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백성들을 굽어 살피고 온 만물을 손에 쥔 자이니, 가진 자를 엄하게 다스려야하며 백성들에게 연민을 품어야 하느리라. 하늘 아래 감히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꽃이 피었으니. 그 고귀한 것에 거름은 물론이요, 꽃이 될 수 있도록 바람이 불면 그것을 품에 가두어 피어난 잎이 바람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고, 비가 내린다면 빗방울에 견디지 못해 가까스로 핀 고개가 쳐지지 않게 그것을 품에 안아야 하느리라. 그 누구도 쉽게 가질 수 없는 꽃을 가진 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일화월명-이 세상 영원한 것이란 없다.
"석아, 바람이 참으로 좋지 않느냐."
시렸던 겨울이 가고 꽃들의 계절인 것마냥 눈을 돌리는 곳엔 아름다운 꽃들이 빽빽하다. 물론, 이 삭막한 궐 속에도. 그의 옆에 있던 민석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묵묵히 대답만 할 뿐이었다. 이조판서의 하나뿐인 자식이자 훌륭한 인격과 충성심을 지닌 민석이었다. 이에 걸맞게 인물 또한 뒤쳐지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사내처럼 생긴 늠름한 이목구비에 비해 무언가 모를 묘한 모습을 지닌 자에게 어찌 고개 한 번 돌려보지 않았겠는가. 조선 천지에 이만한 사내는 없을 거라 아마 모든 판서나 양반댁의 있는 여즉 머릴 올리지 않은 규수들은 그리 생각했을 것이니라.
"전하, 하늘을 보아하니 곧 비가 내릴듯 하옵니다. 비를 맞아 고뿔이 들지 않게 어서."
시원한 바람은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을 예상하였는지 하늘을 올려다 보니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서둘러 발걸음을 돌리려는 민석의 말을 자른 건 그였다.
"저것이 보이느냐."
그가 가르킨 아직 다 피지 않은 이름 모를 꽃이었다. 만약 저것이 곧 내릴 이 비를 견디고, 서늘한 바람에 견디며 핀다면 참으로 예쁠 것이라 민석은 생각했다. 허나 궐에 심어둔 꽃들에 섞이기엔 부족하였다. 민석은 워낙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무언가 더 많이 가졌다면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겼고, 자신의 부로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 철 아름답게 피고 말 것에, 고작 저 아름다움에 눈이 뺏겨 손을 뻗은 연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온통 푸른색으로 가득한 곳에 유독 눈에 띄는 새하얀 꽃봉우리의 자태가 어여뻐서? 이름 모를 저것이 왕의 눈길 하나 얻었던 것이 샘이 나서? 자기도 모를 의문에 휩싸여 그것을 꺾으려 발을 뗐을 때 그가 민석을 저지했다. 민석이 놀라 다시 발걸음을 돌렸을 때 그는 꼭 미처 보듬어 주지 못한 것을 대하듯 말하였다.
"아직 제대로 된 꽃도 피지 않은 것이 아니냐. 저것을 꺾으면 힘들게 피어낸 저 꽃봉우리는 얼마나 가여운 것이 되겠느냐."
민석은 짧은 탄식을 내며 그에게 고개 숙이며 그에게 송구하단 말을 올렸을 땐 이미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을 참이었다. 지금 내리는 이 비는 잠깐 내리고 그칠 소나기가 아니라고 민석은 생각하였다.
서둘러 내려온 것이 다행이지, 조금만 더 늦었다간 옥체에 무리가 가셨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궐의 뒤엔 언덕이자 큰 벌판이 있었다. 어렸을 적 연신 무릎을 두드리며 어린 루한세자와 힘겹게 올라간 한없이 높았던 그곳은 이제는 그리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비는 민석의 예상대로 오랫동안 내렸다. 쉬지 않고 떨어지는 빗방울들의 소리를 들으며 아까 보았던 그 꽃이 혹여 바람에 휩쓸려 꺾어지진 않았을지 걱정이 되는 민석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빗방울 소리만이 가득했던 적막을 먼저 깬 것은 그였다. 민석은 말했다 장마도 아닌데 쉼없이 내리는 이 비가 조금 야속할 뿐이라고.
"아뢰옵건데, 전하. 아까 보았던 그 꽃에 연민을 품으셨던 연유는 무엇입니까. 한 철 피고 질 꽃 아니옵니까."
민석은 말하고도 한참을 생각했다. 왜 이걸 물었을까, 그냥. 그냥 채 피지 않은 저 꽃이 불쌍해서, 아님 이 넓은 허허벌판에 꽃이라도 피어있음 훌륭한 장관이라도 만들어 낼 것처럼 보여서, 그럴 수도 있는데 굳이 왜. 한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괜한 것을 물었나 싶어 '송구하옵니다'라고 말하려던 찰나 그가 입을 뗐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 철 피고 질 꽃이 아니더냐. 궁 안 이름도 모를 심어논 꽃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그저 그런 꽃. 인위적으로 물을 주고. 혹은 거름을 주는 것들을 보다 자연이 낳은 저것을 보면 한없이 깨끗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만약 네가 그 꽃을 꺾어 궐 어딘가에 심어뒀더라면 과연 그 꽃은 아까 보았던 것처럼 아름답다 느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저 인위적인 것들에 묻혀 고운 자태 한 번 내지 못하고 누군가의 발에 밟혀 혹은 눈에 띄지 못한 채 시들어만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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