이 됐었다.
'너가 반일등이라면서? 난 반꼴등. 그래서 너랑 나랑 짝.'
자존심도 안상하는지 킥킥대며 책상에 앉는 변백현을 보곤 고갤 저었다. 하필 맡아도 이렇게 쌩양아치를 맡게된거지 하면서,
외모만 보고 변백현을 양아치라 평가한건 내 오판이였다.
의외로 변백현은 열심히 공부 했다. 나랑 짝이 된이후로 학교도 일찍왔으며 내가 말하는것에 하나하나 다 귀를 기울였다. 내가 쪽지시험을 내주면 가끔은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하다가기도 했다. 난 내손으로 문제아 하나를 개선시켰다는거에 큰 뿌듯함을 가졌었고 다음 시험에서 변백현은 반 10등을 했다.
한마디로 멘토링이 필요없어진거다.
'이제 백현이 성적도 올랐으니까 자리 다시 바꿔야지.'
선생님의 말에 변백현은 넋나간 얼굴을 했다. 나도 그동안 나름 정이 들어서 아쉽기는 했다만 아쉬운게 끝이였다.
변백현은 선생님이 돌아가자마자 말없이 책상에 업드리더니수업이 끝날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수업시간 한참 교과서만 노려보던 변백현이 교과서에 샤프로 찍찍 무언갈 써갈기곤 내쪽으로 책을 밀었다.
-사귈래?
메모를 보고 벙찐 내얼굴을 보곤 변백현은 긴장된다는듯이 쥐고있던 샤프만 만지작거렸다. 그니까 그동안 변백현이 공부를 열심히 한건 순전히 나때문이였다는거다.
'지금 114쪽이야. 너 혼자 다른곳 폈잖아.'
내말에 변백현이 힘빠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공부 잘하는사람이 좋아.'
어떻게 거절을 해야할지 몰라 그냥 내뱉은 말이였다. 혹시나 나한테 차였다고 다시 공부포기할까봐 그냥 한말.
내말에 변백현은 그대로 교과서를 치우고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짝을 바꾸고 나선 따로 살갑게 굴일도 없었고 학년이 오르고나선 반이 갈라져서 얼굴볼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변백현의 얼굴을 본건 졸업식에서였다. 졸업생대표. 당연히 내가 있을거라 생각한 자리에 변백현이 서있었다.
처음으로 전교일등 자리를 뺏겼다.
-
"퇴근하세요. 다들"
회의를 마치고온 변백현의 말에 다들 가방을 들고 일어나선 삼삼오오 모여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여주씨 아까 밥 못먹었지? 밥 사줄게 먹고가."
웃으며 손짓하는 박대리의 말에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점심엔 변백현때문에 도저히 밥먹을 상태가 아니여서 굶었다. 배가 살짝 고픈것도 같아 잘됐다 하고 박대리에게 웃어보이며 가방을 들고 일어나는데
툭툭-
변백현이 구두코로 바닥을 툭툭 친다. 힐끗 변백현을 보자 인상을 쓰곤 손을 까딱까딱 해보인다.
시발 괜히 봤다. 못본척 고갤돌리고 찬열씨 가요, 하며 박대리의 등을 떠미는데
"박찬열씨."
"네?"
이번엔 박대리를 불러세운다. 우리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변백현이 날 쓱 내려다보곤 다시 박찬열을 바라본다.
"보고서 오늘까지였던걸로 기억하는데."
"네? 내일까지로 알고있는."
"오늘까지."
"..."
"오늘까지였던걸로 기억하는데."
"..."
"아닙니까?"
"...쓰고 가겠습니다."
그제서야 만족한듯이 고갤 끄덕이곤 날보고 씩 웃는다. 그럼 박찬열씨 수고해주세요. 하면서.
"여주씨 미안해. 밥은 내일살게."
아무것도 모르는 박대리의 말에 괜찮다며 웃어보이려는데
"..내일도 야근하고싶어서 저러나-"
변백현이 작은 말로.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 말에 변백현을 휙 째려보고 사무실을 나와 엘레베이터를 타자 변백현이 여유로운 얼굴로 따라나온다.
"밥안드셨습니까?"
엘리베이터문이 닫히자 변백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온다.
"알바예요?"
눈도 안마주치고 대답하자 픽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이 엘레베이터는 평소엔 터질것같더니 오늘은 사람한명 안타나.
"찬열씨가 사드리기로 한 식사 제가 대신 사도 됩니까?"
"싫은데요."
"사주고싶은데요."
"싫은데요."
짧은 대답에 변백현 눈꼬리가 눈에 띄게 밑으로쳐진다. 사주고싶은데에-
"공부 잘하는사람 좋대서 좆빠지게 공부했더니."
"..."
"눈길도 안주네요. 존나 서럽게."
아니 그니까 너가 공부한게 내 알바냐고. 그리고 그게 언제적얘기야!? 차마 쏟아내진못하고 내가 지을 수있는 표정중 최대한 띄꺼울만한 표정을 짓고 변백현을 올려다보자 변백현이 씩 웃고 날 확 끌어 안는다. 밀어낼틈도 없이,
"미친!!!야 안놔?"
"어, 이제 막 말도 깝니까?"
"뭐하는거야 진짜!!"
"작업걸고있잖아, 나 좀 봐달라고."
"누가 작업을 이딴식으로 거는데!"
"그럼 어떻게 걸어야 넘어옵니까?"
해맑은 변백현의 말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아니 항상 지랄맞은새끼긴했지만 오늘은 더 심한거같다.
"놔라. 응?"
"밥먹으러간다고 약속하면,"
"시발, 놓으라고!!!!!"
짜증가득한 얼굴로 변백현의 몸을 힘껏 밀어내는데 언제 도착한건지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반동으로 열린 엘레베이터문 밖으로 넘어가버렸다. 존나 보기좋게.
"여주씨...!"
놀란표정의 변백현이 보이고 곧 엉덩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
온몸에 퍼지는 얼얼함에 인상을 쓰고 있자 엘레베이터 밖으로 뛰어나온 변백현이 내 손을 잡아 일으킨다. 병주고 약주냐 지금, 누구때매 넘어진건데!
짜증나는 맘에 눈물이라도 나올지경이다. 시발 자존심상해. 짜증나. 눈을 벅벅닦고 노려보자 변백현이 당황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날 마주본다.
"너 지금 뭐하는건데 진짜!"
"..여주씨,"
"좋아한다면서 왜 자꾸 괴롭혀!"
"여주씨 지금,"
"짜증나, 너 짜증나!!"
소리지르며 변백현의 손을 뿌리치는데 변백현이 내 손을 잡더니,
"뒤에, 이 병신아."
하곤 돌려세운다.
휙돌아간 시야엔
시발..
"둘이 사내연애였어?"
의외라는 표정으로 우릴 번갈아보는 도경수가 있다.
하..
내가 내일은 진짜 사직서내고 만다.
+
소금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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