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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첫사랑을 런던에서 마주칠 확률은?
BGM 추천
소유 - I miss you
쪽지의 맨 아래에는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기억 속의 김태형 번호와는 아예 다른 번호임에도 불구하고 6년이 지났는데 번호가 바뀔 수도 있지 않나 하는 기대가 자꾸만 꿈틀거렸다. 진짜라면 이건 정말 드라마에 나와야 할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조심스레 번호를 입력한 뒤 섣불리 전화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바람에 환하게 빛나던 액정은 깜빡이며 밝기를 낮췄다. 이 번호가 정말 김태형일까. 수많은 상황이 머릿 속에서 재생되었다.
이런 우연이 가능한가? 내가 6년 내내 카톡 하나 주고받지 않은 우리가, 런던에서, 같은 호텔, 옆 방에 투숙하고 있는게? 게다가 내 예상대로라면 김태형이 호텔 방 문을 나서는 나를 보고 쫓아와 쪽지를 남겼다는 말인데, 그 성격에 날 바로 붙잡지 않았다고?
아무리 머리를 데굴데굴 굴려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피할 수 없으면 부딪히는 수 밖에. 누를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하다 눈을 질끈 감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만약 정말 김태형이면 나는 네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안녕? 오랜만이야? 그동안 피해서 미안? 아, 모르겠다. 뚜르르, 신호 연결음은 얼마 가지 않고 뚝 끊겼다. 갑자기 연결된 전화에 잔뜩 긴장해 헛숨을 들이켠 뒤 조심스레 입을 뗐다. ...여보세요? 열리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떼내어 건넨 인사였지만, 상대방은 아무 말도 없었다. 뭐지, 뭐야?
묵묵부답이던 낯선 번호는 내가 전화를 끊기 직전에야 Hello? 하고 대답했다. 아, 아니구나. 잊겠다고 다짐해놓고 또 이렇게 실망하는 내 꼴이 우스워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쪽지남은 외국인이었고, 예상치 못한 한국어가 들려와 당황한 나머지 의도치않게 묵언수행을 했던 모양이었다. Umm... ah... cafe...? 수화기 너머에서 띄엄띄엄 전해져오는 단어들에는 조심스러움이 한가득 묻어있었다.
1 태형아
마치 예전의 그 김여주가 용기 내어 선톡한 그때처럼. 아닐까봐 걱정이 되었던 건지 느릿하게 내가 맞냐고 물어오는 남자에게 어색한 발음으로 예아, 하고 대답하자 경쾌한 톤으로 반갑게 다시 인사하는 목소리가 적당히 낮고 좋았다.
물론, 김태형 만큼은 아니었지만.
6년 전 첫사랑을 런던에서 마주칠 확률은?
외국인과의 통화는 처음이라 런던 탑 만큼 쌓아두었던 걱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마크는 신기하게도 나의 답 없는 회화를 찰떡같이 알아듣는 묘기를 선보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름은 마크, 나랑 동갑인 스물 다섯살. 자신은 유럽 여행을 하고 있고, 여기 런던이 그 여행의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렇구나. 나는 전화하는 내내 귀로는 마크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으로는 퐁퐁 물이 솟는 작은 분수대를 멍하니 응시했다. 줄곧 대답만 했는데도 끊길 듯 끊어지지 않는 대화가 신기했다. 김태형은 아주 뚝뚝 잘도 끊어먹던데.
아... 또 김태형.
짧은 전화를 마치고 분수대를 떠났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띵동, 하고 울리는 알람에 꼬박꼬박 답장하다보니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도 마크와 메시지를 간간히 주고받게 되었다. 마크와 하는 연락은 꽤 재미있었다. 지금 앞에 있는 가게 이름을 알려주면 그 주변의 볼 거리들을 소개시켜주는 마크에게서 장기 여행자의 짬바가 느껴졌다. 마크는 매우 친절했다. 맨 처음 쪽지를 받은 뒤로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 잠깐 했던 의심이 미안해질 만큼. 나는 멋대로 기대했다 실망하고선 종지에는 의심을 피워냈지만 마크는 작게 움튼 의심마저 이내 피시 앤 칩스 가게 근처의 정원을 추천하며 뿌리채 뽑아버렸다. 뽑히기 전 이미 정원의 아름다움에 뒷전으로 밀려나버리긴 했지만.
예쁜 정원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나의 감사에 마크는 거기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알려줬다. 거기를 너 말고도 다른 친구한테도 알려줬는데, 내 친구가 가보더니 거기서 첫사랑한테 고백할 거래. 문자를 읽고 정원을 한 번 빙 둘러보았다. 이야기를 듣고 다시 보니 더 예뻐보였다. 누군진 몰라도 되게 부럽네. 저 벤치에 앉아서 꽃다발을 선물하려나. 정원 안에는 많은 벤치가 있었지만 유독 그 벤치 주변에만 꽃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심지어 첫사랑이라니. 나였으면 무조건 받아줬다.
무튼, 마크는 베리 카인드 앤 슈퍼 티엠아이 맨이었다. 거의 걸어다니는 이야기 보따리. 한국에서 만난 남자였다면 글쿤ㅋㅋ를 시전하며 진작에 대화를 종결시켰겠지만, 해외가 처음인 나에겐 그런 투머치조차 좋은 인포메이션이었다. 방금 또 한 번 어제 호텔을 들어서는 내 모습을 보고 그냥 끌렸다며 동문서답을 시전했지만, 뒤따라 오는 내가 쪽지를 받고 기분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라며 기뻐하는 문자엔 매너가 가득해서 그저 귀엽게 볼 수 밖에 없었다. 정원 벤치에서 일어나며 가방에 넣어둔 노트를 꺼내 줄 하나를 그었다.
외국인 친구 사귀기.
/
Mark
〈 25
―
.
.
.
iMessage
(오늘) 오후 4:13
Then shall we have dinner together?
I know a good place!
oh, that’s a good ideaaaa
Let's meet in front of the hotel by 7.
읽음 오전 4:20
OK! Have a nice afternoon 🙌🏻
점심을 대충 때운 바람에 슬슬 배가 고파질 즈음, 타이밍 좋게 마크에게서 저녁을 함께하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나이스. 드라마틱하게 만난 친구와 함께 맛집 탐방이라니. 첫 날부터 기분 좋은 일이 가득했다. 내심 얼굴이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이야. 새로운 친구를 만날 설렘에 호텔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매너가 몸에 밴 스윗 앤 베리 카인드 앤 슈퍼 티엠아이 허니 보이스라면 어떻게 생겨도 평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방에서 잠시 쉬다가 시간 맞추어 나간 호텔 앞의 마크는...
" Yeo...Ju? "
캐나다 무형 문화재 급 외모를 자랑했다. 우와우. 아 엠 럭키걸... 이 정도면 김태형 잊을 수 있겠는데.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보이는 마크를 보며 나는 하나님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외국인 친구가 외국인 남친 되고 외국인 남편 되는 거 아닌가요? 희희희.
/
“ How about you? “
“ good...^^ you like this? “
“ Oh, yeah. This is my favorite food in UK! “
“ Hahaha... 입맛 진짜 독특하다 너... “
오, 주님... 감사하다는 말 취소에요. 럭키걸의 기분 좋은 하루는 저녁 메뉴가 나오자마자 처참하게 끝이났다. 웬 파이 집으로 들어가길래 딸기나 사과를 상상했건만. 식탁 위로 올라온 파이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생선 대가리가 나에게 인사했다. 그 유명한 핵 노맛 정어리 파이를 기어이 내가 먹는구나. 가뜩이나 생선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파이 류는 과일 파이 아니면ㅡ호두 파이도 싫다.ㅡ 입에도 대지 않는 내가...
입 안에서 펼쳐지는 달달한 파이 시트와 정어리의 비린 맛이 환장스러운 콜라보를 이루었다. 애써 웃으며 진짜 맛없다고 읊조리자 마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뜻이냐며 물어왔다. 으응, 딜리셔스... 걱정스레 쳐다보던 눈빛은 어느새 뿌듯함으로 물들었다. 네가 한국어를 몰라서 다행이야...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었다. 1mm씩 깨작대는 나와 대조되게도 마크는 옴뇸뇸 잘도 먹는 중이었다. 내가 만약 프랑스나 이탈리아로 가서 마카롱과 피자를 먹는다면 이런 표정일까... 행복해보이는 마크의 면전 앞에서 차마 이렇게 끔찍한 음식은 처음이라며 솔직한 비평을 가장한 쌍욕을 할 순 없었다.
" I'm so happy~~~ "
그래... 네가 해피하면 그걸로 된 거야... 애써 웃으며 마크 몰래 정어리를 털어내고 빈 파이 시트를 입에 욱여넣었다. 처음 덜어준 두 조각을 겨우 삼켰건만 접시가 비기 무섭게 하나를 더 권하는 마크에게 아임... 아임 풀... ㅎㅎ 노땡큐...를 외치며 입꼬리를 겨우 들어올렸다. 마크는 고맙게도 나의 나약한 식사량을 보고 눈썹을 늘어뜨리며 살 빼지 않아도 예쁘다고 해주었지만, 난 한국인들은 원래 소식한다는 개소리를 늘어놓으며 거절했다. 쏘리 마크. 넌 정말 베리 카인드 앤 슈퍼 티엠아이 허니 보이스 앤 스윗 핸썸 캐내디언이지만 그거 너무 거지같아서 더 못 먹겠어...
“ Let's go again next time! “
“ ㅎㅎㅎ... “
힘겨웠던 저녁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서는 길, 해맑게 웃으며 다음을 기약하는 마크에게 대답을 회피했다. 마크가 한국인이었다면 이 웃음을 눈치챘겠지만 캐나다인에겐 그저 긍정의 대답일 터였다. 오늘 밤 자기 전 마크에게 정어리 알러지가 있는 것 같다고 문자 할 계획을 세우며 방금 나선 가게를 조목조목 살펴봤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이랬어. 똑똑히 기억한 뒤 다신 오지 않을테다.
해피 파이... 내가 다음에 여길 또 오면 아마 가게를 부수러 올 목적일 것이다.
고맙지만 달갑진 않았던 특별한 저녁을 마치자 마크는 내일은 런던아이를 보러가자고 했다. 아, 런던아이. 말로만 듣던 그 런던 아이를 이 베리 카인드 앤 슈퍼 티엠아이 허니 보이스 앤 스윗 핸썸 해피 캐내디언과 가게 되다니. 혼자 왔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사진만 찍었을텐데, 새삼 마크를 만나게 된 것에 감사했다. 최소 영국 아싸는 탈출이지롱.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대답을 함과 동시에 재빠르게 내일 저녁 메뉴를 선점했다. 투모로... 투모로 디너 이즈 파스타. 해피 마크는 나의 배려ㅡ어느 포인트에서 그렇게 느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ㅡ에 감동하며 엘레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캐나다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긍정맨인가... 마크의 호칭에 포지티브를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굿나잇, 하고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엘레베이터에서 내렸다. 뒤돌아 바라본 마크는 걸음걸이에서조차 간지가 나는 것 같았다.
문고리를 잡아당긴 마크는 내 쪽을 잠시 돌아보더니 아직 들어가지 않은 나를 보며 Have a sweet dream. 하는 멘트를 날리며 문을 닫았다. 이제 보니 신발이 발렌시아가잖아. 모든 것을 가진 대신 정어리 파이를 좋아하는 남자, 마크... 머리를 감으며 하나님은 참 공정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끔찍했던 정어리 파이를 떠올리며.
7. 런던아이
런던에서의 둘째 날, 4시까지 각자의 자유 시간을 가진 뒤 호텔 앞에서 만나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다. 마크는 근처에 있는 런던 브릿지도 가볼 계획이라며 설레했다. 런던아이 주변에 맛있는 파스타 집과 디저트 카페를 아는데 쪼금 비싸다는 마크의 문자에 지갑을 빵빵하게 채우고 호텔 방을 나섰다. 런던 알못 여행자에게는 남는게 돈과 시간이여. 돈 워리, 마크. 아이 햅 어 랏 오브 머니. 답장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까지 잊지 않고.
“ Umm... how about wearing different clothes...? “
런던아이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난했다. 나는 엘레베이터에도 올라타지 못하고 마크에게 두 번이나 빠꾸를 맞았고, 폭풍 피드백을 한 뒤에야 호텔 로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첫 빠꾸는 옷이었는데, 마크처럼 런던 인싸가 되려면 지금같은 후드티와 추리닝은 탈락인 건지 엘레베이터 앞에서 날 기다리던 마크는 내 차림새를 보곤 화들짝 놀라 나를 돌려보냈다. 베리 카인드 앤 슈퍼 티엠아이 허니 보이스 앤 스윗 핸썸 해피 포지티브 캐내디언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많이 심각했던 걸까. 이왕 런던 온 거 거기 가서 기념 사진이나 뽕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인생샷을 위해 빡세게 꾸민 뒤 다시 방문을 열었다. 단정한 체크무늬 스커트와 갈색 베레모를 마주한 마크는 그제서야 웃어보이며,
“ You should always be careful because many pickpockets in England. “
“ Ah... Thank you! “
두 번째 빠꾸를 맥였다.
이건 빠꾸라기보단 조언이었지만. 마크는 정말 정어리 파이만 빼고 정말 최고의 친구였다. 나의 지갑까지 걱정해주다니.
나중에 한국에 놀러오면 제대로 대접해줘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손에 달랑 들었던 휴대폰과 지갑을 클러치에 넣고 호텔 정문을 나섰다. 드디어 튜브를 타고 런던아이로 이동하는 길, 영국의 지하철에 신기했던 것도 잠시 낮에 너무 많이 돌아다녔던 탓인지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누가 내 눈에 코끼리를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 어떻게든 참아보려 꾸역꾸역 헤드뱅잉을 시전하던 것도 잠시,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마크가 한숨 자겠냐고 권한 다음에야 나는 괜찮겠냐고 양해를 구한 뒤 졸도했다. 미안해하는 나에게 마크는 안그래도 피곤해보여 걱정했다며 도착하면 깨워주겠다는 말과 함께 어깨까지 내어주는 친절을 보인 마크... 당신은... 엔젤... 베리 카인드 앤 슈퍼 티엠아이 허니 보이스 앤 스윗 핸썸 해피 포지티브 엔젤... 어깨 높이를 맞추주려 꼼지락거리는 마크의 등 뒤로 언뜻 날개가 보이는 것 같았다. 땡큐땡큐. 하고 웅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오래 걸리려나?
이제야 제대로 관광지다운 관광지를 가보는구나.
맞아... 하긴 런던까지 날아왔는데... 정말 아무것도 못 보고 돌아가면 아쉬웠을 것 같다.
내일부터는, 내일부터는 좀 알아보고...
알아보고 갈만한 곳 여기저기...
여기저기...
6년 전 첫사랑을 런던에서 마주칠 확률은?
" 여주야, 다 왔다. "
" 아 징짜...? "
" 잠 덜깼으면 눈 감고있어. 손 잡고 가자. "
" 아라써... "
스읍. 혹여나 침을 흘렸나 싶어 잠에서 깨자마자 한쪽 팔로 입가를 훔쳤다.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든 것도 모자라 자는 동안 꿈 속에서 날개가 달린 마크와 함께 구름 위를 걸어다녔다. 마크는 거기서도 나의 여행 가이드를 자처했다. 히얼 이즈 클라우드 헤븐. 나는 대답했다. 와우. 애석하게도 꿈에서까지 나는 영알못이었다.
비몽사몽한 정신상태로 클러치를 챙긴 뒤 마크의 손을 잡은 채로 비척비척 하차했다. 이제 계단. 마크의 목소리도 어쩐지 평소보다 더 낮게 깔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랑 같이 잠깐 잠들었었나. 이젠 거의 자판기 수준으로 땡큐... 하고 웅얼거리며 아직 뜨이지 않는 눈으로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며 생각했다. 꿈에서 만난 마크는 나의 뇌내망상이 아니라 아마도 마크의 전생이었을 거라고.
/
어느덧 출구에 다다랐는지 땅에 닿는 발자국 소리가 바뀜과 동시에 찬 기운이 얼굴을 감쌌다. 아 차가워. 갑자기 훅 끼쳐오는 한기에 작게 중얼거리자 마크는 별안간 걸음을 멈춰서더니 말없이 목도리를 내게 감싸주기 시작했다. 아까 못 봤던 것 같은데, 가방에 목도리도 챙겼었나봐... 당신 진짜 최고의 친구. 어느 정도 더 걸었을까, 도착을 알리는 목소리에 가만히 서있자 사람들의 이야기소리와 서늘한 강 바람이 나를 반겼다. 그대로 강 바람을 맞고 있다보니 슬슬 달아나는 잠 기운에 이젠 눈을 뜰 필요가 있는 것 같아 목도리에 파묻힌채로 아직 온전히 떠지지 않는 눈을 열심히 깜빡였다. 오래 감고 있던 사이에 누가 자석이라도 가져다 붙여놓았는지, 마음만큼 확 떠지지 않았다. 이거 한 열 번은 깜빡여야 제대로 떠지겠는데.
한 번,
런던 야경 예쁘네.
두 번,
오. 저게 런던아이인가봐.
다섯 번,
아... 이거...
" You haven't changed in five years. "
" Five years? "
" Why? "
왜?
" Ah, not a big deal. by the way, what about your fabric softener? "
아.. 별 거 아냐. 근데, 너 섬유유연제 뭐 써?
" What's going on? "
무슨 일 있어?
" Just... Your muffler smells like cardigan of my... "
그냥... 네 목도리에서 나의 ,,.
" Your? "
너의?
" ...my first love."
내 첫사랑의 가디건 냄새가 나
첫사랑?
이 말을 꺼내자마자 갑자기 알 수 없는 ¹미시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눈을 잘게 깜빡이는 동안 마크의 뒷모습이 일렁일렁 차올랐다. 어제부터 봐오던 마크인데도 왜인지 모르게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나 자는 동안 몰래 파격 변신이라도 했나? 아니면 눈을 감고 쫓아오느라 내가 모르는 사람 손을 잡고 걸어왔는데 몰랐던 건가?
1. 미시감 : 기억의 오류 중 하나로, 지금 보고있는 것을 모두 처음 보는 것으로 느끼는 것.
시야가 또렷해질수록 기억도 함께 또렷해졌다. 분명 튜브를 탈 때 까지는 회색 코트를입고있던 마크였는데 어느새 갈색 자켓을 걸친 등이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했다. 겉옷을두 겹 입었던 걸 수도 있겠지만 런던은 코트 안에 자켓까지 껴입을 만큼 추운 날씨가 아니었다. 그저 멍한 상태로 정면을 보고 꿈뻑거리던 나는 아직까지 뻑뻑한 눈에 손을 올려 문지르기 시작했다. 뭐가 이렇게 이상한 것 같냐. 마크는 알아듣지 못할 속마음을 여과없이 내뱉으며 눈 위로 다섯번째 동그라미를 그려가던 순간, 묘하게 틀어져있는 지금 이 상황의 모순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
.
.
" 여주야, 다 왔다. "
파이 집에서 온갖 험한 말을 늘어놓아도 못 알아듣던 애가 한국어로 날 깨우고,
.
.
.
" You haven't changed in five years. "
만난지 5일도 안된 애가 5년간 변한게 하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
.
.
박지민
그래랑
야 근데 너 런던이면
???
런던이면 왜
박지민
아 아니다
박지민의 뜻 모를 말까지.
" ... 언제까지 하나 들어보려고 가만 있었는데. "
너야?
" 잠깐만, 너... "
갈색 자켓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빨간 니트가 눈에 들어차야 할 자리에는 검은 맨투맨이 있었다.
또 한 번 불어오는 바람에 눈이 시려웠지만 깜빡일 수 없었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뻣뻣하게 굳은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 나는 몰라보고 말이야. 내버려두면 마크로 노래 만들어서 2절까지 부르겠네. 아까 걔 이름이 마크야? "
태태, 너야?
" 6년 전에 내가 너 이름 안 불러줬다고 엄청 삐졌으면서. "
깜빡이면 사라지고, 건드리면 흩어질 것만 같았다.
" 너도 내 이름 안 불러줬으니까, 나도 삐졌어 지금. "
그래서 말이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인사보다 눈물이 먼서 나와버려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 그만 뚝 하고, 나 좀 안아주라. "
6년 전, 졸업식 날 교실 안에서 서로에게 줄 편지를 쥐고 바보같이 서있던 그때 처럼.
" 윽, 김여주가 내 갈비뼈 다 부수네. "
나는 인사 대신 온 몸이 으스러져라 김태형을 껴안았다. 품 안 가득 느껴지는 단단함이 밀해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손을 뻗어도 흩어지지 않는다고,
열 번,
김태형.
눈을 깜빡여도 사라지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