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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금소화동숙


[방탄소년단/전정국] 도원(桃園) 二 | 인스티즈


도원(桃園)

第 二章


作. 樂園



도원(桃園) : 무릉도원을 일컫는 말.




도원은 하나같이 어색한 곳이 없었다. 그저 신선들이 사는 공간이었다. 자신들의 취미로 농사를 짓고, 소나 닭을 기르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사리사욕을 채웠다. 재물도 필요 없고, 그저 인심으로 자신들끼리 주고받는 삶을 살았다. 흐르는 강물은 맑았으며, 숲은 웅장하게 우거져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그저 책에서 봤던 것처럼, 사신 중 하나인 청룡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 또한 곳곳에 도원임을 알려 주는 것처럼 복숭아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든 게 조화로웠다. 그리고 도원의 중심지에 있는 궁궐 한 채,한자를 읽으니 적화궁(赤華宮)이었다. 붉게 빛나는 궁을 의미했다. 그와 알맞게 붉은색의 기와가 빛을 받으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가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는 분위기가 가득한 곳. 이곳은 신선들만 살 수 있는 곳, 신선의 세계였다.

여주는 아직 궁에 발을 들이기 전, 정국에게 안긴 상태로 있어야 했다. 뻣뻣하게 굳은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입술을 귓바퀴에 묻은 채였다. 그런 여주가 재미있는지 정국이 픽 웃고 말았다. 이렇게 귀여운 공주님일 줄은 몰랐다. 삼신할매를 찾아가 그녀를 점지해 달라고 했고, 월하노인에게 찾아가 몇백 년 전부터 빨간실을 미리 제 손가락에 엮어 달라고 말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제 열여덟이 된 소녀와. 하지만 예쁘게 생긴 만큼 벌과 나비가 꼬이는 건 당연했기에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도원을 만들었다, 여주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 정국은 여주에게서 떨어지고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자신의 얼굴과 손을 바라보는 여주에게 재촉을 하고 말았다.


"안 들어가는가."


반말을 했다. 반말... 응? 반말? 반말을 했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미 홀리듯이 그의 손을 잡고 말에 서 가볍게 내린 여주는 문을 앞에 남겨둔 채 한 번 더 정국을 휙 돌아봤다. 단 몇 발자국을 남겨둔 채 일순간 멎은 발걸음에 정국이 뭐 더 물어볼 거 있냐는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여주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한 번 더 약속했던 사항을 확인하듯이 '약조는 지켜야 하느, 아니 합니다?'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말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계속 이랬다 저랬다 하니, 정국은 정국 나름대로 웃겨서 궁 앞에 서서 크게 웃고 말았다. 그 모습에 다른 선인들은 정국이 웃는 걸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하게 둘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둘은 둘만의 세계에 갇힌 것처럼 전혀 주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대답 없이 웃기만 하면 정국을 보며 여주는 한 번 더 채근했다.



"그, 그러니까! 세 달의 약조는 지켜 주셔야 합니다."


"말을 높이든지, 낮추든지 하나만 하거라. 내 너보다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나, 외형은 너랑 비슷하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의미다."


"약조나 지켜 주세요. 저 문을 넘어가도 우선 혼사는 미루는 겁니다."


"아, 알았느니라. 그만 재촉하거라."



결국 말을 높이기로 한 여주인지 말을 높였다. 아무리 정국이 제 나이처럼 보여도 나이 때문에 걸리는 건 사실이었다. 여주 본인은 18세밖에 안 됐지만 정국의 나이는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반말을 하라고 해서 나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낮출 수 있겠는가. 정국의 확답이 돌아오자 한결 얼굴이 밝아진 여주는 싱긋 웃으며 정국의 뒤를 따라 적화궁(赤華宮)으로 발을 들였다. 밖에서 본 것보다 더 어여뻤다. 기둥마다 새겨진 무늬들은 실존하는 것처럼 청룡, 주작, 백호, 현무가 새겨져 있었다. 붉은색의 기와는 주작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화려했고, 불꽃이 살아서 피어오르는 형상이었다. 그 뒤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신들이 춤추고 뛰어놀 것만 같은 형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만들어진 곳 같았다. 휘둥그레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현저히 걸음이 느려지자 정국이 여주를 재촉했다. 그녀가 올 날을 위해 정국이 고심하고 또 고심하여 직접 꾸민 방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국의 궁 안에는 꽤나 복숭아나무와 벚꽃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색의 빛으로 된 새가 날아다니는 것은 물론이요, 각종 동물들이 자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 물론 작은 동물들만. 건물을 피해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동물들도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하얀 토끼의 뒷모습을 보다 정국과 눈이 마주친 여주는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정국의 동그란 눈이 토끼와 닮았기 때문에. '토끼를 닮으셨습니다, 꽤나.'라고 한 마디 던졌다가 충격을 받은 것인지 정국은 그 자리에서 말이 없었다. '내가 고작 저 작고 하얀 토끼를 닮았단 말이냐.'라고 반문하기에 여주는 그저 모르쇠를 외치며 정국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순간, 정국과 여주의 앞에 '왁!'을 외치며 나타난 자가 있었다. 정국은 아무렇지 않게 그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익숙하다는 것처럼. 하지만 이게 처음인 여주는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심히 놀랐다는 것이었다. 그에 장난을 친 자는 깔깔거리며  바닥을 뒹굴면서까지 웃었다. 심히 놀랐는지 귀를 막고 주저앉은 여주가 걱정되는지 정국이 여주의 손을 꽉 잡아 그의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여전히 깔깔 웃는 그 자에게 비난을 준다.



"주작, 내 그리 장난치지 말라고 말했잖아. 아이 놀란 거 안 보이느냐."


"푸학학! 정국, 쟤 진짜 웃겨! 이런 거에 놀라서 주저앉다니!"



한순간에 놀림거리로 전락한 여주는 정국의 품 안에서 슬며시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색의 머리를 가진 남자는 활활 타는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그 눈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정국과 그 남자를 번갈아서 바라보다 여주는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꽤나 놀랐는지 여주의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혀 있는 걸 보고 정국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 그에 꽤나 아프게 맞은 모양인지 '씨잉.'이라 말하며 맞은 머리를 문질렀다. 그러다 정국이 방심한 순간을 타 여주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뜨거웠다, 불같이 타오르는 온도에 붉은 눈동자와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크고 따뜻하면서도 뜨거운 손이 여주의 귀를 덮었다. 그리고 정국이 듣지 못하도록, 오직 여주만 들을 수 있도록 가볍게 속삭였다.



"네가 선인이 되는 그날만 기다릴게, 정국의 아이야."



내가 선인이 되는 날은 네가 왜 기다려. 허, 하고 헛웃음이 입에서 터져나왔다. 정국은 급하게 그 남자에게서 여주를 빼와 자신의 품에 가뒀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한들 이런 장난은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신이 데려온 사람에게 이런 장난을 치니 살짝 화가 났다. 화가 난 정국을 알아챈 것처럼 붉은 머리의 남자는 나 몰라라, 후다닥 도망갔다. 끝까지 붉은색을 띄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듯이. 정국이 여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 행동에 여주와 정국의 눈이 허공에서 맞물렸고, 그 순간 여주가 정국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깜짝 놀란 여주가 정국의 품에서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바, 방금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하고 마을 더듬으며 물어봤다. 제 인생에서 이렇게 사내와 손을 잡는다든가, 품에 안긴다든가 하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화제를 돌리고자 그 남자에 대해 물어봤다. 뭐, 나름 궁금한 마음도 담아서. 여주의 질문에 정국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라도 저 말고 주작이 마음에 든 건 아닐까 하는 그런 마음이 들어서.



"네가 소설에서나 봤을 법한 그 사신 중 하나란다. 그는 주작, 이름은 태형이라고 부르면 될 것이다."


"... 그러면 호, 혹시, 청룡이랑 현무, 백호도 존재해요? 진짜로? 그게 소설이 아니고?"


"생각을 해 봐, 일단 나처럼 선인이 존재하는데 그런 게 없을 리가 있겠는가."



붉은 머리, 주작, 태형. 그리고 다른 사신들이라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을 동그랗게 두 눈을 깜빡거리는 여주의 손목을 이끌었다. 자, 얼른 가야 돼. 네 방에 당도하려면 멀었다. 정국이 채근했다. 그의 손에 손목이 붙들려 결국 끌려갔다. 선인의 세계에서의 하루가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





붉은 기와로 이루어진 영화전(永火殿)을 지나, 푸른 기와로 이루어진 청류전(靑瑠殿)까지 지났다. 인간의 체력으로 넓은 궁을 돌아다니느라 진이 다 빠진 여주와는 달리 정국은 그런 걸 느끼지 못한다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여주를 끌고 다녔다. 더는 못 가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정국의 걸음이 멈췄다. 기둥에는 오색찬란한 빛으로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기와는 검은빛과 푸른빛이 섞여 있었다. 궁궐 내의 가장 안쪽에 있는, 오직 정국만이 출입할 수 있는, 오직 정국과 함께 출입할 수 있는 곳. 정국이 자신의 염원을 담아, 이 아이만을 위해 만든 곳이었다. 청루전(淸淚殿)이었다. 맑은 눈물의 전각을 의미한다. 여주가 입으로 청루전을 반복해서 말을 하자, 정국이 그들의 시중에게 문을 열라고 눈짓을 보냈다. 전각의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여주를 안내했다. 그리고 초조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성급해 보였지만 성급하지 않은 목소리로.



"... 마음에 드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화려했고, 눈에 다 담고 싶었지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꽤나 넓었다. 고풍스러운 병풍과 그 앞에 놓여져 있는 붉은색의 침구, 자개들로 이루어진 함과 탁자까지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황궁에서의 제 궁보다 더 아름다웠고,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붉은색의 침구는 딱 여주와 어울릴 만한 색이었다. 희고 고운 피부와 확실히 어울릴 만한 짙으면서도 청량한 홍색이었다. 여주는 침구를 손으로 한 번 쓸자, 제 주인을 알아보는 것처럼 먼지 하나 날리지 않았다. 혹여 다른 사람이었다면 기침이 날 정도로 먼지를 뿜었을 수도 있다. 정국은 그런 그녀를 보며 내심 뿌듯했다. 제 아이와 너무 잘 어울려서,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으므로. 또한 아직 연결되지 않은 실이 연결된 것만 같아서. 제가 데리고 온 아이가 자신과 혼사를 올린다고 이야기했으면 하는 바람이 조금 더 커졌다.

자신의 마음을 담아 그녀를 붙잡을 수 있다면 붙잡고 싶었다. 왜 자신이 여주에게 세 달을 제안했는지 약간 후회가 되기도 했다. 한 달을 걸었어야 했다, 그 안에 그녀를 제 사람으로 만들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저 빈 껍데기를 가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 둘 다 취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결국 정국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세 달의 시간을 건 것이었다. 얼른 여주를 데리고 월하에게 데리고 가고 싶었다. 내 사람을 데리고 왔으니 내 새끼 손가락에 있는 붉은색 그 실 좀 엮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월하가 직접 엮어 주는 실은 영원을 담고 있었기에, 그녀와의 영원을 약속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피어났다. 그저 점지해서 묶는 실이 아닌, 월하가 제 손에 묶어 놓은 실을 월하의 손으로 하여금 그녀의 손에 걸고 싶었다. 선인이 욕심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에 입술을 움직였다.



"어여쁘구나, 너와 잘 어울린다."



나른하고 고운 미성이 방안에 퍼졌고, 메아리처럼 울렸다. 여태 살면서 수많은 말들을 들었지만, 이리도 설레는 마음은 처음이었다. 연분홍의 홍조가 발그레 그녀의 볼에 떠올랐다. 그마저도 사랑스러웠고, 품에 안고 싶었다. 억겁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늘 바라왔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니 이보다 더한 환상은 없었다. 그 모습이 퍽이나 사랑스러워서 품에 안고 잠들고 싶었다. 다른 선인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예전부터 삼신이 고이 점지해 놓은 그녀를 몰래 엿본 순간부터 그녀를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실현된 것만 같아서 그녀의 모습을 마음 놓고 눈에 담았다. 그러던 와중에 말을 타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여주에게 다가가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귓바퀴에 꽂아 주었다. 아, 이것은 필시 행복이었다.

눈을 마주하고, 이리도 행동하는 것이 여주는 마치 정국과 제가 은애하는 사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정신을 차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역시나 그의 맑은 눈동자가 좋아서, 또 그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게 좋아서. 여주는 저도 모르게 정국의 눈에 한 번 더 손을 뻗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뭐에 홀린 것처럼. 그에 정국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제 눈을 만져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하얀 손끝이 파리하게 살살 떨리는 눈꺼풀 위로 닿았다. 눈꺼풀 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손가락이 배회하다 눈이 떠졌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눈동자였고, 여전히 그 눈동자에는 자신이 담겨 있었다. 삼신 할매가 제 몸에 쉽게 손을 대는 자신을 봤다면 욕을 했을 수도 있다. 왜냐면 정국은 그 누구도 제 몸에 손을 못 대게 하는 선인이었고, 까다롭고 까탈스러운 선인이었기에.



"… 송구합니다. 그게, 정국, 당신의 눈이 너무 아름다운 탓에."



그 말에 순간 정국의 눈빛이 변했다. 맑은 눈동자가 약간의 욕심을 담고 있었다. 저리 말하는 여인을 가지지 못한다면, 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안 그런가, 삼신. 듣지도 못하는 말을 삼신에게 전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얄쌍한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녀에게서 나는 미약한 향기가 좋았다. 자신과 닮은 향이 난다는 사실에 욕심이 한층 더 짙어졌다. 선인이 욕심을 가지면 안 된다 하였는데, 왜 네 앞에서는 조절하는 게 안 되는지. 이미 몇백 년, 아니 몇천 년 전부터 모든 욕심을 버렸던 그였다. 그가 원하는 건 오직 자신의 반려였다. 자신이 찾던 그 사람이 앞에 있으니 여태 몰랐던 감정을 느끼는 건 당연한 것인데, 정국은 몰랐다. 그게 당연한 건 줄 몰랐다, 욕심이라는 것이. 한낱 인간만 가질 수 있는, 선인인 자신은 가지지 않아도 되는 감정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여주가 그 공식을 깨 버렸다. 그녀가 자신의 앞에 있으니 모든 것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세 달 동안 그녀가 자신을 건드리지 않길 바랐다.




"자극하지 마. 내 너와 한 약조를 지금 깰 수도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는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밖에 없었다. 결국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말았다.





-





한 가지 큰 변화를 꼽자면, 여주의 등장으로 인해 도원에 없던 규칙이 생겼다. 정국이 여주의 편의를 위해서 만든 일종의 약속이었다. 오직 혼자서만 인간의 삶을 유지하길 바랐기에, 또한 아직은 인간이길 정국과 약속했기에 정국이 자신의 도원에 살고 있는 선인들에게 지침을 내린 것이었다. 규칙이 생겼다고 해서 다들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이 여주에게 관심만 안 주면 되는 사항이었다. 하지만 선인들을 받드는 하인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사항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도원을 찾아 도피를 한 자신들을 받아 준 정국의 말이니, 거의 무조건적으로 들어야 했다. 어쩌겠는가,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고 영원을 살면서 받들며 살겠다고 약조까지 했기에. 선인과 한 약조는 어겨서 안 된다. 또한 선인이 먼저 약조를 깰 때가지, 그 약조는 영원하다는 것은 그들이 잊지 못하는 사항 중 하나였다.

모든 선인들과 하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 번 더 언급을 하기 위해서였다. 여주가 알지 못하게 하려고, 그녀가 잠든 시각에 모두 불렀다. 물론 정국의 말에 사신까지 총집합을 해 버렸지만 말이다. 붉은 머리가 제일 눈에 띄었다, 태형이었다. 장난기가 많은 태형이었지만, 그 또한 지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정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포함한 사신 모두가 정국이 만든 도원에 살고 있었기에. 단상 위에 올라간 정국이 입을 열었다, 여주를 위한 것을 만들어 놓았고 그녀를 위해서 이 도원에 규칙을 만들기 위해서. 낮지만 나른하고, 날카롭지만 고운 미성이 사람들에게 울려 퍼졌다. 어떤 이들도 그의 말을 숨죽여 들었다. 절대적인 권력의 중심, 정국의 말은 하나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됐다. 오직 정국의 목소리만이 장내에 맴돌 뿐이었다.



"그녀에게 인간이 먹는 음식을 내 주도록 해. 선인의 음식은 내 주지 마, 아직 인간이길 바라는 아이다. 그 누구라도 선인의 음식을 주었다간, 선인의 자격을 박탈하고 그대들을 다시 인간 세계로 돌려보낼 것이다."


"……."


"내 허락 하나 없이 함부로 그 누구도 청루전(淸淚殿)에 들이지 말도록. 혹여 그게 나와 관련된 사신일지라도. 주작, 청룡, 현무, 백호 넷 다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지 마. 오직 나와 있을 때만 만나도록 해."


"……."


"그리고 그녀는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니, 그녀와 마주친다면 인사를 하도록 해. 당신들에게 내 존재가 위에 있듯이, 그녀도 상전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녀가 곧 나라고 생각하고 모셔."



태형의 얼굴이 순간 구겨졌다. 그 재미있는 아이를 못 보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태형은 잠시 자기가 얼른 그녀가 선인이 되길 바란다는 말을 잊은 것인지, 한낱 인간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허공에서 맞물린 정국과의 시선에 먼저 그를 피해 눈을 돌렸다. 제가 주작으로 있으면서, 정국과 알고 지내면서 처음으로 마주한 눈빛이었다. 그의 눈빛에 욕망이 서려 있었고, 욕심이 보였다. 드디어 그가 가지고 싶은 게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고, 오직 그 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눈빛을 피했다, 처음 보는 그의 눈이 낯설어서. 혹은 그 감정이 제게도 묻어날까 두려워서. 잠시 말을 끊고 정국이 숨을 고르던 순간,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높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한 수백 개의 시선이 꽂혔다. 그리고 태형의 눈동자도 자신의 옆에서 말하는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은 주인공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게 익숙하다는 듯이 목소리의 주인공 시선이 정국과 얽혔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진 주인공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정국, 왜 우리가 그 의견을 들어야 하죠? 고작 당신이 데려온 그 '한낱 인간' 때문에?"


"한낱 인간이라 말했는가? 나에게 한낱 인간이 아니란 걸 청룡이 더 잘 알지 않는가."


"……."


"청룡, 난 그다지 자애롭지 않아. 그래서 그대의 발언을 용서할 생각도 없고."



용서할 생각이 없다는 건 진심이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거란 정국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여주를 위한 일이라면 뭐든 봐주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 진심을 느낀 반박의 주인공이 소리를 감췄다. 질문의 주인공은 청룡이었다. 여자 사신으로서 봄을 담당하던 그녀의 이름 이청(理靑). 푸르름을 다스린다는 이름을 가졌기에 청룡이 되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리고 여태 자신과 잘 지내던 정국이 한순간에 자신들에게 벽을 세우니 서운해서. 자신이 알던 정국이 아닌 것 같았다. 정국의 도원에 들어온 순간부터 정국은 모든 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그래서 그녀 역시 선인으로서 정국에게 마음을 품었고, 정국이 제 짝이길 바랐다. 정국 몰래 월하에게 가서 직접 정국과 엮어 달라고 말까지 했던 이청이었다. 하지만 월하에게 거절의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네 짝은 정국이 아니란다, 아가.'라면서. 그래서 여주를 위해 규칙을 만드는 이 순간 묘한 오기가 생겨서, 한낱 인간에게 사신인 제가 진 것만 같아서, 그래서 정국의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오직 정국을 원했던 그녀만.

일순간 분위기에 파동이 일었다. 부드러웠던 정국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에게서 한 번도 볼 수 없던 표정이었다. 모두가 낯선 표정의 정국을 처음 접했다. 오직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사신들만 알아볼 수 있는 묘한 변화에 이청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태형이 진작에 읽어낸 것에 대한 것도 이청 또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이치는 이청에게 비수가 되었고, 아직 보여 주지 못한 제 마음에 대한 거절이었고, 명백하게 이미 여주를 향한 마음에 대한 확신이었다. 이청의 붉은 입술이 보기 좋게 짓이겨졌다, 그녀의 이에 의하여, 자의로. 정국의 눈은 이미 그 아이를 염원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눈동자는 오직 여주의 앞에서만, 둘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버리곤 했다. 청룡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굳고 말았다. 맞다, 정국은 자애롭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뿐이지, 그는 자애롭고 배려가 넘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대로 있었을 뿐이다. 다만 그들이 너무 안일하여 정국에 대해 몰랐던 것뿐이었다.




"이청, 그대는 당분간 도원의 출입을 금하도록 하지."


"...정국, 그건!"


"청렴함을 상징하는 청룡의 자리에서 질투라, 그대와 어울리지 않는군. 내 다시 그대를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국! 정국, 잠시만요! 정국!"




청룡이 벌을 받았다. 정국의 여인을 '한낱 인간'이라고 칭한 것에 대한 벌이 내려졌다. 하지만 누구도 그 벌에 대해서, 그녀를 지킬 줄 알았던 다른 사신조차도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이의를 말했다가 쫓겨날 것 같아서. 당분간이라고 칭해졌지만 저것은 억겁의 시간을, 아니면 영원의 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사신에서 한낱 인간으로 한순간에 전락했다. 그렇게 정국이 떠나간 자리에는 그의 권위와 그 권위에 도전했다 패배한 자의 탄식과 서러움만 묻어났다.


절대적인 권력자, 그 중심에는 항상 정국이 있었다.




-





여주가 도원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에 여주의 입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선인들 사이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정국이 그녀 옆에 항상 달라붙어 선인들과 인사를 시키고, 또 친해질 수 있게 만들었다. 공주였던 그녀에게 일찍 일어나는 것은 습관이었다. 그래서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자연스레 일어나 앉았다. 정국의 밑에서 일하던 하인들은 여주가 일찍 일어나는 것에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되는 날부터 다들 여주의 일과에 점점 자신들을 맞추기 시작했다. 따뜻한 세숫물부터 화려하지만 단아한 곤색의 의복을 준비했고,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 주는 일상을 말이다. 여주의 하루 일과는 일어나기-정국에게 문안 인사-정국과 조반-정국의 친한 사람들과 인사-혼자만의 시간 등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일과는 정국과 함께 보내는 것이었다. 아직 정국이 편한 건 아니었으나 초반보다 정국과 있는 시간이 그나마 다른 선인들과 있는 시간보다 훨씬 편했다.

세수하고 환복을 마친 여주의 머리에 마지막으로 장신구가 꽂히고, 붉은 입술을 더 빛나게 해 줄 앵두 과즙으로 만든 분을 여주의 입술에 살짝 바르자 붉은색의 입술이 더욱 빛이 났다. 하인들은 저들도 모르게 여주의 미모에 감탄하고 말았다. 아름다웠고 어여뻤으며, 수려하고 화려했다. 그녀가 하인들의 손을 잡고 일어나 청류전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정국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에, 오직 여주와 그녀의 하인들만이 적화궁 내를 돌아다녔다. 곤색의 의복이 산들바람에 흩날리며 곳곳에 있는 복숭아나무 향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곳곳에 스미는 향기가 늘 여주의 폐까지 들어차는 느낌을 받게 했다. 서서히 동이 트는 과정을 지켜보던 그녀의 발걸음이 익숙한 곳에 당도했다. 여주의 발걸음이 묘혜전(卯慧殿)에 도착하자 다들 여주만 남긴 채 자신이 머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또한 정국의 지시였다, 아침은 여주와 함께 보내고 싶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보여 줬기에.

여주가 한숨을 쉬고 문을 두드리려고 할 때에 맞춰 문이 그녀의 기운을 느끼고 자동적으로 열렸다. 걸음이 문지방을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자동적으로 문이 닫혀, 굳게 잠겼다. 열 개의 문지방을 지나 최종적으로 붉은색의 문에 다다랐다. 끝내 열리지 않은 이 문, 그 너머에 정국이 있다. 자신이 공주였다면 누군가 고하고 들어오라고 명할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기에 직접 문을 열자, 이미 일어난 것인지 호롱불을 켜고 서책을 읽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정국의 시선이 여주에게로 꽂혔다. 제가 준비한 의복이 너무나 잘 어울려서, 제가 그렸던 그림에 너무나 잘 맞는 사람이 앞에 있어서. 가끔씩 자신이 상상했던 일들이 정국의 앞에 벌어지면 정국은 여주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둔한 여주는 제가 잘못한 것이 있나 생각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정국의 앞에 조심스레 다가와 앉은 여주에게 정국이 먼저 말을 걸었다. 여태까지는 늘 여주가 먼저 말을 걸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공주, 오늘은 네 이야기가 궁금하구나."


"제 이야기라니 그게 무슨."


"네 이름, 네가 살던 곳, 네가 겪은 일든, 또한 너의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다는 의미다."



그녀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여태까지 제게 이런 걸 물어봐 준 사람이 없었고, 관심을 가져 준 사람이 없었기에. 제 아비가 자신을 많이 사랑했지만, 이걸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을 많이 마주하지 않았기에. 제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말에 마음 한 구석이 깊게 요동쳤다. 시선에 흔들림이 생겼다. 다정함으로 무장한 이 남자는 자신의 궁금한 것에 대해 이미 다 말해 주자, 이제 네 차례라며 다정하게 물어봤다. 뭐에 한 대라도 맞은 것처럼 어버버거리고 말을 더듬자,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정국이 여주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에 여주의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부끄럽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걸 몰랐던 정국은 진짜 여주가 아픈 줄 알고 의원을 불러야 하나 생각했다. '어디 아픈 건가. 의원을 불러야겠다.'하며 바깥으로 일어나 나가려고 하는 정국의 손을 턱, 여주가 붙잡았다. 여주가 먼저 정국의 손을 잡은 게 너무 오랜만이라 뻣뻣하게 굳은 정국의 시선이 여주에게로 닿았다. 동그란 정수리로 내려앉는 시선이 퍽이나 달콤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의문으로 바뀌었다. 하얀 손가락이 여주의 동그란 머리 위로 닿았다. 선을 그리며 배회하는 손가락에 더욱 열이 오른 여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픈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그러니까, 그... 그게, 좀 많이 부끄러워서."



그렇게 말하고 여전히 꾹 잡고 있던 손을 놓지 못했다. 잡고 있는 손에 열기가 들어찼고, 땀이 슬슬 나자 여주가 먼저 손을 빼려 하자 정국이 그건 싫다는 의미로 그녀를 확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오늘도 슬슬 올라오는 복숭아 향은 그녀와 흡사 잘 어울렸다. 여주에게서 나는 복숭아 향을 맡고 있으면, 인간이어야 하는 여주가 꼭 선인이 된 느낌일 가져왔다. 사내의 품에 안기는 것도, 사내에게 손을 잡히는 것도 어색한 그녀였기에 또 몸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특히 정국과 있으면 더 그랬다. 저도 자신이 왜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유독 정국과 만나면 이렇게 몸이 굳었다. 정국이 몸에서 여주를 떨어트리고 눈을 마주했다.



"네 이야기를 듣고 싶은 자들이 꽤 있다. 기다려, 환복을 하고 같이 가도록 해."



자신의 이야기를 궁금하다고 하는 선인이 몇이나 더 된다니, 얼떨떨한 기분으로 정국의 방에서 나오자 그 안으로 그를 환복시켜 주기 위한 하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몇 분 후, 곤색의 철릭을 입고, 안에는 흑색의 저고리를 입은 정국이 방에서 나왔다. 그와 너무 잘 어울려서, 또 옷을 맞춰 입은 기분이 들어서 여주의 얼굴에는 복사꽃이 핀 것처럼 어여쁜 홍조가 피었다. 정국은 그녀의 볼을 톡 건드린 채 손을 잡고 그녀를 이끌었다, 아직 소개해 주지 못했던 그들이 있어서. 여주를 끌고 가는 정국과 정국에 이끌려 가는 여주를 따라 수십 명의 하인들이 뒤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에는 달달한 복숭아 향만 남아 있었다.

정국과 여주가 누각에 도착했다. 호수와 어우러진 다리, 그 다리를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 누각. 금류각(錦留閣), 비단이 머무르는 누각. 비단처럼 고운 물결을 따라 잉어들이 춤을 췄으며, 청색의 기와가 비단을 펼친 모습으로 부드럽게 곡선을 이뤘다. 그리고 그 누각에는 세 명의 사내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붉은 머리의 익숙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태형, 주작이었다. 그리고 검은 머리의 사내와, 흰색 도포를 입은 사내까지. 여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작인 태형과 친한 이들이라면 사신일 것이고, 검은색은 현무, 흰색 도포는 백호일 것이다. 그렇다면 청룡은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의문이 가득 들어찰 때 정국이 한 번 더 여주의 손을 이끌고 누각으로 향하는 다리를 건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발걸음에 여주가 뒤를 돌아보고 걸음을 멈췄다. 몇 남지 않은 걸음에 사내들의 시선도, 정국의 시선도 모두 여주에게 꽂혔다.



"왜 그러느냐?"


"왜 저분들은 들어오지 않으십니까?"


"하인들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어, 말 그대로 하인이기에."



정국의 말에 탄식이 흘렀다. 자신이 공주였듯이, 여기도 계급의 차이는 존재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여주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공주의 예법이 여전히 몸에 베어 있던 그녀였기에, 걸을 때마다 귀품이 흘렀고, 고귀했다. 우아한 그녀의 태도에 네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세 명은 정국의 시선에 의해 고개를 돌려야 했지만. 준비된 자리에 앉은 정국과 여주가 앉았다. 여주는 정국이 아니면 아직 눈이 마주치기 힘든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품위는 있었지만 아직 부끄러움이 많은 18세의 소녀였기에. 머리카락을 반만 묶고, 어여쁘게 자리한 장신구가 그녀와 너무 잘 어울려 한 번 더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 왜 정국이 저 아이를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차가 상 위로 올라오고, 향긋한 차 향에 빠져 있던 찰나에 기회를 노리던 태형이 정국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성격대로 천방지축에 장난기도 많고, 궁금한 건 또 못 참는 태형이었다. 정국 모르게 다른 친구들과 눈치를 주고받다 시선을 옮겼다가 저를 바라보고 있는 여주의 시선에 놀라 잠시 흠칫한 태형이었다. 잠깐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태형은 느낄 수 있었다. 저 눈, 자신이 언젠가 예지몽을 꾸었을 때 본 눈 같았다. 고혹적이며, 아름답고, 매력적인 눈. 언제였던가, 정국의 예지몽을 꾼 날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정국의 옆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곤색이었던가, 푸른색이었던가. 푸른색이 도는 옷을 입고, 그의 옆에 서서 웃는 모습을 태형은 보았다.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유일하게 본 것이 눈이었다.



"눈...."



유지되던 침묵을 뚫고 멍하니 터져 나온 태형의 한 단어에 정국의 시선도, 백호의 시선도, 현무의 시선도, 여주의 시선도 그에게 꽂혔다. 왜 몰랐을까, 왜 못 알아봤을까. 그저 푸른색의 옷만 보고 이청인 줄 알았다. 그래서 태형은 이청의 정국을 향한 마음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곤색의 옷을 입고, 정국의 옆에서 간간이 웃고 것이 이청을 의미하는 꿈인 줄만 알았다. 자신이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몰랐을까, 왜 지금 알았을까. 태형의 시선이 정국에게로 향했다. 정국과 허공에서 시선이 얽힌 태형이 정국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국은 제 꿈에도 개입하였고, 오직 여주 하나를 위해 이 세상을 만들었다. 그는 치밀한 계략가이자 전략가였고, 모든 운명은 그의 설계 아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때 '눈이 뭐? 뭔데.'하며 날카롭게 꽂히는 현무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태형이 아니라는 듯이 손사레를 치며 배시시 웃고 말았다. 그에 뭐냐며 추궁하던 그들이 태형이 여전히 함구하자 포기를 하고 여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백호의 목소리가 여주에게 전달되었다. 이름은 무엇이고, 어쩌다 궁을 나왔고, 어떻게 정국을 만나게 되었는지에 관한 게 듣고 싶었나 보다. 망설이던 여주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붉은 입술이 말을 할 것처럼 열렸다가, 다시 다물었다를 반복했다. 말을 하고 싶은데 사신에게 기가 눌려 제대로 말을 못 꺼내는 것이었다. 그에 정국이 '기 좀 죽이지. 말을 못 하지 않는가.'라고 말을 할 때야 셋 다 아차 싶어서 자신들의 기를 최대한 꼭꼭 숨겼다. 그래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일까. 정국의 시선이 여주에게 닿고, 그 시선을 느낀 여주가 정국과 눈을 마주했다. 저들이 자신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본 것처럼 자신도 궁금한 게 있었다.



"…저, 청룡은 없나요? 세 분이 주작, 백호, 현무인 건 알겠으나 청룡이 존재하지를 않아서요."



여주의 질문에 일순간 분위기가 굳었다. 현재 청룡인 이청은 정국에 의해 추방된 거나 다름없었기에. 여주를 제외한 세 시선들의 사신이 정국에게로 꽂혔다. 하지만 정국은 전혀 굳지 않은 온화한 표정으로 제 앞에 놓여진 차를 마실 뿐이었다. 혼자 여유로운 정국과 달리 셋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에 여주의 눈이 정국에게로 돌아갔다. 다들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정국에게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국, 당신은 답을 제게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라고 말하는 여주에 세 남자가 크게 놀랐다. 저리도 당당하게 물어볼 수 있는 여자는 이청 이후로 처음이었다. 혹여 정국이 화가 나기라도 한다면, 반려든 뭐든 그녀는 쫓겨날 것이 뻔하였기에. 정국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벌을 받고 있거든. 사람 하나를 모독한 죗값이란다."


"사람 모독? 죗값? 설마 사형입니까?"


"도원에서 최악의 벌은 추방. 내 입으로 직접 청룡의 추방을 명했느니라."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여주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 그는 도원의 시작이었고, 도원의 권력이었고, 도원의 중심이었고, 곧 그 자체가 법이었다. 그리고 청룡이 모독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제 자신을 뜻하는 것인 줄 안 여주가 고개를 돌렸다. 제 자신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저보다 위대한 사람들을 제 마음대로 보내고 들일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저 주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궁이 있었고, 선인들 밑에 있는 하인을 최대로 많이 보유했고, 선인 계급에서 제일 최정상이라고 칭해지는 사신들과도 말을 낮춰서 이야기를 한다. 그들보다 높은 자가 누가 있을까 싶었다. 빠르게 제가 읽었던 서책들의 내용을 떠올린 그녀의 머릿속에 지나치는 한 단어. 그리고 제 손을 잡는 정국을 마주했다.



도원의 주인, 하늘의 황제. 그는 천제(天帝)였다.






-






투표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업로드를 어제 하려 했지만, 내용을 구상하고 수정을 거치느라 조금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아직 2편밖에 올라오지 않았지만,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추가)

정국이는 옥황상제를 의미하고, 옥황상제라는 단어보다 천제라는 단어가 더 간결해서 이렇게 표기합니다.

또한 원래대로면 천황이라는 단어가 맞지만, 천황은 일본에서 쓰고 있는 단어이기에 임금 황을 대신하여 임금 제를 사용했다는 점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천제이기에 운명을 설계하는 것도, 도원을 만드는 것도, 누군가를 제 세계로 데리고 와 영원한 하인으로 삼는 것도 가능한 일이랍니다.

그렇기에 여주를 제 반려로, 또는 선인으로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내용 이해하시기 쉬우라고 몇 자 더 추가로 적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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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18.27
자까님 사랑해요. ㅠㅠㅠㅠㅠㅠㅠㅠ💕💕💕💕💕💕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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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87.211
진짜 너무 재밌어요 작가님ㅠㅠㅠㅠ 최고의 새해 선물이예요ㅠㅠㅠ
[란도]로 암호닉 신청할게욤ㅎㅎ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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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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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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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園
정상적으로 연재가 가능하다면 해 드릴 수 있는데, 혹시라도 제가 글을 안 쓸 경우에는 못 보내 드릴 수도 있다는 점 참고해 주세요!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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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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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園
3화 현재 작성 중이니 1화, 2화, 3화 합치고 나서 보내 드릴게요!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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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園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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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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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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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화 2화 텍스트 파일만 먼저 보내 드렸습니다, 확인해 주세요. :)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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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166.59
와 진짜 필력대박 너무 재밌어요ㅠㅠ최고,,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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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6
작가님ㅠㅠㅠㅠㅠㅠ으허 정말 대박인거 같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하늘의 황제라니...ㅠㅠㅠㅠㅠ멋지다 멋져ㅠㅠㅠㅠ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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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7
안녕하세요 작가님! 1편에서 첫번째로 댓글 단 사람입미당 제가 그때 너무 재밌어서 신알신만 하고 암호닉을 까먹었어요ㅠㅡㅠ [사과] 로 암호닉 신청할게요! 제가 요즘 실습때문에 하루하루가 피폐해져서 힘들어가지고 인티도 3일만에 들어왔거든요? 근데 신알신 뜨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정독했어요 세상 이렇게 재밌을수가 없습미다ㅠㅡㅠ 저는 초반부터 남주가 일방적으로 여주를 좋아하고 + 겁나쎈 남주에 환장하는데 정국이 둘다 포함되는게 너무 설레고 멋잇어요ㅠㅠㅠ 그리고 태태 빨간머리 언급되기 전에 여주 놀래켰을때부터 뭔가 태태같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청룡은 첫등장부터 악녀미가 너무 넘쳐서 걱정했는데 고민도 없이 칼같이 자른 정국이테 반해버렸어요ㅠㅠㅠ 바쁜 제 삶에 한줄기 빛이에요 도원은..❤️ 이렇게 올려주셔서 넘 감사드리고 장소 이름 하나하나에 신경 많이 쓰신거 티나는것도 감사드리고 늘 엄청난 분량으로 와주시는것도 감사합니다 흑흑 작가님 제 사랑 받으세요 3편도 빨리 보고싶어요 아! 암호닉 꼭 받아주세요ㅎㅅㅎ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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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8
너뮤 잘보고있어요ㅠㅠ 정국이 포스가 장난아니네여ㅠㅠㅠ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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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169.231
진짜 넘넘 재밌어요. 하나하다 빠지는 것도 없고 너무 맘에듭니다ㅠㅠ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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