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사랑했던 것인지
아득하다. 멀기만하다.
너를 내가 감히 사랑할수 없었던건
네옆을 내가 갖기엔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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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퉁퉁 불어있는 김성규에게 고운 옷을 입히고 오늘도 역시 동궁전 바깥 시강원에 맡겨놓은 뒤에야 남우현은 한숨을 돌렸다.
언제나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자신을 받아들이려 하질 않는 김성규가 야속했다.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니다. 되려 남우현은 미안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 왕실사람들이 살고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할수없는 허름하고 낡은 집이었다.
돌사이를 성의없이 황토로 메운 담벽은 곧 무너질듯 위태로웠고 창은 귀퉁이가 깨져 있었다. 굴뚝이라고 생각조차 하기도 어려운 담벼락 사이에 작은 수숫대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연기만이 이 집에 사람이 살고있다는걸 알려주는 유일한 매체였다.
남우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덜렁거리는 대문을 열어 마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바깥의 인기척을 감지한것인지 집안에서 아주 작게 들려오던 대화소리가 끊기고 곧 문이 열린후 어떤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한번 본적 없는것마냥 흰얼굴에 요목조목 박혀있는 이목구비가 누군가와 심히 닮았다, 고 생각했다.
미닫이문을 꽉잡은 손가락이 섬섬옥수마냥 고왔다. 의아한 눈길로 남우현을 바라보다가 곧 입술을 삐죽 내밀곤 물었다.
"뉘신데 제집마냥 앞마당을 밟고 팔불출같은 얼굴로 서계십니까?"
남우현은 깜짝놀라 아까보다 더 멍청해진 얼굴로 입을벌렸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였고, 듣기좋은 목소리였다. 아까부터 줄곧 익숙했던 얼굴은 폐하를 꼭 닮았다. 마른체형이었고, 앞서말한대로 백옥같이 희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예쁘다.
"아,저, 그러니까. 저는 그"
정신을 차린 남우현이 소매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허둥지둥 의금부 패를 보이고 뒷머리를 긁적인뒤 헛기침을 했다.
"나장 남우현이라고 합니다.."
나장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한쪽만 열려져있던 문의 반대편이 무거운 소리와 함께 열렸다. 깔끔히 쪽진 머리에 날카로운 인상의 마른 여자였다.
“나장께오서 이런 누추한곳엔 어쩐일로?”
아마 제은왕후가 폐비될 때 같이 왔던 시비인 듯 했다. 본래 상궁한명과 나인한명이 붙는게 법도였지만 제은왕후의 그 죄가 질이 악했다 판단하여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를 모시던 시비한명만 따라붙게 했다는 얘길 들은적이 있는 것 같다.
남우현은 들어가도 되겠냐는 손짓을 해보였다. 그녀는 조금 경계하다가 작게 탄식하더니 등을 돌려 들어가버렸다. 그는 긍정의 뜻으로 이해하곤 집안에 발을 들여놓는다.
온돌은 아직 제구실을 하는 모양인지 바닥만큼은 따뜻했다. 아까 들어가보였던 늙은 시비는 곧 개다리 소반에 썩어문드러진 개살구 두 개를 꺼내 내왔고 김성규는 그앞에서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삐딱하게 앉아있었다.
대화가 이어지는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분위기가 평화로운 것도 아니었다. 이런 곳이다.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후계자가 사는곳이, 이런곳이다.
“자. 이제 손님대접은 마쳤으니 용건이나 간단히 말씀하십지요”
아까부터 퉁명스러웠던 저 늙은 시비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으리라. 전령이 내려지기 전부터, 궁의 누군가가 이곳을 찾아오리란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간단히 하겠습니다”
남우현의 얼굴에 살풋 웃음이 띄워진다. 잔뜩 경계심에 움츠러든 모습일줄 알았는데, 김성규는 그닥 똑똑한 인간이 아닐성 싶었다.
“대군을 모시러 왔습니다”
그의 동그란 눈동자가 이윽고 김성규의 얼굴에서 멈췄다.
그건 그들의 첫만남이었고 , 악몽같기도, 단잠같기도 한 그들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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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얼굴에 도화살이 낀다고 한다. 그건 여자들한테나 해당되는 말인줄 알았다.
처음엔 정말 복숭아꽃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예쁜 복숭아꽃. 옛날 할아버지 댁에서나 봤던 커다란 복숭아 나무에 달린 그 꽃. 봄에만 얼굴을 내밀던, 예쁜 분홍색의 복숭아 꽃.
도화살이 낀 여자 얼굴은 상대 남자 기를 쪽쪽 빨아먹는다고 그러던데, 그런 얼굴을 남자한테서 봤으니 오죽 놀랐을까.
김명수는 그런 느낌이었다. 한창 봄때의 복숭아꽃을 닮은 남자. 이성열은 그런 느낌이었다.
“안녕”
네 목소리에선 이상한 향기가 난다. 날 옭아매기도 하고 날 방관하기도 한다. 정신못차리게 만들기도 하고 각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날은, 바람에 벚꽃이 잔뜩 날리던 봄날. 서당안엔 도포를 입은 예쁜 도련님 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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