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1억
정국은 잠에 들지 못했다. 열린이의 우는 소리를 듣다가.. 열린이 나가버리자, 정국이 눈을 뜨고선 천장을 보았다.
어딘가 급히 달려나가는 소리에 정국이 상체를 일으켜 앉아서는 자고있는 가영과 지민을 한 번씩 보고선 열린을 따라 나간다.
제 20화_
힘들지만, 아프지만
운동장 앞에 벤치에 앉아서는 한참을 있었다. 아무도 없이.. 어둡기만 한 운동장은 이상하게 내겐 환하게 느껴졌다.
씁쓸하기도 한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할까.. 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에 겨우 꾸역꾸역 참다가 결국 참지 못 하고 터져버린다.
그렇게 또 하염없이 우는데..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급히 고갤 돌려보았다.
"….….!"
"우냐."
"….아니. 왜 나왔어..?"
급히 눈물을 닦아내고선 다시금 운동장을 보았다. 왜 하필이면 이렇게 맘 놓고 울고있을 때 와서 또 건드리는 걸까.
무심하게 내 무릎 위로 담요를 덮어주고선 옆에 팔짱을 낀채로 서있는 전정국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가 자꾸 우는 소릴 내는데 잠이 오냐."
"….….."
"뭐 때문에 이렇게 울어? 막 옛날 생각나서 그러나."
"아니.. 미쳤다고 옛날 생각 난다고 울겠니."
"어."
"….….."
"난 미쳤다고 자꾸 옛날 생각에 슬프던데."
"….….."
"나만 그런 거냐."
"….….."
나만 그런 거냐는데 너의 목소리가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고갤 들어 너를 올려다보면, 너도 운동장을 보며 작게 웃고있었다.
아마..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너와의 흔적들이 가득한 학교, 그리고 운동장. 하지만 지금 너와 난.. 아무 것도 아니다.
"어, 나도 슬퍼."
"….….."
"네가 보고싶어서가 아니라.. 아련해서 슬픈 것 뿐이야. 너도 그런 것 뿐이잖아."
"나랑 다시 만나고싶단 생각 안 들어?"
"….….."
드디어 너에게서 저 말이 나왔다. 솔직히 너와 헤어지고 며칠이 지나고 들려올 것 같았던 말이었다.
하지만.. 너는 서로 애인이 있는 이 상황에서야 내가 원하던 얘기를 꺼낸다.
운동장을 보던 넌 나를 내려다보았고, 유독 너는 오늘따라 더 잘생겼다.
"난 너랑 다시 만나고 싶어."
"….….."
"솔직하게 말 해서.. 헤어져서 다른 사람 옆에 두고 맘 편한 적 한 번도 없잖아 우리."
"….….."
"이제 서로 시위 그만하고 다시 잘 지내보자."
"시위.."
"….….."
"너는 우리가 이러는 게 시위라고 생각했구나."
"….….."
"나 말야, 너랑 헤어지고나서 석진씨를 만나고
난생 처음으로 사랑이란 걸 받아 본 것 같았어. 네가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석진씨가 잘해주고,
다음에 또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
"너랑 사랑하는 방법이 다른 것 뿐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석진씨의 사랑 법이 더 좋아. 그리고 석진씨랑 결혼도 하고싶어."
"너는 고작 한두달을 만나고 결혼 소리가 나오냐?"
"고작 한두달."
"….….."
"고작 한달을 나한테 그렇게 잘해준 적 있었니, 너?"
"….…."
"내 기억으론 넌 나한테 단 하루라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어."
"결혼하자는 거에 대답 안 해줘서 삐진 거잖아 너."
"….뭐?"
"결혼하자고 그렇게 들볶았는데 정작 나는 아무 대답도 없으니까 화가 났던 거잖아.
그래서 헤어지자고 홧김에 말했던 거 아니야?"
"너 진짜.."
"….우리가 이렇게 쉽게 끊어질 인연도 아니고.., 이번에.. 바로 결혼하자. 내가 너 싫어서 하기 싫다고 했던 거 아니었어.
준비 된 거 하나 없이, 돈도 없는데 결혼하자는 게 너무 부담이 커서 항상 말 돌렸던 거야. 미안해, 응?"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결혼? 준비가 되지 않아도 좋다고, 돈이 없어도 좋으니까. 그냥 소소하게 그렇게 살자고..
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걸 싫어해 넌."
"나는 네 생각이랑 많이 다르니까. 돈이라도 많이 벌어놓고 너 편하게 지내라고, 편하게 집에서 쉬라고."
"됐어."
"….….."
"거의 두달만에 제대로 된 얘기 한 번 하나싶었는데. 결국엔 제자리 걸음이야 우리."
"….….."
"너랑 정말로 제대로 된 얘기를 나눴어도 내 생각은 달라질 거 없었겠지만.."
"….….."
일어나 너를 지나쳐 학교 건물로 들어서려고 하자, 전정국은 내게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아 돌린다.
팔을 뿌리치려고 힘을 주면.. 더 쎄게 내 손목을 잡는 너는 나를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여전히 무식히 힘만 쓸 줄 아는 네가 싫다.
"놔."
"다시 한 번 생각해봐."
"….….."
"너도 내가 있어야 진짜 너잖아."
"….….."
"나도 그래, 난 네가 없으면 진짜 내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고."
"….….."
"지금 만나는 사람이랑 헤어질게, 기다릴게."
"왜."
"….….."
"기다리지 말고, 그 여자랑 평생 연애 해."
"너."
"….….."
"그 새끼랑 잤어?"
"….….."
"….….."
"어."
"….….."
"잤어."
간신히 너의 손을 뿌리치고선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데 또 눈물이 나와버렸다.
왜 서로 애인이 있는데도 너와 나는 여전한 걸까.
지민 또한 잠을 자지 못 했는지 누워서 팔짱을 낀채로 열린과 정국이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열린이 교실로 들어오자 급히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한다.
열린이 울었는지 훌쩍이자, 지민은 눈을 살짝 뜬채로 열린을 바라보았다.
뭐야.. 둘다 나갔길래 뭐 좋은 소식 들려올까 싶었는데 전혀 아니잖아..
대놓고 눈을 뜬채 열린을 보던 지민은 열린이 뒤척이자 급히 또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한다.
정국은 운전석에 앉아서는 운전대에 이마를 박은채 한숨을 내쉰다.
요즘 계속 한숨만 쉬네.. 이러다 버릇 되겠어. 열린과 나눴던 대화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는지 정국은 한참을 넋을 놓고 멍을 때리기 바쁘다.
울면서 화내는 너의 모습은 왜 또 그렇게 예쁜지, 헤어지고 나니까 더 예뻐보였다.
그러다 아까 열린이 얘기한 게 떠올라 정국이 눈을 질끈 감는다.
김석진이라는 그 자식이랑..
"잤다고..?"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 정국은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 벨소리에
혹시나 열린일까 싶어서 급히 핸드폰을 꺼내본다.
희연에게서 오는 전화에 정국은 진이 빠지는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선 창문을 열고 담배를 핀다.
희연에게서 오는 전화는 받지 않았고, 두 번은 더 오는 전화에 정국은 핸드폰을 꺼놓는다.
석진은 새벽 3시가 넘어서까지 잠이 오지않는지 침대에 누운채 눈을 멀뚱히 뜨고 있다.
석진이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서랍 안에서 불면증 약을 꺼내 먹었고, 침대에 앉아서는 아까 집 앞에서 본 유비를 떠올린다.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열린이는 대충 모자를 뒤집어 쓰고선 짐들을 다 정리했다.
지민이랑 가영이는 열린과 전정국 사이에 껴서는 괜히 눈치를 보기 바쁘다.
옆 교실에서 위에 옷을 갈아입으려 문을 열었을까..
윗 옷을 벗고 있는 전정국에 놀래서 열린이 얼굴이 빨개져서는 소리친다.
"왜 옷을 벗고있..어!?"
"옷 갈아입는데 그럼 벗지, 입냐?"
"…진짜."
분명 익숙한데도 왜 이렇게 창피하고 부끄러운 건지.. 열린이 문을 쾅 닫고 다른 교실로 들어서자
정국이 셔츠 단추를 끼우며 작게 혼잣말을 한다.
"맨날 봐놓고 뭘 놀래.."
"
눈치 보는 상황이 싫어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을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어제보다 정국과 얘기하는 건 더 힘들어졌고, 둘이 있는 건 더 그렇겠지만 넷이서 있는 것도 숨이 막힌다.
석진과 카톡을 하는데 자꾸만 보고싶다고 하는데.. 그의 표정이 상상이 가는지 열린이 소리내어 웃는다.
핸드폰을 보며 웃다가 전정국과 눈이 마주치면 둘은 서로 급히 창밖을 보기 바빴다.
자! 먼저 내려! 하며 지민이 뒷좌석에 앉은 정국과 열린이에게 소리쳤고.. 가영이 밸트를 풀고 같이 내리려고 하자
지민이 급히 가영의 팔을 잡고선 눈빛 교환을 신청한다.
가영은 지민의 느끼한 눈을 보며 오히려 더 인상을 쓴채로 '뭐' 하며 지민의 손을 뿌리치고선 밸트를 푼다.
정국과 열린이 내리자마자 지민은 급히 가영에게 소리친다.
"둘이 같이 점심 먹게 두자! 나랑 둘이서 먹어 넌!"
"굳이 왜 그래야 되는데. 아, 좀 유치하게 그만 좀 해라..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주접떤다 또 박지민?"
"아, 왜애애! 솔직히 저 둘 헤어지면 우리끼리도 어색해질 거 아니야! 난 그것도 싫단 말이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쟤네 둘 버리고 그냥 튀자고?"
"어!"
"이거 전정국 차잖아."
"뭐 어때."
"미친놈."
지민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를 출발시켰고, 열린이 밖에서 야아! 박지민! 하고 소리친다.
정국도 어이는 없지만 지민의 얄미운 표정이 상상가는지 작게 웃는다.
"웃냐..?"
"아니. 얼마나 더 맛있는 걸 먹으려길래 우리 두고 가나 싶어서."
"…진짜 미쳤나봐, 박지민."
"쟤도 은근 또라이라니까."
"……."
둘이 가만히 서있으니 아무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고, 열린이 택시라도 타려는지 정류장으로 걸어가려고 하자
정국이 열린이의 뒷모습에 대고 무심하게 소리쳤다.
"오랜만에 순대국밥 먹을래? 너 순대국밥 좋아하잖아."
"……."
"안 먹어?"
"안 먹..!"
어.. 라고 하려던 열린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열린이 배 위에 손을 올려둔채 터덜터덜 못이기는 척 발걸음을 돌린다.
정국은 그 모습에 귀여운지 웃으며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안녕하세요. 순대국밥 두개만 해주세요."
"그래~ 어? 어디서 많이 봤는데?"
"안녕하세요.. 저희 7년 전쯤에 여기 학교 다닐 때 자주 왔었거든요."
"아아아! 뒤에 아가씨 보니까 생각난다. 둘 아직도 만나? 내가 둘 너무 예쁘고, 잘생겨서 기억해."
"…아니요. 헤어진지 조금 됐어요. 얘가 저 뻥~ 하고 찼거든요."
"어유 그래? 왜! 왜 뻥 하고 찼어! 공 마냥?"
열린이 뭐냐는듯 정국을 째려보았고, 정국은 능글맞게 웃으며 자리에 앉아서는 추운지 차가워진 손에 입김을 분다.
열린이 정국의 맞은편에 앉아서는 정국을 보고선 작게 물었다.
"뭐야 너?"
"뭐가 뭐야?"
"말하는 게 웃기잖아, 너."
"웃겼어? 난 말하면서 슬펐는데."
"…뭐?"
"깍두기 가져올게."
"……."
정국은 열린이 좋아하는 깍두기를 잔뜩 퍼가지고 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흘러넘칠 정도로 가득 퍼온 정국에 열린이 인상을 쓴채로 말한다.
"미쳤어..?"
"많이 먹으라고. 너 아까 차에서도 배가 아주 난리를 치던데."
"……!"
"그렇게 쳐다보면 뭐."
어제보다 더 편하게 대해주는 정국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는지 열린이 인상을 쓰다가도 고개숙여 티나지않게 웃었다.
아, 저게 편하게 대해주는 게 아니라.. 얄미운 건데. 분명...
"빈속에 동족을 먹으면 위가 놀랄 거 아니야. 깍두기로 좀 채워."
진짜 왜 저래?..
오늘 하루 할 것들을 석진에게 전해 준 윤기는 석진이 대답이 없자, 곧 그때처럼 '부회장님'하고 묵직한 목소리를 낸다.
석진은 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선 윤기를 바라보았고, 윤기가 입을 열었다.
"피곤해보이시는데. 잠을 못 주무신 건가요."
"…아, 어."
"……."
"애인 하루 못 봤다고 이러나.. 두시간 잔 것 같은데."
"애인분은 좋으시겠네요."
"……."
"부회장님이 이렇게 아끼고, 좋아해주시니."
소리없이 웃은 석진이 깍지를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려둔채로 윤기에게 말한다.
"덕분에 어제 일도 잘 해결됐으니.. 오늘은 일찍 퇴근해도 좋아."
"…네."
"나중에 오름이 데리고 와. 오랜만에 오름이 보고싶네."
"…알겠습니다."
"아, 혹시.."
"네."
"우리 백화점에 재수탱이라고 있나? 피부 하얗고.."
"에?"
"열린씨 친구분이랑 썸..? 을 타는 것 같던데.. 우리 백화점 사람이라길래."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아.. 그래. 나가봐."
윤기는 방에서 나오면서 재수탱..? 하며 고개를 갸웃한다.
석진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많은 서류들에 싸인을 하며 인상을 썼고, 또 익숙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자 석진은 그 번호를 차단을 한다.
유비 생각에 일에 집중이 되지 않을까.. 석진이 열린이의 사진을 띄워놓았고, 한결 마음에 나아졌는지 작게 웃어보인다.
택시비 3만원.
내 생에 택시를 타고 몇만원이 나온 적이 있던가.. 제일 많이 나왔던 게 아마 9천원까지였는데.. 말도 안 돼.
돈 내려고 지갑을 꺼내면 전정국이 대신 돈을 내주었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너는 내게 말한다.
"나도 탔는데 뭐가 미안하냐."
"……."
"나중에 밥 사면 되겠다."
"내가?"
"어, 네가."
"그래 뭐.. 나중에."
"연락하면 받아 그럼. 그때처럼 안읽씹 하지 말고."
"내가 언ㅈ.."
제.. 라고 하기엔.. 아직도 읽지않으 네 카톡이 떠올라 바로 수긍한다.
'잘 가..' 하고서 버스를 타려고 했을까.. 전정국의 목소리가 또 내 발목을 붙잡는다.
나도 멈추고싶지 않다. 하지만.. 자연스레 발이 바닥에 붙어버리는 걸 어쩐담.
"네 애인은 내가 너 전남친이란 거 아ㄴ.."
"아니!?"
"와 말 끝나지도 않았는데 대답하네."
"그러니까! 괜히.. 막 나중에 우연찮게 만나면..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우리가 만났던 게 이상한 소리야?"
"당연하지! 내가 네 애인한테 가서 내가 그쪽 남자친구랑 10년 사귄 사람입니다~ 말하는 거랑 똑같은 거야."
"난 상관없는데."
"난 상관있어."
"그럼 유감이지 뭐."
"암튼.."
간다.. 혹시라도 전정국이 말을 더 걸까싶어 도망친 게 맞다.
급히 정류장까지 뛰어와 버스 시간을 보니 다행이도 바로 버스가 온다기에 안심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이렇게 속이 답답한 거야.. 어제 그렇게 울면서 구질구질한 예전 얘기 한 거 치곤
오늘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괜찮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이상하잖아.
전화로 석진의 일정을 잡던 윤기가 전화를 끊고선 피곤한지 목 스트레칭을 했고..
누군가에게서 오는 전화에 화면을 보자.. 아무렇게나 특수문자로 저장해둔 사람에게 전화가 오자 받으려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받으려고 하기 무섭게 전화가 끊기자 윤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내가 끊은 건가."
가영에게서 온 전화에 윤기가 다시 전화를 건다.
방 침대에 누워서는 실수로 전화 건 게 신경쓰이는지 가영이 머리를 헤집으며 소리친다.
"아니야! 바로 끊었는데! 안 울렸을 거야! 그래, 그래!"
그치.. 잘못 건 거니까.. 하고 중얼거리던 가영이 조용한 핸드폰에 안심을 했을까.
바로 윤기에게서 걸려오는 전화에 입을 떡 벌린채 한참을 받지 못하다가 길게 울리는 전화에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제가 전화 끊은 건가 싶어서요.. 전화 했나요?"
- 아, 그게! 실수요.. 실수로 걸었어요.
"아, 그래요."
- …네.
"…그."
- …….
"문자 못보셨나."
- …뭔 문자요?
"약속 날에.. 제가 일 때문에 못 나가서 문자 보냈었거든요."
- 안 왔는데? 아, 그러고보니.. 우리 약속이 있었구나? 나도 새까~맣게 잊고 있었네!?
"……."
- …여보세요?
"아, 그럼."
- 네.
"오늘 밥 드릴까요. 오늘 마침 일찍 끝나거든요."
- 오늘? 음.. 내가 오늘 바빴던 것 같기도 한ㄷ..
"그럼 다음ㅇ.."
- 아니요 ! 오늘 사요.
"그래요."
- …어디로 가요?
"문자로 편한 곳 말해주세요. 거기로 갈게요."
- 아, 네.
전화를 끊은 윤기는 바로 오름에게 전화를 건다. 복도에서 윤기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오늘 삼촌 늦어. 저녁 혼자 먹을 수 있지? 불 조심하고.. 티비 너무 가까이서 보지 말고."
퇴근을 한 석진이 엘레베이터를 타 주차장에서 내렸을까. 어제부터 좋지 않았던 몸에 어지러운지 잠시 벽을 짚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몸살인가.. 중얼거리던 석진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열린이에게서 온 카톡에 웃으며 핸드폰 화면을 본다.
[오늘 볼 수 있는 거죠? 나 몇시에 석진씨 집으로 갈까?]
"너 진짜!!!"
"야 미안!! 아니! 나는! 너희가 잘 됐으면 하는 바램에!!!!!!!!!!!!!"
"잘했어!!!"
"어?"
정국이 화를 낼듯한 목소릴 내다가 갑자기 웃으며 지민에게 헤드락을 걸자, 지민을 얼결에 따라 웃으며 정국을 바라본다.
얘가 왜 갑자기 미쳐서 돌아 온 건가 싶어서 힐끗 정국을 바라보았고, 정국이 어색하게도 웃으며 지민에게 말한다.
"어제 내가 길열린이랑 진대를 좀 했는데."
"엉."
"완전히 나는 깔~~~끔!!히 잊은 것 같더라고."
"진짜!?"
"그래도 10년 어떻게 금방 잊냐? 한달 만난 놈한테 아예 넘어가기 전에 내가 더 달라붙어야지.
앞으로 계속 그렇게 나랑 길열린이만 두고 도망 가. 알았지?"
"어.. 어.. 그래.."
"근데..."
"…왜."
"잤대.."
"어?"
"잤다고........"
웃던 정국이 갑자기 소파에 엎드려서는 쿠션에 얼굴을 묻고 주먹으로 팡팡! 소파를 내리치자
지민이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한다.
"단단히 미쳤어.."
석진이 주차를 해놓고선 열린이에게 도착했다고 카톡을 남겼다.
열린과 끊김 없이 카톡을 하며 대문 앞에 도착했을까.. 또 어제와 같이 대문 앞에 보이는 웅크리고있는 가녀린 몸에
석진은 이번에도 인상을 쓴채로 유비를 내려다보았다.
"오빠 왔다.."
"……."
"나 4시간이나 기다렸어. 할 말은 많은데.. 연락은 안 돼지.. 아는 곳이라곤 오빠 사는 집 뿐이니까."
"너."
"…응?"
"나한테 왜 이래? 도대체."
"왜.. 3년만에 나타났냐고 묻는 거야?"
"……."
"오빠가 나 엄청 미워한다는 거 알아. 당연하지.. 나같아도 내가 너무 꼴보기 싫었을 거야.. 근데! 오해는 풀어야 될 것 같아서.
미국에서 한국 넘어오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한 거고, 찾아 온 거야."
"……."
"3년동안 오빠 잊어 본 적 한 번도 없었어. 오빠 만날 생각만 하면서 3년을 기다렸ㄱ.."
"나 애인있어."
"……."
"너보다 더 예쁘고, 더 착한 사람."
"……."
"너와는 다르게 이기적이지도 않고, 나만 사랑해주는 사람 만나고 있으니까.
너도 다른 사람 만나."
"그래도.. 오빠는.."
"너 안 사랑해."
"아니야, 오빠는 나 사랑하잖아. 나 없으면 못 살잖아 오빤."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네 생각 한 번도 안 하며 살아왔어."
"나 오빠 못 잊어."
"……."
"나 추워 오빠.."
"……."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돼..? 나 다리도 아프구.. 나 다리도 이렇게 아픈데 오빠 기다렸다니까?"
"네 다리 보여주면서 동정심 유발할 생각이었다면 그만 둬. 하나도 안 불쌍해."
"…동정심이라니, 오빠 말을 왜 그렇게.."
"다신 찾아 오지 마. 애인도 자주 오니까."
"…전화라도 받아줘."
"……."
"오빠! 나 오빠 없음 못 살아.. 나 오빠만 바라보면서 기다렸단 말이야.."
"……."
"……."
석진이 또 매정하게 가버리자, 유비는 대문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숨죽여 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집에서 열린이 나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유비가 힐끗 열린을 본다.
석진씨 집에 들어서자마자 문 앞에 서서 나를 보기에 하이! 하고 손을 흔드니.. 그는 왠지 아련한 눈을 하고서 나를 꼭 안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꼭 안고선 아무말도 않는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냥..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토닥여주니 그가 나를 더 쎄게 끌어안았다.
"이러니까 완전 강아지같네.."
"……."
"나 보고싶었다고 격렬하게 표현하는 건가?"
"보고싶었어요.. 진짜.."
"……."
"나 이제.."
"……."
"열린씨 없인 하루도 못 견디나봐."
"…이렇게 또 훅 들어오면 내가 심장이 떨려요, 안 떨려요."
"잠깐만.. 이렇게 안고 있어줘요."
"응. 계속 안고있을게, 안 도망갈게."
"……."
왜인지 떨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버린다. 왜 이렇게 슬프게 말을 해요.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목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꾸역꾸역 삼켜버리고선 그의 목에 얼굴을 묻고서 눈을 감았다.
아, 포근한 냄새.. 석진씨 안고 있으니까 스트레스 다 풀리는 것 같네.
열이 나는 그의 이마를 매만져본 뒤에 대충 죽을 끓여주자 그는 억지로라도 죽을 다 먹어치웠다.
항상 웃기만 했던 그가 힘이 빠진채 나를 바라보는데.. 그게 너무 슬펐다.
"왜 아프고 그래요."
"……."
"왜.. 그렇게 봐요?"
"예뻐서요."
"그쪽은.. 그쪽이 더 예쁜 거 모르죠? 나보다 남자들한테 인기 더 많을 것 같은데."
"……."
"아, 석진씨 안 웃으니까 너무 어색하다아.."
"자고 가요."
"응?"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요."
"알았어요."
"대신!"
"……."
"내일은 다 낫는 거야, 알았죠?"
"응. 알았어요."
"웃었다."
힘 없이 웃는 그를 보고나니 나까지 웃음이 나왔다. 그도 아프면 아프다 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항상 좋다고 웃어주기만 했던 그였기에.. 아플 줄도 몰랐는데 말이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그가 내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다. 식은땀까지 흘리는 그는 악몽이라도 꾸는지 인상을 쓴채로 자꾸만 중얼거렸고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꾹 참고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다 괜찮아 질 거야. 아무도 석진씨 안 괴롭혀."
어린 아이 달래듯 토닥이는 내 손에 그도 진정이 되는듯 했다. 뭐가 그렇게 힘이 들어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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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오오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