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를 담은 일기장 |
W. 슈
*
˝엄마, 저 바람 좀 쐬다 오려는데.˝ ˝그래. 해 뜨기 전에는 오너라.˝
네-. 흘리듯이 대답한 경수는 신발을 대충 꺼내 신고 밖으로 나섰다. 바닷가 옆 작은 펜션에서 단란한 차림을 꾸리고 사는 경수네 가족은 밖으로 나와 몇 걸음 하지 않아도 푸르고 넓은 바닷가를 금방 볼 수 있었다. 경수는 그런 푸르름이 좋았다. 영원히 이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수수하지만 정겨운 이 바닷가 마을을 좋아했다. 지금의 바닷가 풍경 역시 한결같았다. 경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익숙한 바다 내음이 밀려왔다. 꽤 이른 시각의 바닷가는 스산한 바람이 나풀거렸다. 잿빛 바탕의 하늘과 찰랑거리는 바닷물의 마찰음 소리는 외로운 바닷섬의 쓸쓸함을 한껏 더해주었다.
엷은 파도가 쏴아-하는 소리와 함께 육지에 부딪히며 부서진다. 경수는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어 파도가 안 닿는 곳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그리고 파도가 철썩거리는 얕은 물가에 조심스럽게 발을 담구었다. 차가운 물과 따뜻한 발목이 맞닿아 몸이 으스스 떨렸다. 하지만 조금 지나 차가움이 가실 즈음, 파도가 이따금씩 철퍽거리는 축축한 물가를 걷기 시작했다. 얇은 물가 밑으로 비치는 모래에는 경수의 발자국이 그려졌다, 지워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을 그렇게 거닐다 그새 잠이 다 달아난 경수가 이제 집에 가야지, 하고 돌아선 순간, 경수의 발목을 무언가 툭,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경수는 무엇인지 궁금해 발 밑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바로 쪽지로 보이는 종이가 접혀 들어간 유리병이였다. 조그마한 바위 옆 모래 속에 고개를 살짝 빼고 묻혀 있는 유리병은, 파도가 밀려오면 휩쓸려 나갈듯이 위태위태하게 흔들렸다. 경수는 얼른 그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유리병 입구를 막고 있는 마개를 조심스럽게 빼내어 병 속에 각을 세워 예쁘게 접힌 쪽지를 뽑아내었다. 흠이라도 날까 조심조심 다루어 핀 종이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경수 너는 웃는게 참 예뻐.
경수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지 멀리 어디선가 장난삼아 보낸 물병편지이겠거니, 했는데. 그 쪽지에는 놀랍게도 경수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모양은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을 들여 꾹꾹 눌러썼는지 종이 뒷편에는 펜 자국이 진하게 남아있었다. 무얼까. 우연이라고 믿기에는 다분히 의도적인 이 편지를 경수는 결코 누군가의 장난이 써보낸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누굴까? 그리고 나한테는 대체 왜….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인적이 드물고 거주하는 사람도 얼마 없는 이곳에서 대체 누가 저에게 이런 의미심장한 쪽지를 남긴 것일까. 경수는 왠지 이 편지를 그저 장난으로 치부해버리면 안될 것 같았다. 그냥 버리고 가기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편지를 자꾸만 저를 향해 끌어당겼다. 경수야, 밥 먹게 얼른 들어오렴! 한참동안이나 편지를 바라보던 경수는 집 앞에서 고개를 내밀고 자신을 부르는 엄마를 보고 문득 시간이 이리 지났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서둘러 편지를 주름결의 모양에 따라 접은 후 유리병에 넣고 처음 봤을 적의 그것처럼 다시 돌아온 유리병을 두 손으로 꼬옥 잡았다. 그러고는 멀리서 자신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엄마를 향해 외쳤다. 네, 엄마!
방금 전 바닷가에서 우연히 주운 유리병 생각에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한 경수는 평소 먹던 양보다 반은 더 넘게 남기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웬일로 밥을 이리 남기냐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새벽바람 쐬니 배가 안 고파서요, 하는 핑계로 대충 얼버무린 경수는 서둘러 제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아까 집에 들어온 후 곧바로 방에 올라가 책상에 놓아뒀던 유리병을 다시금 만지작거렸다. 둥그렇고 널찍한 몸체에 위로 갈수록 얇아지는 외양이 정말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것이 힘주어 만지면 혹여 깨져버릴까 물론 그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경수는 유리병을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그것 속 쪽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경수 너는 웃는게 참 예뻐…. 귀부터 볼까지 선홍빛으로 옅게 물든 경수의 입가에 선선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도 경수의 이른 아침에는 새벽녘이 드리웠다. 아직은 졸음에 무거운 눈을 두어번 부비적댄 후 기지개를 시원스럽게 켜고는 침대 옆 창문을 활짝 열었다. 경수는 눈을 감고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른 아침의 상쾌한 바닷 바람은 언제 쐬어도 시원하다. 경수는 생각했다. 약간 쌀쌀함이 느껴진다 싶을때쯤 창문을 닫고, 바람에 헝클어진 머릿결을 손으로 대충 쓴 후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경수가 너무 이르게 일어난건지 가족들은 모두 조용했다. 가끔 경수에겐 이런 적이 많았다. 아침잠이 없기로는 그가 가족 중에 제일이기 때문이었다. 점등을 할까 싶었지만 가족들이 너무 곤히 잠든 바람에 포기했다. 텁텁하게 마른 목이나 축여야지, 하고 부엌으로 향한 경수는 냉장고를 열고 물을 꺼내려던 찰나, 문득 생각난 것 덕에 동작을 멈추고 냉장고 문을 다시 닫아야 했다. 그 문득의 고찰은 이러했다. 오늘도 바닷가에 유리병이 있을까?…
경수는 잠옷 바람에 두꺼운 패딩 하나만 걸치고 바닷가로 나왔다. 왠지 모를 두근거림과 기대감이 자꾸만 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그 바위가 어디에 있더라, 한참을 둘러보던 경수는 이윽고 어제 제가 들른 흔적은 모두 사라졌지만, 기억만큼은 뚜렷한 그곳을 찾아내었다. 유리병이 놓여 있던 바위 옆에는 오늘도 역시나 유리병이 똑같은 모습으로 고개를 빼죽 내민 채 경수를 반기고 있었다. 경수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역시, 있구나. 경수는 제 몸보다 거센 파도에 밀려 위태하게 흔들리는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어서 마개 뚜껑을 열고 쪽지를 펴보았다.
오늘도 이 쪽지를 찾아주었구나. 고마워. 너는 지금도 그렇게 예쁜 미소를 띄우며 웃고 있겠지.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해줘. 내일도 찾아줄거지?
전날 받았던 유리병 안 쪽지 내용보다 훨씬 길었다. 그에 맞춰 경수의 기분도 끝을 모르게 상승곡선을 이어갔다. 경수는 두 손으로 꼭 잡은 편지를 제 가슴 팍으로 안아보았다. 가슴에 마주댄 손바닥 새로 쿵,쿵, 하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경수는 한참동안을 그렇게 서있었다. 유약한 떨림과, 그렇게도 부드럽고 예쁜 미소를 유지한 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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