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여기 쏘주 한병 더여-!”
“우리 결혼하자.”
에?
식탁 위에 쌓여가는 초록색 참이슬병이 비어갈때쯤 내 시선은 포차의 주류냉장고에, 그리고 녀석의 시선은 내 빈 지갑에 박혔다.
공교롭게도 동시에 튀어나온 말에 취한 뇌는 인지부조화를 거쳐 두 박자 늦게 소리를 뱉어냈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장님이 가져다 준 새 이슬병을 땄다.
푸프프, 고개를 흔들며 하나 남은 닭발을 앞접시로 가져가자 쓰읍- 하며 다 굳은 안주를 굳이 반으로 갈라 가져가는 쫌생이의 입에서 나온 말을, 나는 한번, 두번, 그리고 세번 곱씹어보곤 눈을 비볐다.
미친새끼가, 방금 뭐라고 한거지?
“마 취했으면 발닦고, 어? 즈암이나 즈아라~”
“취한건 너고요, 탁자에 코박기 전에 대답좀 하고 뻗어라.”
쪼르르 잔에 술을 붓던 녀석의 핀잔이 따가운 시선과 함께 날아온다. 하-나, 이 도른자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이 도통 나오지를 않는다.
그의 말마따나 취해서 그런건지, 아님 얼척이 없어서 그런건지 분간도 가지 않을 지경이다. 아마 이건 지독히 현실적이고 찝찝한 꿈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게 눈앞이 흔들린다.
아 졸라 울렁거린다. 그래, 이건 악몽이야. 오른손을 들어 허벅지를 짝 소리나게 때려보는데, 딱 소리가 들린다. 허벅지와 손바닥이 만나면 딱 소리가 나지 않는다. 짝이지 딱이 아니란 말이다.
'
“아! 씨댕- 돌았냐?”
뒤늦게 이마가 아프다. 내 것이 아닌 길고 야무진 손가락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븅, 꿈 아니거든요.
얄미운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 울린다. 코를 쿨쩍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더니 추운지 두 손을 슥슥 비볐다가 잔에 남은 소주를 털어넣는 녀석의 재수없는 면상이 보인다.
올 나간 빨간 목도리에 거뭇하게 탄자국이 남은 깔깔이 잠바. 그리고 십년 전에도 쓰고 있던 방울달린 털모자가 흐릿한 눈 앞에 너울거린다. 진짜 지긋지긋하다 이놈아.
생각이 생각으로 남았는지, 입밖으로 나왔는지, 방금도 기억이 나지 않아 눈을 감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다섯달 만에 만나는 주제에 아직도 만나면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와, 허언증 도진 새끼.
“야 자냐? 대답은 하고 자랬지 내가.”
짜식이 끝까지 입은 살았다. 발목에 바위를 매달고 바다에 던져도 주댕이는 물 위에 동동 뜨겠지. 엉뚱하게 드는 생각에 흔들리는 몸의 중심을 겨우 잡고 푸스스 웃었다.
결혼? 결혼같은 소리하네. 소꿉놀이를 할 때면 저는 아빠가 아니라 백수 삼촌을 하겠다고 우기던 빽빽이 전정국이,
내 머리에 샴푸 대신 제모제를 발라서 이단 옆차기를 맞고 뒹굴며 울던 찌질이 전정국이,
항상 치킨이 하나 남으면 나 말고 저가 처먹겠다고 악착같이 젓가락을 들이밀던 쫌생이 전정국이가, 갑자기 나더러 우리 결혼이나 하자고.
“진짜 지랄 좀 하지 마세여.”
“아 지랄 아니라고.”
“내가 보기엔 니 취했어. 근데 쉬벌 몇달간 노다가판에서 일하더니, 평소에 안하던, 뭔 이상한 주정이 생겼어.”
“야 진선미!!”
전정국이 소리를 지른다. 울통이 커서 목소리가 좁아터진 포차 안에 쩌렁쩌렁 울린다.
어린노무 섀끼가 어른 자는 걸 방해해! 옆테이블에 신발까지 벗고 자던 취객 할아버지가 빽 고함을 치자 화들짝, 전정국이 놀란다. 지가 소리질러놓은 주제에, 쫌생이 새키 지가 놀란다.
프허허, 넋을 놓고 소리내어 웃었다. 허허허, 벗겨진 머리에 넥타이를 쓴 3번 테이블 부장님도, 신발 벗은 할아버지도, 닭똥집을 서빙하던 사장님도 전부 고개가 우리 쪽으로.
쪽팔리니까 좀 안 웃으믄 은드느-, 그 모든 따가운 시선 중에 이를 악물고 말하는 전정국의 얼굴만 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전정국의 표정은, 아주, 진지하다.
“껄껄껄 하고 웃음밖에 안나온다 이 미친놈아. 너 진짜 혁신적인 또라이니?”
“나라고 하고 싶어서 물어보는 줄 알어?”
“지랄, 장단이나 맞춰줄게 들어보자. 왜 갑자기 부랄친구더러 결혼하자고 개소리로 무게 잡는데?”
“…여자애가 부랄이 뭐냐 부랄이, 묻는 내가 비참해지게.”
“어 수고해 나 갈게-”
“아니, 야!”
가방 들고 일어서는 나를 전정국이 다급하게 잡는다. 말이 잡는다지 팔을 홱 잡아챈다.
어어, 중심을 못잡은 나는 다시 앉아있던 의자에 턱 앉혀지고 우스운 자세로 서 있던 전정국이 인상을 팍! 찡그린다.
아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보라고-. 뭐 잘했다고 떵떵거리면서 가슴까지 주먹으로 퍽퍽 치면서 호소를 한다.
우리가 맨정신으로 카페 같은 곳에서 만났더라면 나는 그의 얘기를 좀 더 진지하게 들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나의 18년지기 부랄친구 전정국은 특기가 술을 먹으면 반반한 얼굴로 올곧게 개처럼 짖기다.
진짜로 개가 되는 날도 있지만 대개 개소리로 내 가슴에 천불을 지른다는 의미이다.
나는 빠르게 수긍하는 척을 하면서 핸드폰 카메라의 동영상 녹화 버튼을 눌렀고, 그는 미처 띠링- 소리를 듣지 못했다.
“너, 이번에 대학 휴학한 거 국장 못받아서 그런 거지. 아줌마 재혼하시면서 세대주 이름 바뀌어서, 소득분위 올라가면서 등급 떨어진 거잖아. 아냐?”
“이 자식이 지금 염장을 지르나, 내가 김지숙 여사 얘기 꺼내지 말랬-”
“야, 내가 널 안 게 몇년인데 척하면 척이지. 넌 그 콩가루 집안에서 하루빨리 나오고 싶고, 나는…”
으르렁대는 날 보고도 자신있게 운을 뗀 전정국이 갑자기 말을 흐렸다. 18년을 같이 보내면서 알게 된 녀석의 버릇이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를 비집고 나왔다.
코를 손등으로 슥 문지르고 허벅지를 양손으로 짝 치면서 헛기침을 하는 저, 저 눈에 띄게 수상한 버릇. 이건 백퍼 전정국이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얘기다.
어, 어! 손가락을 뻗어 녀석을 가리키며 쓰읍, 소리를 내자 시선을 피하던 전정국이 때가 탄 털모자를 한번 벗었다 고쳐썼다. 이건 대놓고 나 수상하지만 꼭 숨겨야 할 비밀이 있소 하고 외치는 모양새다.
미친놈아, 돌려차기 날리기 전에 똑바로 한국말 씨부려라.
“니는 뭐.”
“어어, 아니…”
“말 끝까지 똑바로 해라.”
“후, 그니까 선미야…”
뭔 대단한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전정국이 심호흡을 한다. 라마즈 호흡법에 이어 소주까지 한잔 더 따라 원샷한다.
이쯤 되니 무섭다. 전정국은 원래 말을 할 때 뜸을 들이지 않는다. 애초에 생각을 하지 않고 말을 한다고 나한테 욕이란 욕은 다 먹어오던 애다.
나는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을 눈 앞에 둔 듯 몸을 쭉 뒤로 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임신했어.”
이게 뭔 소리냐고.
“그래서 집이 필요해.”
그니까 이게 뭔 개짖는 소리냐고.
“너 그냥 미친놈이지?”
아, 얘기를 안했던가. 참고로 전정국은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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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용 눈썹 화면에서 다 날라가는건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