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비행기 탑승 시간이 되어 석진은 탄소를 데리고 제일 먼저 걸음을 떼었습니다. 당황하는 탄소의 반응보다도 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는 것에 다행이란 생각을 하면서요.
탄소: 말로 하면 되잖아
석진: 그래 말로 하면 되는 일이지
탄소: 뭐?
석진: 내 옆자리에 앉으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게 말로 하기가 참 어려워
계속 무언갈 놓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탄소의 한 마디로 끝날 의문이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너무 크게 다가오네요.
석진: 사람들 앞에서, 네 앞에서 정말 마음 다 잡은 때가 아니면 너에 대한 마음을 솔직하게 뱉기가 참 어렵다고 ...넌 그런 내가 싫었던 거겠지 누가 손을 대어도 아무 말 못하는 내가 답답했을 거고 뒤에서만 내색 하는 내가 짜증났을 거야 이제 알겠어
탄소: 왜 말하는 게 어려운 건데
석진: 그게 너한테 해가 될지, 득이 될지 모르잖아
탄소: 넌 말 한 마디에 그렇게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고 느껴?
석진: 원래 말은 신중하게 해야 하는 거야
탄소: 그래서 내가 네 여자친구라는 말을 못 하냐고, 나한테 달라붙는 사람 앞에서
석진: 우리 아직 아니잖아 게다가 네 동창이었고
탄소: 뭔, (환장)
석진: 난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고 네가 곤란해질까봐, 미리 밝히지 않은 사실을 괜히 내가 알리는 걸까봐 조심스러웠을 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게 애타지 않는다는 건 아니라서 너한테만 내색했던 거였고
탄소: 너랑 나랑 진짜 안 맞는다
석진: 알고도 좋아했어 난 너랑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좋아한 거 아니야 너로 인해 내 많은 부분을 바꾸게 된다 하더라도 괜찮겠단 생각으로, 그럴 각오로 욕심낸 거지
탄소: ... ...
석진: 첫인상 기억 안 나? 최악이었잖아
탄소: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알아
석진: 처음부터 안 맞았어, 우린
직설적인 석진의 말에 오히려 좋았다고 하면 변태 같아보일까요. 탄소는 석진의 단호한 한 마디에 더 이상 매정한 태도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탄소: 맞아 남들은 어디가 닮았다 어디가 똑같다 그러는데 사실 징글맞게 공통점 하나가 없었어 그래서 넌 나랑 매번 어긋났고 싸우고, 미워하고
석진: 좋아한다는 거 하난 공통점으로 치자
탄소: 농담하지마 그럴 기분 아니야
석진: 농담 아니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이마저도 아니면 진짜 너랑 갈라서게 될까봐 그래
탄소: 너는...! 그런 말이 쉽게 나와? (울먹)
석진: ...어?
탄소: 너한테 계속 져주고 싶은데 맨날 지고만 사니까 기분 나빠
석진: (당황)
감정이 상했을 때만큼은 져주고 싶지 않은데, 다른 때면 알아서 져주더라도 이런 때만큼은 끝까지 버티고 싶은데 자꾸 네 한 마디마디에 넘어가는 내가 너무 웃겨서 싫어. 전에 그랬지. 네 말이면 내가 항상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이냐고. 근데 그거 맞는 거 같아. 공통점 하나도 없어서 뭐만 하면 이 난리인데, 거기에 맞춰가는 건 내 담당인 거 같다고.
너는 나한테 헤어지잔 말을 할 수 있지만 난 못해. 안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못해. 넌 나 없이 잘 살진 못해도 살긴 하겠지. 그러다 잊을 수도 있겠다만 난 그거 아니란 말야. 나는 너 없이 못 살 것 같아. 아니, 같아가 아니라 그게 맞아.
탄소: 재수없는 소리할거면 그냥 입을 다물고 살어! 내가 속 터져 디질 테니까! (울망)
석진: 말 예쁘게 하자
탄소: 헤어지자고 하거나 갈라선다는 말은 예쁜 줄 알아?!
석진: 비속어는 쓰지 말자고...
탄소: 더 화내야 하는데 얼굴 보니까 다 풀리는 내가 너무 싫어 (결국 운다)
석진: 어, 아니 잠깐만 여기서 네가 울면 내가 뭐가 되는 건데... 탄소, 탄소야? 울진 말고 우리 대화로 하자니까? 탄소야...?
탄소: 이렇게 될까봐 얼굴 안 보려고 피해다닌건데 여하튼 외모지상주의 망해버려야 해
석진: 내, 내 얼굴이 좋다며
탄소: ...이런 애를 좋아한 내가 멍청이지...ㅠㅠㅠㅠㅠ
호석: 아 거, 비행기 안에서 소란 좀 피우지 맙, 엥?
탄소: 내가 니 얼굴이 좋다 그랬냐고, 니가 좋다 그랬지 그게 얼굴이냐고ㅠㅠㅠㅠ
호석: (황당) 뭐야?
어린 아이처럼 으앙, 하고 우는 탄소는 한참 동안 석진에게 안겨 우쭈쭈를 받았습니다. 호석의 여자나 울리는 한심한 놈이라는 눈빛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결혼까지 약속해놓고 미래 부인 손에 물 묻히는 일보다 얼굴에 눈물 마를 날이 없다는 몹쓸 예비신랑이라는 무언의 비난이 환청으로 들려왔습니다. 등골이 아주 오싹오싹하죠.
탄소: 아 짜증나
석진: 실컷 울고 짜증난대...
탄소: 한국 도착하면 서이현한테 가서 확성기에 대고 말해, 김탄소 예랑 바로 김석진이라고
석진: 뭔데
탄소: 나 아직 너한테 다 풀린 거 아니야
석진: 분부 받잡겠습니다
탄소: 억울해서 이대로는 못 풀어
석진: ...;;;
탄소: 휴대폰들 중에 하나는 남자 연락처 모아놓은 거거든
석진: 야
탄소: 내가 좋아서 저장한 줄 알아? 그냥 숨만 쉬어도 좋다는 사람이 생기는데 어쩌라고!
석진: 들숨날숨에 아는 남자라는 애들 말 틀린 거 하나도 없네 아주 그냥
탄소: 뭐!
석진: 왜!
탄소: 지금 나한테 언성 높인 거야?
석진: 난 그런 이상한 휴대폰 없거든!
탄소: 아 그니까! 니가 맨날 제때 안 나서니까 자꾸 이런 게 꼬인 거잖아앆!!!!
윤기: 조용히 합시다
탄소: 이어폰을 껴!!
윤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뭐가 어쩌고 저쨌,
호석: 형, 형이 참아요 지금 둘이 싸우는 중이니까
탄소: 싸우는 거 아니고 화해하는 중이거든!!!
남준: 호석아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반은 간다
호석: (시무룩) 난 두 사람 생각해준 건데...
지민: 누나한텐 형 밖에 안 보여서 그런 배려 해줘봐야 알지도 못해요
호석: (앗)
정국: 지민형이 말하니까 되게 일리 있다
호석: 정, 정국아...!
그래서 탄소가 굳이 민감한 휴대폰의 연락처를 공개한 이유는요.
탄소: 너 줄게, 이 사람들한테 전화 오면 나 약혼했다고 전해줘
석진: 미쳤나봐
탄소: 소문 내면 쥐도새도 모르게 인생 종치는 수가 있다고 덧붙여주고
석진: 다른 사람들한테 너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니까?
탄소: 그리고 부모님께 가서 네가 내 미래 남편이라고 인사도 해줘
석진: 뭐라, 는 거야 지금!!!
탄소: 말하기 어렵다고 해서 지금 그걸 극복할 수 있는 연습 상대들을 골라줬잖아 뭐가 문제야!!!1
석진: 생각을 하고 말을 하라고!!!!
태형: 아 왜 나란히 소리를 지르는 데요
석진: 넌 탄소가 난리 피울 땐 뭐라 안 하더니 나한텐 뭐라 그런다 되게 속상하게?!
태형: 누나는 누나잖아요
탄소: 나는 나라는 게 뭐야, 난 원래 몰상식하게 기내에서 떠드는 인간이라는 거야?
태형: ...?
지민: 내가 말했지, 누나한텐 형만 보이니까 옆에서 잘해줘봐야 소용 없다고
정국: 이쯤 되면 본인이 더 자랑스러워 하는 부분 아닌가요, 누나를 좋아하는 동생이란 역할에 심취하신듯여
호석: (환장파티)
남준: 정국아 요즘 사춘기가 다시 찾아왔니?
정국: 전 그냥 다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탄소: 나도 네가 그랬으면 좋겠다
정국: ....! 누나가 나한테 이럼 안되지 (부릅)
탄소: 민윤기한테 말 잘라먹는 거까지 배운 것 좀 봐, 머리도 노랗게 하더니 아주 그냥 어린 애 싹수를 노랗게 해놨네
윤기: 말 좀 가려서 해요 나 노란 머리도 아닌데
탄소: 지금 여기서 노란 머리 누구야 그럼 내가 분명히 아까 찍은 오방에서 노란 머리를 봤다고
남준: 누난데요
탄소: ...?
석진: 싹수가 노란 건 너네
호석: 형 말이 좀 심하잖아요
탄소: 나 가정교육 독학한 거 맞는데 왜
지민: (물 뱉음) 무, 뭘 독학해요?
탄소: 내가 언제부터 노란 머리를 했던 거야... 대체...
지민: 아니 누나...?
태형: 베를린 공연 끝나고 콩나물무침 먹고 싶다면서 노란 머리 하겠다고 그랬었잖아요 새하얀 의상 입었을 때 콩나물처럼 보이고 싶다고
탄소: 제가요?
남준: 사흘전 기억을 벌써 잊었네... 탈색의 고통이 너무 컸나보다
호석: 어쩐지 탈색하는 내내 고해를 부르더라
탄소: 아니지, 김석진 생각을 하느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사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던 거야
태형: 지구가 멸망하려나보다
정국: 이하동문
남준: 우리 정국이가 사자성어를 씁니다 여러분
윤기: (박수) 커플 싹 다 망해버려라~
호석: 여기 커플 없는데요 형
윤기: ...형이랑 누나 언제 사귈 거예요?
석진: 몰라
탄소: 결혼만 하면 장땡이지, 김석진 너 앞으로 어디 가서 내 지인한테 뭐라고 소개할지 모르겠으면 김탄소 예랑이라고 해 쓸데없이 전남친이라고 하지 말고
윤기: 아 그냥 꺼졌으면 좋겠다 정말
매니저는 여덟 명의 의식 속 흐름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 지 오래입니다. 장거리 비행의 여파가 크긴 한가 봅니다. 할 것도 없는데 가만히 있으려니 지루한 탓에 아무말이 튀어다니네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임팩트 강한 건 아무래도 김탄소의 가정교육 독학이 아니겠어요? 하하. 이 거침 없는 친구 어디 가서 말실수하면 큰일인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