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상한 기호가 떠서 계속 올렸다 삭제하고 있어요.... ㅜㅜ
<5>
그렇게 갈 곳을 잃고서 나는 그저 정처 없이 복도를 거닐고만 있을 뿐이었다. 김종인을 따로 생각할 틈도 없이 폭풍처럼 박찬열에 대한 생각이 몰아친다. 우리 반에서 박찬열의 반까지는 거리가 꽤 있는 편이었다. 일곱 교실을 사이에 둔 거리. 그러고보니 새삼 이 길이가 길다는 사실을 느낀다. 아까 박찬열이 날 위해 왕복한 거리. 그 생각을 하니 또 조금 마음이 약해진다. 박찬열. 학교 내에서 유일한 친구. 없어선 안 되는. 순수한 친구 관계, 하지만 이제는 아닌. 정리되지 못한 말들이 머리 속을 유영한다.
박찬열과 키스를 했다. 다른 남자들과 하는 것처럼. 친구와 키스를 했다. 그 사실에 미친 듯이 자괴감이 몰려온다. 박찬열을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조금 더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던 게 맞다. 나한테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사랑이라는 천박한 이름으로 잃어버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애인이라는 틀 안에 박찬열을 들여보내야만 그를 잡아둘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박찬열이기에 털어놓고, 박찬열이기에 기댈 수 있었다. 적어도 그는 나에게 최우선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의 전제는 둘 다 서로에게 가슴 뛰는 감정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깨트린 건 박찬열이지, 내가 아닌데. 껍데기를 깨버린 병아리는 너무나도 쉽게 깨진 껍데기를 원망하며 그 잔재를 떠나려 한다. 병아리같은 박찬열. 자기 혼자 품고, 저지르고, 떠나고, 나에게는 상처만 남고.
"경수야, 뭐해?"
갑작스럽게 어깨를 붙잡혀 돌려세워진 몸. 힘없이 바라본 눈 앞에 오세훈이 서 있었다. 병신같이 박찬열을 기대했던가. 히죽히죽 웃으며 나를 쳐다보던 오세훈의 표정이 내 얼굴을 보더니 조금 차분해진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왜 혼자 멍때리면서 걷고 있어. 이리 와봐. 나랑 놀러가."
그러면서 오세훈은 내 손목을 잡아 이끈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궁금해할 틈도 없는 찰나였다. 다시 돌아온 박찬열의 교실. 오세훈도 박찬열과 같은 반인 듯하다. 잠깐 기다리라며 교실 안으로 들어간 오세훈이 자기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온다.
"아이스크림 사줄게. 매점 가자."
어젯밤 격렬하게 섹스한 사이 치고는 너무 순수한 대화 장면이다. 자판기로 가는 도중에 오세훈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왜, 뭔데."
"그냥 친구랑 싸웠어."
"다른 친구랑 놀면 되지."
"다른 친구 없는데."
내 말에 오세훈이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하지만 사실이다. 언제나 나한테 친구라곤 박찬열 하나 뿐이었다. 나를 순수한 친구로 보았던, 지금은 아니지만, 유일한 친구. 박찬열 이외에는 학교의 아이들과 별로 인연을 맺지 않았고, 바깥의 지인들은 죄다 섹스파트너 혹은 그것을 목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그럼 나는 뭐야?"
오세훈의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섹스파트너."
순간 표정이 잠깐 일그러졌다가 금세 펴진다.
"섹스하는 친구는 어때?"
"그게 말이 되냐."
친구랑 어떻게 섹스를 해. 핀잔을 주자 또 입을 삐죽 내밀며 내 팔을 붙잡아온다. 어젯밤엔 그렇게 남자같고 섹시하더니, 오늘 이렇게 순수하게 구는 건 반칙이다.
"그럼 그냥 친구처럼 다녀, 나랑."
"나랑 안 자려고?"
"그거랑 그거는 다르지. 그냥, 나랑 같이 밥 먹고."
"......."
"나랑 같이 집에 가고. 집 어디야."
"엑소빌라."
"데려다줄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박찬열은 집으로 가는 방향이 반대편에 있어서 같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오세훈이, 볼수록 자꾸만 마음에 든다. 김종인만큼이나.
"오, 매점에 사람 별로 없다."
오세훈의 말에 유리창 너머로 매점을 슬쩍 보니 정말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기분좋게 매점으로 들어섰고, 그리고 마침 그 때 매점에서 밖으로 나오는 무리들은,
"......."
"......."
박찬열과 박찬열의 친구들이었다.
"야, 박찬열. 도경수 왔다."
누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이미 박찬열과 눈이 마주쳐 있는 상태였다. 박찬열은.내 옆에 꼭 붙어 있는 오세훈에게 잠깐 눈길을 주더니 인상을 찌푸린다. 그 표정에 나도 모르게 오세훈의 옆에서 살짝 몸을 떨어뜨렸다. 오세훈은 찡그린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박찬열을 잠깐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야, 박찬열. 경수가 뭐 잘못한 거 있냐? 왜 그딴식으로 봐."
"니가 도경수랑 어떻게 알아."
"경수 내 친군데."
그 말과 동시에 오세훈의 팔에 허리를 붙잡혀 오세훈 쪽으로 완전히 몸이 붙어버렸다. 박찬열의 인상이 한층 더 굳는다. 나도 모르게 박찬열의 눈치를 살피며 살짝 떨어지려고 했으나 꽤나 단단히 붙잡혀 있었던지라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니가 언제부터 도경수랑 친했다고."
"오늘부터 존나 친해졌다, 씨발아."
점점 더 대립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아 오세훈의 허리춤을 붙들었다. 하지 마, 오세훈. 반대쪽에서도 박찬열의 친구들이 박찬열을 말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박찬열은 오세훈의 옷깃을 붙잡는 내 손을 보더니 거의 눈이 뒤집혀버리고 만다.
"씨발, 도경수. 너 이 새끼랑 사귀냐?"
"...아니야."
"씨발, 존나 나 엿먹이면서 재밌었냐?"
"......."
"사귀는 놈 있으면 말을 하지. 존나 기분 좆같네, 진짜."
"......."
"내가 너 실드쳐주고, 다 퍼다주고, 내가 정신이 나갔었지, 씨발."
"......."
"앞으로 아는 척 하지 마라."
잔뜩 상처받은 표정으로 돌아서는 박찬열이지만, 내가 더 많이 상처받았을 거라는 걸 너는 알까. 적어도 너 하나는 친구로 두고 싶었던 내 바람은 그렇게 큰 욕심이었을까. 조용히 내 어깨를 감싸는 오세훈의 손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오직 변해버린 박찬열의 냉담함에 얼어붙어 버린 듯한 마음 한 구석만이 미친듯이 아려오는 게 느껴질 뿐이었다.
"경수야."
"......."
"너무 마음 쓰지 마."
"......."
"내가 있어줄게."
박찬열로 인한 이 허함을 너로써 상쇄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
결국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은 먹지 않은 채 그냥 돌아와버렸다. 오세훈이 나를 교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지나가는 길에 또다시 박찬열을 마주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게도 마주치지 않았다. 우리 교실 뒷문 앞에 도착했을 때 오세훈이 살짝 내 손목을 쥐어왔다. 고개를 들려 오세훈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저녁시간에 우리 반 앞으로 와."
"...응."
"아니면 내가 데리러 갈까."
“됐어, 그냥 내가 갈게.”
"좀 있다 보자."
고개를 끄덕이자 오세훈이 살짝 허리를 숙여 내 귀에 대고 누군가 들을세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키스하고 싶은데 참는거야. 그 말에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조금 있다가 실컷 하세요."
"진짜지? 야, 기대된다."
"미친, 나 간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오세훈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교실로 들어갔다. 오세훈이 유리창 너머로 살짝 나를 보고 웃어주고는 가버린다. 달다. 진짜 연애하는 것처럼.
"경수야."
정신을 팔고 있느라 김종인이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태민은 가 버리고 김종인만 혼자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살짝 표정을 굳히고 김종인의 옆자리, 그러니까 내 자리에, 가 앉았다. 앉자마자 곧바로 한 팔을 괸 김종인의 끈적한 시선이 닿아온다. 괜히 민망해져 시선을 피해 창가로 두었다. 그러자 내 어깨를 붙잡아오는 그.
"...왜."
"아침엔 미안."
"......."
"근데 남자 몇 명이야?“
미친 새끼, 욕이 나오기도 전에 주변부터 살폈다. 욕하는 모습을 보여 좋을 건 없다. 다행히 주변에 듣고 있는 듯한 애들은 없는 것 같아 일단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쳤냐? 제법 진지한 나와 달리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기까지 하는 김종인에 살짝 열이 뻗쳤다.
“오늘 나한테 꽤 많은 면을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아?”
“.......”
“원조에, 남성편력에, 욕까지.”
“거 참, 진짜.”
눈앞에서 히죽대는 얼굴을 한 대 치기라도 하고 싶었다. 교실이 시끄러워서 망정이지, 누가 듣기라도 했으면 끝장날 뻔했다. 생긴 게 괜찮아서 좋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안 지 얼마 됐다고 날 농락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똑같이 만난 지 하루 된 사이라면 오히려 오세훈이 나을 것 같은. 완전 환상을 처참히 깨고 있다. 하긴, 어차피 애인 있으신 몸이 아닌가. 이 관계에서 더 매달리게 될 건 그가 아니라 나다.
“오세훈이랑 초면 아니지.”
“아니면?”
“나도 거의 초면인데. 나도 한 번 도전해볼 수 있는가싶어서.”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도 너랑 한 번 자 볼 수 없나?”
씨발,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아찔함을 느꼈다. 분명 어딘가에서 마주친 적도 없고, 학교 안에서 티나게 행동한 적도 없다. 김종인의 표정에 더욱 무너지고 만다. 모든 걸 얄고 있다는 듯한 저 자신.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야, 김종인.”
“다 알고 말하는 거니까 뺄 생각 하지 말고.”
“.......”
“오세훈이랑 아는 사이 아니었잖아. 안 지 얼마 안 됐지 않나.”
“.......”
“저렇게 가까울 정도면 분명 한 번 이상은 잤을거고.”
김종인은 절대로 뭔가를 그냥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분명히 무언가를 알고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
“난 초면이 아니거든.”
“나, 난 너 본 적 없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어버린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 속을 뒤집고 탈탈 털어봐도 김종인을 본 기억은 없다. 김종인이 혼자서 일방적으로 나를 알고 있을 것이었다.
“지켜봤어.”
“...어떻게,”
“네가 자주 가는 곳, 거기 우리 형 꺼거든.”
아, 머리를 쇠망치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그제서야 오세훈의 말이 떠올랐다. 친구네 형이 운영하는 바라 자주 드나든다는 것.
“오늘 밤. 너네 집으로 가면 되나?”
“…….”
비릿하게 웃고 있는 김종인이었다.
아, 아무래도 좆된 것 같다.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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