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구두 한 번 신어볼랍니까?
w. 랑데부
"팀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10.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은데 저도 모르게 계속 생각하네요.
그럼 나도 미쳤다고 생각해요"
"악!"
"ㅇㅇ씨 왜, 왜 그래?"
"네? 아, 아니에요. ..정말 아무것도"
염병할 강영현. 한국으로 돌아와 마주칠거란 시나리오는 없었다. 다시 만나고 나서야 강영현은 매일 나의 머릿 속을 괴롭혔다. 나를 끌어안고, 내 앞에 서고, 내 입술..,
"아 진짜!"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아뇨 괜찮지가 않은 거 같아요.
*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어"
"나와요"
ㅇㅇ는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화장실에서 기어 나왔다. 안 걸릴 수 있었는데. 여튼 눈치는 빨라 가지고. 장장 14시간 동안 치킨을 먹고 뱉었으니 지쳐 늘어진 모습이 도dns의 눈에 선연했다. 문 앞에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서 있던 도운은 불연듯 돌아서 허리를 수그리고 앉았다. 업혀요.
"우응.."
도운의 등에 업히자마자 ㅇㅇ는 빠르게 녹아 내렸다. 주차장까지 가는 걸음 내내 목을 껴안았던 팔이 서너번씩 흘러내리는 턱에 그때마다 도운은 걸음을 멈춰 서고 고쳐 업었다. 누나 이제 내려야 하는데. 그리고 잠꼬대를 하는지 이번엔 도운의 목을 끌어 안고 통 놓아주지 않는 것아었다. 도운은 결국 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주차장을 뱅뱅 도는 도운에게 별다른 것은 없었다.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온통 ㅇㅇ의 걱정뿐이었다.
ㅇㅇ는 집에 도착해서도 잠에서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ㅇㅇ를 안아든 도운의 숨이 고르지 못하게 들이쉬고 뱉어지길 반복했다.
"고타 쉿, 안돼. 고타 안돼, 저리 가"
예상대로 문을 열자마자 고타는 ㅇㅇ에게 뛰어 들어 낑낑 대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봤다고, ㅇㅇ를 격하게 반기는 것을 보니 윤도운2과 명확했다. 좀 추운 거 같은데. 도운은 ㅇㅇ를 꼭 안고 보일러를 올린 뒤 계단을 올랐다. 아 윤고타.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사모에드는 결국 매트리스 옆에 먼저 자리해 제 발을 할짝 대며 앉았다.
도운은 ㅇㅇ를 눕힌 뒤에야 꾹 쥐고 있었던 주먹을 펼 수 있었다. 나름의 매너 손이라고 칭해보자. 그리고 도운은 주머니를 뒤적여 립밤을 꺼냈다. 음식을 관련한 CF가 들어왔을 때가 도운과 ㅇㅇ 둘 모두에게 가장 힘든 스케줄이었다. 입가가 다 헐어 잠에 든 새에도 찡그리는 얼굴에 도운은 손가락에 립밤을 덜어 바르기 시작했다.
"먹지, 야야. 윤고타"
단내가 진동하자 기어이 도운의 손가락을 혀로 감아 찹찹 핥아 먹은 고타 덕에 수어번이나 반복해야 했지만 말이다.
11.
"요즘 꽤 각광 받고 있어. 해외쪽에서 먼저 반응이 올라온 터라 진출 문제에도 괜찮게 작용할 거 같고. 고민할 필요도 없어, 하자"
"싫어요"
"왜?"
내가 아닌 것처럼 막 군 것도 모자라 이미지 하나 제대로 망친 사람 앞에 어떻게 서겠어요. ..물론 보고 싶긴 하지만. ㅇㅇ는 전속 모델 계약서를 손에 쥐었다 이내 책상에 내려두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선 보기라도 하자. 이번 컬렉션 너 잠수 타느라 보지도 못했잖아 어? 오늘은 간단한 촬영이니까 시간있어"
"안녕하십니까"
"아, 네"
"촬영 진행 사항 때문에 몇 가지 말씀 드리려고요"
내가 어쩌다 그것도 제 발로 D.A에 들어와서. ㅇㅇ는 스탭으로 보이는 남자쪽으로 의자를 돌리고 무거운 귀걸이를 매만졌다.
"이번 프로젝트는 저희 B팀이 진행한 거라 팀장님이 내려오셔서 다시 한 번 컨셉에 대해 이야기 나누실 거구요, 아마 그리고 바로 촬영 들어갈 겁니다"
"..혹시 강영현 팀장님,"
"아 네. 맞습니다. 알고 계시네요?"
그러게요. 이걸 제가 왜 알고 있는 걸까요.
"지금쯤 오셨을 거에요. 어 팀장..,"
"잠깐만요. 잠깐만요, 잠깐만 나가주세요"
"네? 아, 아 네"
ㅇㅇ는 몸을 벌떡 일으켜 대기실을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디 있지? 어디 숨지?
"나 좀 어디 숨겨줘. 아니, 아니다 어디 처박아줄래? 아무렴 뭐든 좋으니까"
"어어, ...흡"
"조용히 있어야 돼요"
마침 누군가에 이끌려 탈의실 뒤 작은 공간으로 쏙 들어간 ㅇㅇ는 고개를 들어 앞에서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 아 윤도운. 도운이었다. 덜덜 떨리는 큼지막한 손이 ㅇㅇ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소리를 죽이라 신호를 보냈다. 퍽 가까웠다. 도운이 조금만 고개를 숙인다면 입술이 닿을락 한 거리였다. 어 그러니까. ㅇ, 어.
"혹시 여기 ㅇㅇㅇ씨 못 보셨습니까?"
강영현 목소리다. 분명.
ㅇㅇ는 화들짝 놀라 도운의 품에 얼굴을 박았다. 아씨 강영현. 대기실 안을 저벅거리던 소리가 차츰 멀어지기까지 도운의 품에서 입을 꼭 막고 숨을 죽이던 ㅇㅇ는 대기실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막았던 숨을 내뱉었다.
"..ㅇ,아"
너무 가까웠다. 어느새 차분해진 도운의 잔잔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을때 ㅇㅇ는 틈에서 튕겨 나왔다.
"...미안"
"아이에요"
근데 너 맨투맨.. 미안해. 검은 맨투맨에 고스란히 메이크업이 묻어 있었다. 털어 줄게, 어떡하지. 손을 뻗어 도운의 가슴팍을 살살 털고 나서야 ㅇㅇ는 다시끔 메이크업을 수정 받고 문을 열 수 있었다.
"안에 있었습니까?"
"아 깜짝,"
갑작스러운 영현의 물음에 뒤로 발을 헛디딘 ㅇㅇ를 빠르게 잡아낸 영현은 ㅇㅇ의 허리를 고쳐 안았다. 인생을 몇 번이나 골로 갈 뻔 하는 거야 나.
"..놀랐잖아요"
"놀래킨 적 없어요"
와 한 마디도 안 져. 대단하다 이 남자. ㅇㅇ는 영현에게서 샐쭉이며 몸을 가두고 일어섰다. 말리고 싶지 않다. 웬지 이 남자에겐 죽어도 말리고 싶지 않았다.
간단하게 영현은 컨셉을 설명한 뒤 구두가 쭉 진열된 간이 신발장을 끌고 와 ㅇㅇ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아 ㅇㅇ의 발목을 쥐었다. 뭐 발목?
"지금 뭐하는.."
"일 하는 겁니다. 또 먼저 넘겨 짚지 마시고"
"내가 언제 넘겨 짚었다고 그래요"
"그러려고 물었잖아. 방금"
은근히 또 말 놓네. 이 남자 진짜.
타국에서의 영현은 지금과 비교해 좀 더 유한 편에 속했다는 사실이 그제야 ㅇㅇ는 깨달았다. ㅇㅇ에게 신길 구두를 체크하던 영현의 미간이 확 찡그려지며 영현은 책상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을 낚아 챘다.
"어 나야. 사이즈 5씩 줄여서 첫 번째 컨텍 라인 싹 다 바꿔. 시간 없는데 자꾸 실수 할 거야? 당장 가져와"
영현은 쥐었던 신발을 이동 신발장에 대충 올려두고 타투 펜을 입에 물었다. ㅇㅇ의 작은 발을 가볍게 쥔 영현은 복숭아뼈가 톡 튀어나온 부근을 꾹꾹 누른 후 산당화의 잎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이거 언제 끝날까. 꽃잎을 새기는 영현이야 어색할 새가 없었지만 자꾸 마음에 들쑥날쑥하는 남자가 발목을 쥐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ㅇㅇ으로써 어색함에 어찌 몸을 둘 바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저기 다시 가져왔는데.."
"두고 나가. 터칭펜 레드 계열 여기에 갖다 놓고"
"..저기 이거 언제 끝나요?"
"곧 끝나요. 간지러워요?"
"아뇨,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숨 막히게 어색해서 그냥 물어본 거에요. 영현은 혹여나 간지러운 건지 ㅇㅇ의 반응을 잠시 살피곤 다시 꽃잎을 몇 잎 더 그려가기 시작했다. 입술을 축이며 그림을 끝낸 영현은 물티슈로 조심스럽게 그림 위를 닦아냈다.
"..원래 직접 다 그려줘요?"
"아니요"
그리고 영현은 돌려 화이트 색상의 구두를 꺼내 와 조심스럽게 ㅇㅇ의 발에 신겼다. 매끄럽게 신이 신겨지고 영현은 리본을 빠르게 묶어 정돈했다. 직접 그려주는 거 아닌데왜 난 그려줘요? ㅇㅇ는 영현에게 묻고 싶었으니 영현은 좀처럼 슈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남자, 정말 신발 밖에 모르는 건 아닐까.
*
"수고하셨습니다. 혹시 ㅇㅇ씨 같이 회식, 가실래요?"
"네 저요? 아.."
"같이 가죠"
웬일이야? 녹진한 어깨를 매만지다 불쑥 걸어 들어온 영현은 별표정 없이 ㅇㅇ를 내려다 보았다. 도운아 갈래. 이럴 땐 웬만해서 도운의 허락이 중요했다. 특히 일주일 전 사고를 친 상황에서. 도운은 덥석 제 손을 쥐고 조르는 턱에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 생각보다 ㅇㅇ씨 친절하지 않아요? 분위기도 밝고"
"맞아요. 아닌가? 다 연기인가"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글쎄"
하긴 팀장님은 워낙 관심이 없으시니까.
말 없이 운전대를 잡는 영현에게서 그런 태도를 이상하게 여기는 팀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집과 회사, 유명했다. 워커홀릭에 디자인에 중독된마냥 어느 날은 퇴근도 않고 밤새 컬렉션을 짜기도 했으니. 차 안은 ㅇㅇ의 이야기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왜 그 여자한테 같이 가자고 했지.
나름 영현에게도 역시 사그라들지 않는 ㅇㅇ의 생각으로 복잡한 운전이었지만 속을 알아채기까지 겹겹이 쌓인 껍질들에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근데 ㅇㅇ씨 잘 안 먹네요?"
"아 제가 지금 다이어트 중이라.."
"에이 뺄 곳이 어디있어서"
되게 많아요. 용케 숨기고 있는 거지. 걱정보단 자리가 안정적이고 불편하지 않아 몇 잔의 술잔을 들이킬쯤 다들 각자 무리에서 대화를 하느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근데 강영현 저 남잔 말도 잘 없고 거의 혼자 마시네.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갔다. 이유를 모르니까 어쩔 수 없는 눈길이라고 하자. 조금 다가가 술을 따라주니 약간 풀린 눈으로 영현은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었다.
"..어 취했어요?"
"나한테 왜 거짓말 했어요?"
"네?"
"예쁘더라"
뭐라고? 그것보다 방금 그쪽 웃은 거야? ㅇㅇ는 입꼬리가 올라간 영현의 얼굴을 마주하고 당황했다. 웃을 줄도 알아 이 남자?
"그 하얀 드레스"
"예뻤다고"
"누나, 너"
12.
"윤도운, 윤도운 윤도..,"
"콜록, 켁, 누ㄴ, 콜록"
미안 아무것도 못봤어. 어, 그래 나 아무것도 못 본 거야.
물에 축 젖은 머리로 한 손에 티셔츠를 든 도운은 그대로 입에 물었던 칫솔을 뱉어낼 뻔했다. 너무 급하게 내려왔지? 나 그대로 돌아서 올라가는 걸로 할게. 너도 자연스럽게 다시 욕실로 들어가. ㅇㅇ는 도운의 가슴팍에 부딪히며 묻은 이마 깨에 물기를 닦아내며 후다닥 이층으로 올라갔다. 멍! 고타야 넌 또 어떻게 들어왔어.
"야 윤고타! 컥, 미안해요"
도통 빨랫판인 제 몸을 가려야 하는지 잔뜩 얼룩이 묻은 채 이층으로 뛰어 올라간 고타를 잡아야 하는지 우왕좌왕하던 도운에게 낑낑 대며 고타를 안아 건네 주었다. 둘 모두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 맞는지 갈팡질팡하다 동시다발적으로 ㅇㅇ는 매트리스에 몸을 묻었고 도운은 고타를 끌어 안고 우당탕 일층으로 내려갔다.
이후 조심히 욕실을 들어가니 욕실의 물기는 한 치 없이 모두 닦여 있었다. 도운아 물기 네가 닦았어? 네? ..아 네. 혹여 넘어지기라도 할까 도운이 나오며 깔끔하게 닦아 둔 것이었다. 도운은 붉게 묽든 귀를 숨기기 위해 부엌으로 빠르게 들어가 욕실문이 닫히자마자 제 뺨을 두들겼다.
등신아 귀는 왜 빨개져.
*
-"미안해요.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내가 애야.. 괜찮아. 조심해서 갔다와"
-"무슨 일 있음 바로 연락해요. 알겠죠?"
알았다니까 너 그 말만 지금 세번째야. 끊고 잘 갔다 와. 부득이하게 휴가를 쓰고 부산으로 내려간 도운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걱정이 쓸모 없는 걱정이 아닌 이유는 물론 수두룩했다. 결정적으로 도운은 알지 못했지만,
-어디로 숨었어.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02:55
-자기야 전화 좀 받아봐 02:57
"..여보세요?"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요"
영현이었다. 밤새 스토커의 문자와 전화에 시달려 잠을 자지 못한 ㅇㅇ가 입술을 씹으며 연락을 했던 건 영현이었다. 아무리 연락처를 뒤져도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친구도, 가족도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새벽녘 미친듯이 울리는 전화에 겁을 먹어 영현에게 걸었던 전화는 답 없이 끊겼고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 다시 새벽이 됐을 때 울린 전화를 구세주라도 된 듯 쥐어 받았다.
"저기 그러니까.."
"네"
"지금 시간 있어요?"
"새벽 3시에요. 지금"
영현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맞다 지금 세시구나.. 사실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단지 그 누군가가 필요했다. 언제 이 집까지 알아낼지 모르는 일이었고점점 더 시간의 간격을 좁히며 옥죄어 오는 불안감이 두려웠다.
"..미안해요"
"지금 어딘데"
"네?"
"어디냐고요"
금방 갈 테니 기다리란 말과 함께 전화는 끊어졌다. 한 시라도 전화를 끊지 말아달라는 부탁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이랬다간 진짜 안 올지도 몰라서.
ㅇㅇ는 급하게 모자를 눌러쓰고 녹색 목도리를 둘러맸다. 운동화를 구겨 신고 불안감에 집에서 뛰쳐나가 그 어디라도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한참을 공원을 헤매던 차 울리는 전화에 ㅇㅇ를 빠르게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대었다.
"녹색 목도리는 안 추워?"
"..."
"감기 걸려. 어서 집에 들어가"
소름끼치는 목소리였다. 소름끼치게 긁히는 목소리였고 소름끼치게 어둑한 목소리였다. ㅇㅇ의 발밑으로 휴대폰이 가차 없이 추락했다. 여러갈래로 금이 간 휴대폰을 내려다보지 못한 채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눈물이 베어 나오고 목도리가 떨어지는 감촉은 ㅇㅇ를 잡지 못했다.
"아, 아으.."
알 수 없는 골목으로 들어와 달리던 차 물이 고여 얼어버린 바닥을 밟고 굴러 넘어진 ㅇㅇ는 땅을 짚었던 손바닥을 감싸 쥐었다. 쓰라린 생채기에서 금방 피가 맺혀 흘렀다.콘크리트 바닥을 굴러 뺨 어느 부근에 깊게 무언가 박힌 느낌이 들었지만 도망쳐야 했다. 어깨가 바스라진 것만 같았다. 발발 떨리는 몸을 간신히 끌어선 ㅇㅇ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남자의 목소리 너머 바람 소리가 들렸다. 새벽 세시, 그 남자는 가까히 있었다.
"흐윽, 흐.. 아!"
"하아, 나에요. 강영현. 나라고"
순간적으로 ㅇㅇ를 낚아채 꼭 안았다. 비켜, 가. 가라고.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 치는 ㅇㅇ를 끌어 안은 것은 영현이었다. ㅇㅇ 못지 않게 온 몸이 땀으로 젖어 헉헉대던 영현은 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모든 행동이 멎는 ㅇㅇ의 양 볼을 쥐었다.
"괜찮아요?"
"..아니 끅, 강영현씨... 흐으"
"무슨 일, 걱정했잖아!"
제 손을 쥔 ㅇㅇ의 손도 뺨에 깊게 베인 상처도 피투성이였다. 영현은 놀란 마음에 다그쳤던 언성을 줄였다. 미안, 미안해요. ㅇㅇ를 끌어 안은 영현은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다리에 힘이 쫙 풀려버린 ㅇㅇ를 받아낸 영현은 제 위에 ㅇㅇ를 앉히고 아이처럼 우는 ㅇㅇ를 진정시켰다. 놀라서..미안해. 미안해요.
유독 시린 밤이었다. 눈물이 멎지도 않았는데 진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영현은 한참 ㅇㅇ를 안고 숨을 몰아 쉬다 제 코트를 벗어 ㅇㅇ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리고영현은 제 셔츠 자락으로 흙과 혈흔으로 엉망이 된 손을 살살 닦기 시작했다. 골목이 떠나갈 것 같았다. 이 울음소리에, 이 시린 추위에.
*
-영현 시점-
처음부터 머릿 속에서 삐꺽거렸던 이 여자는 끝까지 놓아주지를 않았다.
새벽 세시에 갑자기 걸려온 전화는 어이가 없었으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웬지 마음에 걸려 코트를 집어 들고 영현은 급하게 시동을 걸었다. ㅇㅇ가 대충 설명한 곳으로 향했을 땐 ㅇㅇ는 이미 없었다. 대충 눈썰미로 훑었던 ㅇㅇ의 휴대폰만 덩그러니 공원에 부서진 채 남겨져 있는 것을 보자마자 영현의 심장이 시린 바람을 단숨에 들이킨 듯이 얼어붙었다.
"어딜 간 거야.. 미치겠네"
아무생각 없이 길가를 미친듯이 뒤지다 가로등의 수명이 다해가는 어느 골목에 얼룩이 뒤범벅 된 채로 떨어져 있는 녹색 머플러가 영현을 애타게 만들었다. ㅇㅇ의 것이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으나 영현은 불안해졌다. 숨 한 번 제대로 몰아 쉬지 않고 달렸다. 제발, 제발. 뭘 그렇게 바랐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 영현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흐윽, 흐.. 아!"
"나에요. 강영현. 나라고"
그리고 때마침 앞에서 달려나온 인영을 보고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달려가 끌어 안았다. 걱정했잖아. 내가 얼마나.. 왜 이리 간절했는지 ㅇㅇ를 안는 순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울컥해 말을 좀처럼 이을 수 없었을 뿐이다.
*
"..제성, 죄송합니다아... 미안합니다"
"제가아, 죄송합니드아.."
ㅇㅇ는 잠에 든 내내 사과를 반복했다. 한국에서 만난 ㅇㅇ의 모습은 타국에서 보았을 때와 아주 달랐다. 물론 이건 나의 기억이 내린 결론이지만. 충동적이었고 연신 활짝활짝 웃으며 지나는 사람들에게도 스스럼 없이 다가가곤 했다. 그러나 촬영 내내, 회식에서도 ㅇㅇ는 그 누구와도 말을 잘 섞지 않았다. 기본적인 대화만 나눌 뿐이었다. 같은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차분했고 뭐든 절제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ㅇㅇㅇ는 잠에서도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찍지 마세요"
"예?"
"찍으시며는.."
이젠 작은 손바닥을 펴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시달렸으면. 한참을 낑낑대며 뒤척이는 ㅇㅇ를 방문 앞에 기대 바라보던 영현은 책을 덮고 조심히 ㅇㅇ가 누운 침대 앞에 자리했다. 작은 손바닥이 영현의 손에 의해 꼭 잡혔다. 이렇게 하는 건가. 어색한 왼손이 ㅇㅇ의 배 위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누굴 재워본 적이라곤, 아 기억하고 싶지가 않다.
"...괜찮아"
영현의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한 듯 ㅇㅇ의 표정이 금방 풀어지기 시작했다. 낑낑 앓던 숨소리는 금방내 색색 되며 안정 되었고 ㅇㅇ의 작은 손은 영현의 엄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쥐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영현은 저도 모르게 꽤나 오랫동안 ㅇㅇ를 내려다 보았다. 뽀얀 피부 위로 진 피딱지가 퍽 마음에 걸렸다.
무슨 꿈을 꾸고, 무슨 일이 이 여자에게 일어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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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알신 알림수가 400이 넘었습니다. 이 글을 보고 계신 모든 분들게 큰 절 한 번 올리겠습니다.
글을 올리기 전 독자의 입장으로써 한 번 더 읽어보곤 하는데 분량을 너무 확 줄여 양심의 가책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자주 오는 것 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아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즐겁고 기다려지는 글을 쓰기 위해 저는 더 많은 노력을 하며 이어 나가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