ㅊ
첫 눈
written by 해련
우리 집 대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마주하는 얼굴이 있다. |
우리 집 대문을 나서면 어김없이 마주하는 얼굴이 있다. 벌써부터 아른거리는 녀석에 얼굴에 목 뒤가 뻐근해져옴을 느꼈다.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목을 간지럽혔다. 밖이 춥다며 따뜻하게 입고가라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지만 집에 들어가서 목도리를 가져오기는 너무 귀찮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10분이었다. 서둘러야 했다.
" 누나! " 오늘은 그냥 조용히 넘어가나 했더니 역시나 들려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뒤를 돌아보니 왠일인지 사복차림을 한 녀석이 내 뒤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주인공은 이제 열여덟 , 옆집 사는 새파란 고딩. 1년 전부터 이 시간대에 나를 기다리던 아이는 참 한결같은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때는 작년 크리스마스. 어김없이 소개팅을 실패하고 술에 떡이 되어 온 나를 보고 건낸 아이의 첫마디는 ' 반했어요. ' 였다. 그 때는 애새끼가 나를 놀리나 싶어서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냥 내 처지가 서러워서 그래, 고오맙다! 하고 외쳐준 것 뿐이었는데 그 뒤로 아이는 끈질기게 나를 쫓아다니며 사귀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출근시간, 퇴근시간에 맞추어 항상 대문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내가 왜 좋으냐 물으니 그냥 웃기만 했다. 생각해보면 참 어이가 없었다. 그 짓이 벌써 1년 째이다. 좋은 아침! 하고 외치는 녀석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이고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래, 그러려고 했는데.
" 오늘은 치마 입었네요? "
약간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내 뒷통수에 꽂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내 뒷통수를 가격했다. 오늘도 소개팅? 애새끼가 진짜.
" 아니? 카페 오픈하러 가는데? 그리고 누나가 맨날 소개팅만 다니는줄 아니? "
누가 보면 입가에 쥐난 줄 알겠다. 고딩이 경련하는 내 입꼬리를 보면서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떡하니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눈에 한껏 힘을 주어 녀석을 째려보았다. 녀석이 귀엽다며 또 웃었다. 그리고 하는 말. 누나 남친 없는거 다 아는데.
십할.
" 너 지각하겠다, 빨랑 꺼지렴. 훠이. "'
시크하게 한 마디 던지고 녀석을 피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자 가방 끝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녀석 때문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딩을 쳐다보기만 했다. 누나, 그거 알아요? 뭐 새끼야. 그리고 덧붙이는 녀석의 말에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 오늘 크리스마스 이븐데요. 학교 안가요. "
애써 담담한 척 응, 하고 대답하긴 했으나 붉어지는 얼굴을 어쩔 수는 없었다. 그리고 뒤이어 드는 생각은 나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벌써 크리스마스 이브라니. 이번 크리스마스도 어김없이 혼자 보내게 생겼구나.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겠지? 노처녀. 시집 가라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한껏 우울해졌다. 그러나 그럴 생각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녀석이랑 실랑이하느라 벌써 10분이 흘렀다. 망했구나. 나는 녀석의 어깨를 힘껏 밀치고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고딩의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나, 인사는 해주고 가요! 그리고 소개팅 그만 보러 다니고! 나 진짜 서운하거든?! "
진짜 한결같다.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을 닦고 열심히 쓸고 닦기를 반복했다. 오픈시간은 8시 30분. 분주하게 청소를 끝내고 가까스로 문을 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지 벌써부터 거리에 연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괜히 짜증이 났다. 그러나 곧이어 들리는 딸랑, 하는 종소리에 생각에 잠길 겨를도 없이 분주히 일을 시작했다. 역시나 손님은 많았고, 카페 안은 곧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기려는 연인들과 가족들로 가득 채워졌다. 차라리 이게 편했다. 일이 끝나면 곧 바로 소개팅 자리로 가야한다. 벌써부터 느껴지는 그 어색하고도 간지러운 느낌에 괜히 팔뚝을 한 번 쓰다듬었다.
기다려지지 않는 시간은 빨리 오기 마련이다. 바쁘게 서빙에만 집중하다보니 어느덧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나는 알바생들에게 카페를 맡긴 채 약속장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장소는 10분 거리의 고급 레스토랑. 약속시간은 1시 30분인데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느릿하게 걸어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 가기 싫다.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는 어쩐지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내 발목을 휘어잡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 누나 이제 소개팅 가나봐요? "
손에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나를 주시하고 있는 고딩. 세훈이였다. 컵에는 우리 카페 로고가 크게 박혀있었다. 뛰어왔는지 한 겨울에도 땀을 뚝뚝 흘리던 녀석이 잠시 숨을 골랐다. 무슨 심보로 여기까지 왔나 싶어 딱딱한 눈매로 얼굴을 쳐다보자,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 꼴이 영락없는 고등학생이었다. 귀여워서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 안가면 안돼요? "
안 돼. 단호하게 대답하는 내 말에 더욱 울상을 짓는 녀석. 그러다가 녀석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어 나는 눈알만 도륵도륵 굴려댔다. 찬 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귀 뒤부터 뺨께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누나. 매일 지겹게도 들어왔던 그 한 마디가 내 귀를 후벼팠다.
" 이제 받아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누나도 지겹게 들어서 알잖아요. "
내가 누나 좋아하는거. 평소처럼 장난스럽게가 아닌, 진지하게 말하는 녀석의 모습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녀석이 가까이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고딩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로 전해져 왔다. 아주 작은 소리로 녀석이 속삭였다.
" 누나도 나 좋아하는거 아는데. "
녀석은 그게 문제였다. 나를 너무 잘 알아.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맴돌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급한대로 아무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들켜버린 진심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고딩아.
" 누나 나이가 벌써 서른하나야. 우리 열 살도 넘게 차이나는거 알아? 너네 부모님이 아시면 나 진짜 죽어. 도둑년 소리 듣는다니까? 알아? 그리고 누나는 이제 가볍게 연애만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냐. 노처녀 소리 듣는 나이라고. 엄마는 시집가라고 맨날 들들 볶아대는데 어쩔 수 있겠어? 주위 둘러보면 누나보다 이쁘고 젊은 여자애들 널렸어. 응? 누나는 네가 싫은게 아냐! 근데, 그게 그러니까.. "
거침없이 둘러대는 내 입술위로 차갑고 하얀 고딩의 손가락이 내려앉았다.
" 쫑알쫑알. "
무슨 랩하는 줄 알았어요. 시크하게 한 마디 내뱉고는 고딩은 미련없이 뒤 돌아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벙찐 표정으로 녀석의 뒷통수를 쳐다 보다가 아차! 하고는 약속장소로 뛰기 시작했다. 하이힐을 신어서 그런가, 아니면 다른 이유인가. 자꾸만 느려지는 발걸음이 야속했다. 그리고 나는 똑똑히 들었다.
누나는 나랑만 있으면 항상 바쁜가 봐요.
그 말이 그렇게 내 발목을 잡았다.
" 안녕하세요. "
예상대로 소개팅 상대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키는 제법 훤칠하고 얼굴도 훈훈하게 생겼다. 나를 보자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는 예의바르게 웃는 남자는 매너가 습관인 듯 했다. 나는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래서 그냥 파스타만 깨작거렸다. 그러나 도저히 입맛이 돌지가 않아 몇 번 음식을 휘젓다 내려놓았다.
남자는 일등 신랑감이었다. 잘나가는 기업의 과장이었고, 그에 걸맞게 연봉도 쏠쏠했으며, 매너에 훈훈한 외모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위축되는 기분이었달까. 머릿속은 아까보다 더 복잡해졌다. 소개팅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자꾸 고딩의 목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다. 뭔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도 흘러가긴 흘러갔다. 어느덧 9시가 되었고, 나의 의미없는 크리스마스 이브도 3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남자와는 미적지근하게 헤어졌다. 남자도 딱히 나에게 마음이 없는 듯 했다. 또 이럴 줄 알았다. 언제나 소개팅은 실패였다.
높은 하이힐이 내 발꿈치를 조여왔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발이 너무 아파서 신경질적으로 벤치에 걸터앉아 아픈 발을 주물렀다. 괜한 짜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듣고 말았다. 내가 앚아있던 곳은 편의점 앞에 있던 벤치였는데, 그 편의점 뒤 쪽에서 오늘 나와 소개팅을 했던 남자를 보고 만 것이다. 남자는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열심히 통화 중이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남자의 통화내용을 듣자마자 나는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 야, 그렇다니깐. 그 여자 말도 없고, 애교도 없고. 얼굴도 별로였어. 진짜. 박찬열 그 자식 어쩌자고 그런 격 떨어지는 여자를 소개시켜 준거야?
틀림없는 내 얘기였다. 아까 조금이라도 후한 평가를 내려주었던 내 대가리를 저주했다. 그러나 맞는 말이었다. 맞다, 나 그런 여자지. 서러웠다. 남자는 언제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를 봤나? 헛웃음이 나왔다. 편의점으로 들어가 맥주 두 캔을 샀다. 한 캔을 따서 입에 무작정 부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연인들이 가득했고, 상점들은 화려한 불빛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만 어두운 인생인가. 술이 들어갈수록 내 인생이 더없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홧홧한 마음에 계속해서 맥주를 들이 부었다. 한 캔을 비우고는 곧바로 두번째 캔을 따서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오세훈. 매일같이 나를 기다리며 인사해주는 녀석. 눈물이 났다. 그 새파란 고딩이 지금은 너무나도 보고싶었다. 가까스로 집에 도착하긴 했다. 그러나 고딩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입에서는 의도하지 않은 말들이 자꾸 튀어나왔다.
" 야, 고딩! 어딨어? 오-세-훈-. "
한참을 집 앞에서 녀석을 기다렸다. 한 한시간을 기다렸을까. 그래도 오지 않았다. 그래, 크리스마스 이븐데. 올리가 있나.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리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나즈막히 들려왔다.
" 누나.. 뭐 해요?
왜 그랬을까. 나는 정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녀석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린 것이다. 고딩은 당황한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쩔줄 모르는 모습에 나는 더욱 서럽게 울어제꼈다.
" 왜.. 왜 그래?! "
벙쪄있는 고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훌쩍거리며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고딩은 정말! 당황한 듯 했으나 곧바로 내 등을 쓰다듬으며 꼭 안아주었다.
" 또 술마셨네. " 왜 이제왔어. 엉엉 울면서 녀석을 꾸짖자 큭큭거리며 웃는다. 나는 괜한 심술이 나서 팔을 살짝 꼬집어버렸다.
" 아! 왜! "
너 은근슬쩍 반말한다? 녀석이 그 말을 듣자 더욱 크게 웃었다. 나는 볼을 부풀리고 녀석을 더욱 째려보았다.
" 어휴, 술냄새, 누나 내가 술 그만 마시라고 했잖아요. "
잔소리가 섞인 그 말투가 밉지 않았다. 몰라. 누나가 너무 힘들어서 마셨다! 시불. 야, 고딩아. 너 내 말 좀 들어봐. 정말 미친건지. 나는 그 말을 끝으로 하염없이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소개팅 남자가 어쨌다 저쨌다 등등, 내가 생각해도 정말 철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진심으로 내 말을 경청하는 중이었다.
" 지가 뭔데 완벽한 여자만 찾아? 진짜 기가막혀서! "
고딩은 내가 하는 한 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고 반응해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녀석이 정말 큰 어른으로 보였다. 그리고 장장 20분의 푸념이 끝나자 녀석이 나에게 말했다.
" 감기 걸리겠어요. 봐, 눈 오잖아. "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정말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고딩이랑 맞는 첫 눈. 놀란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자, 저도 신기한건지 하늘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까 내가 뱉은 말이 생각난건지 계속 꼬치꼬치 물어댔다.
" 근데 누나 진짜 저 기다린거에요? "
몰라. 얼버무리며 대답하자 고딩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솔직히 대답하는건 부끄러웠다. 그렇게 한 10분동안을 앉아서 의미없는 대화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시간이 늦었는지 녀석은 나를 어르고 달래어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진심을 담아 고백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나는 그런대로 만족했다. 어지럽고 메슥거리는 속이 조금 진정이 되는 것도 같았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엄마의 잔소리 폭탄을 듣고, 씻는둥 마는 둥 한 뒤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에게 맞은 등짝이 시려워서 그런 탓도 있고,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인 것도 있고. 무엇보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고딩은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쟤 뭐하는 거지? 아직 눈이 제대로 쌓이지 않은 땅을 계속 주시하던 고딩은 갑자기 자기 집 차 뒤로 몸을 숨겼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궁금해 하던 나는 조금 있다가 방긋 웃는 얼굴로 집에 들어가는 녀석을 보고 의문을 거두지 않은 채, 잠에 들어야만 했다. 창 밖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 카톡! '
잠에 빠지려던 찰나, 갑자기 울리는 카톡에 놀라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확인한 순간 나는 정말 완벽한 행복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발신자는 오세훈. 그리고 그 내용은 사진 한 장 뿐이었다. 눈이 소복히 쌓인 차 위에 간결하게 적힌 영어 문장은 나를 울리기에 충분했다.
" You're perfec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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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한 여름에 쓰는 크리스마스 글이네요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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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의사인줄 알았으니까 문제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