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화창하다.
차라리 비가 내리면 좋으련만.
그러면 이 곳을 눈에 좀 더 많이 담을 수 있을텐데.
그와 루한이를 좀 더 볼 수 있을텐데.
윤아는 씁씁히 웃으며 벽을 쓸었다.
그리고 치마 허리끈에 달려있는 노리개를 풀어 옻칠을 해서 빛나는 오동나무 상자에 넣었다.
이제 더 이상 이것을 달 일이 없겠지.
윤아는 나무 상자의 겉을 쓸며 슬프게 웃었다.
한참동안 상자의 겉을 쓸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문을 열었다.
한참 밖을 돌아다녔는지 온 몸이 땀으로 푹 젖은 루한이 서 있었다.
루한은 마당에서 굳은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제 누이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윤아는 루한의 굳은 표정에 어디서 험한 일을 겪었나싶어 걱정스레 물었다.
"루한, 어딜 갔다 오기에 표정이 그리 나쁜거니. 혹, 어디 아픈게냐?"
윤아의 물음에 루한은 한 쪽 입꼬리만 올린채로 이죽거렸다.
"아프긴요. 아주 멀쩡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누님."
"아프지 않다면 표정이 왜 그리 어두워. 무슨 일 있느냐."
"무슨 일 있긴요? 제 표정이 어둡긴요? 전 지금 매우 기쁜데요? 누님은 절 모르십니까?
왜 제가 기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표정이 어둡다 하십니까?"
그리고 루한은 상 위에 올려진 나무 상자를 보다가 윤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누님, 제가 방금 저잣거리에 다녀왔는데 사람들이 모두 누님 이야기를 한다고 정신이 없더이다.
누님이 호판 댁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부러우면 이틀만에 동리에 소문이 다 날까요.
그래서 저는 기쁩니다. 누님이 세력가의 집으로 가는 것을 싫어할 동생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 조금은 싫습니다. 동생은 관노비가 될 처지인데 누님은 여전히 양갓집 규수로 남으실 수 있잖습니까.
게다가 남인도 아닌 노론 집안의 규수로요."
루한의 이죽거림에 윤아는 못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리곤 나직하게 말했다.
"날이 더우니 너무 돌아다니지 말거라.
서궐(일사병)에 걸릴까 걱정이구나."
"미리 몸을 열에 익히는 겁니다.
관노비가 되면 밖에서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미리 열을 받아놓아야죠."
"루한! 관노비라니. 네가 왜 관노비가 되느냐!"
윤아의 성난 외침에 루한은 그나마 올렸던 한 쪽 입꼬리마저 싹 내리고 윤아를 쳐다보았다.
화난 표정으로 윤아를 한참동안 쏘아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틀린 말 했습니까? 저잣거리의 시정잡배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누님은 왜 모른 척 하십니까? 진짜로 모르는거요?
내가 창기의 자식이고 첩의 자식이니 관노비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는..."
루한은 성난 목소리로 소리치다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제 누이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천치다. 세상에 이런 천치가 어디 있을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기생의 자식을 제 동생이라며 자랑스럽게 여기고,
서얼이니 서당과 사부학당에 다니지 못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비천한 저대신 아버지께 따져 묻고,
누가 제 험담이라도 하면 엄한 목소리로 그네들을 꾸짖는다.
내 어미때문에 집이 망하고 족보가 팔리어도 괜찮다 웃는 내 누이만큼 멍청한 사람이 또 있을까.
아, 그래 있다. 있구나.
멍청한 여인을 좋아하는 멍청한 사내.
나와 마주쳤을 때,
소문을 다 들었으면서, 후에 호판대감의 첩이 될지도 모르는 제 누이에 대한 이야기 대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마지막에 누님의 부탁일지도 모르는 말을, 저와 함께 청으로 가자며, 장사하러 가자는 그 사내는
끝까지 제 정인(情人)의 이름을 담지 않았다.
한심한 두 남녀. 그리고 그 보다 더 한심한 나.
양반 족보가 팔리기 전에도 서얼이라 과거를 치르지 못 하고 관노비나 될 처지인 나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못 한다.
아, 그런데 굳이 누님이 호판 댁으로 갈 필요가 있나?
어차피 나는 관노비가 될 처지이니 누님은 그냥 자형(姊兄)을 따라가면 안 되나?
어차피 서민이 되었는데 눈치 보일 일도 없는데.
루한은 결심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상에 올려진 나무 상자에 다시 눈길을 주었다.
생전 아버지가 누님에게 주신 상자다.
자개가 박히지 않은 밋밋한 상자지만 아버지께서 손수 만드신 상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농 속에 보관하며 가끔 꺼내어보던 것이 지금 나온 것을 보면 자형이 준 노리개를 넣어놨겠지.
루한은 허리를 굽혀 상자를 집어올렸다.
상자의 뚜껑을 여니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노리개가 들어있었다.
윤아가 일어서며 그를 부르자 루한은 활짝 웃으며 윤아의 손에 노리개를 꼭 쥐어주었다.
"누님, 저는 어차피 관노비가 될 신세입니다.
이러나저러나 저는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만 누님은 다릅니다.
누님이 자형을 따라가십시오. 누님이 노론 댁에 가지 않아도 뭐라 하는 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누님이 자형을 따라간다고 해도 뭐라 하는 자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민 아닙니까.
서민 여인이 중인 남자를 따라가는 것이 뭐가 이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누님?"
"그게 무슨 헛소리냐. 내가 널 어찌 두고 떠난단 말이냐. 너를 두고 도망치기 싫다."
"그럼 저는 어찌 누님을 노론 댁에 두고 떠난단 말입니까?
누님, 저를 두고 떠나세요.
그리고 도망이 아닙니다. 정인을 따라 가는 것이 어찌 도망입니까?
부창부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가는 곳을 부인이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도리 아닙니까?"
"루한..."
"자형네 상단이 곧 청으로 떠난다 들었습니다.
가십시오, 누님."
"하지만..."
루한이 제 딴에는 괜찮다고 내놓은 해답을 듣고도 윤아는 계속 머뭇거리기만 했다.
동생인 루한이 계속 눈에 밟혀서 그런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는 것 같았다.
누이가 계속 말꼬리를 흐리며 눈을 맞추지 못 하자 루한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누이의 이름을 부르자
윤아가 눈을 꾹 감고 고개를 푹 숙이면서 웅얼거렸다.
"내가 호판댁으로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제사는 다른 분들이 대신..."
"아버지의 위패를 가묘에 아직 올리지 않으셨다. 게다가 비석에 비문도 아직 새기지 않으셨고..."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가묘에 위패를 올리지 않고 비문도 새기지 않아?
돌아가신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루한은 윤아의 말이 이해가지 않아 큰 눈을 깜박거리며 멍청히 머리 숙인 누이의 정수리를 쳐다보다가
윤아가 하지 못 한 뒷 말의 내용을 눈치챘다.
부친을 빌미로 누이를 호판 댁에 팔아넘기는 것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노론 호판대감이 별 볼일 없는 남인 집안의 규수를 데려온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데,
친가와 외가 모두 조용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반발해도 모자랄 판에 조용하다니.
그리고 양반 족보가 팔리어도 양반은 양반인데 위패를 가묘에 모시지 않고 아직 비문을 쓰지 않은 것 역시 이상하다.
아마 장안에서 가장 어여쁘다는 누님을 노론 댁으로 보내는 대신 벼슬자리 한 자리 얻어보려는 속셈이겠지.
루한은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노론을 실컷 씹어댔으면서 벼슬자리 그 하나 얻겠다고 혈족인 제 누이를 두고 이러는 친척들이 역겨워서였다.
아버지를 두고 협박을 하였구나.
루한은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끝까지 발목을 잡는 것은 자신이었다.
서얼이어서 과거도 치르지 못 하고 누이가 노론 댁으로 가는 것도 막지 못 한다.
그러다가 문득 제 누이가 눈에 들어왔다.
여인치고는 큰 키에 호판은 제 누이를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저역시도 직접 본 적이 없다.
루한은 주위를 둘러보다 누이의 은경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피 하나 섞이지 않았지만 누이를 닮아 곱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종종 있었다.
루한은 떠오르는 묘책에 씩 웃으며 윤아를 불렀고 윤아는 갑자기 밝아진 루한의 표정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누님, 제가 어렸을 때 누님이 저를 여장시키신 일 기억나십니까?
그 때 여장시킨 저를 데리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닌 적이 있었지요. 기억하십니까?"
"응, 기억한다."
루한이 갑자기 과거 일을 꺼내자 윤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윤아는 이내 미소지으며 답했다.
더 이상 나누지 못 할 대화, 지금 실컷 나누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루한의 말에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누님대신 호판댁에 가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다 큰 사내가 어찌 분칠을 하고 여인 노릇을 한다는 것이냐?"
"제가 평생을 노론 댁에 있겠다 한 것도 아닙니다, 누님.
누님은 자형을 따라 가세요. 누님이 장안에서 멀리 벗어날 때 쯤 저도 도망나올겁니다.
그 때면 이미 친척들도 어떻게 못 하겠지."
"하지만..."
"노론 댁 규수가 먹는 밥 한 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남인 출신의 서얼이 언제 그런 귀한 밥상을 받아보겠습니까?"
장난스레 말하며 루한이 노리개를 쥐어주자 어색하게 웃던 윤아의 얼굴에도 같은 미소가 번졌다.
ㅋ.... 남매의 이야기로 또 이야기 진전없이.. 막... 그렇네요... 껄껄
아마 다음부터 제대로 이야기가 진전될 거 같네요
다음부터는 진짜 막 며칠 뒤 이렇게 될 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타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바로 수정하겠습니당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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