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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a 전체글ll조회 1910

결국 남자는 그날 새벽 받아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구고 잤다.

남자가 몸을 담구고 있는 동안 멍하니 욕실밖에서 물기를 닦을 수건을 들고 기다리며 아니 이럴거면 고맙다는 말 한마디 어려웠을까싶다가도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니 그러려니 생각했다.

원래도 늦게 일어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집에 들어오고 나서부터의 아침 기상시간은 너무 고되었다.

여덟시에는 출근하는 남자를 위해 여섯시에는 일어나서 오늘 입을 수트를 각 잡아 다리고 매일아침 출근하며 커피한잔을 들고 나가는 남자를 위해 원두커피를 내려 긴 일회용 종이컵에 담아 테이블 위에 준비해둔다. 그러면 일곱시쯤 일어난 남자는 내가 차려둔 커피를 챙겨들고 출근한다.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출근하는 남자를 꾸역꾸역 대문까지 배웅하고 나면 밀려오는 피곤함에 다시 침대에 엎어져서 쪽잠을 잔다. 그렇게 잠깐 눈을 붙이고 나면 다시 또 할 일이 태산이다. 티비에서도 몇 번 본적이 있는 유명한 한식 요리사 선생님이 집을 찾아오면 요리를 배우고 집에 출퇴근을 하는 가정부 아주머니에게도 집안 살림도 배우고 그때그때마다 다르게 찾아오는 종목이 다른 강사들에게 와인종류나 식사예절같은 것을 배우기도 했고 하다못해 꽃꽂이와 동양자수를 배우는 날도 있었다. 채 배우지 못하고 들어온 재벌가 며느리 역할을 이제서라도 가르치려는 어머님의 부단한 노력탓에 지치는쪽은 나였다.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라고 밤이면 강사들도 가정부 아주머니들도 다 돌아가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맡은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걸려오는 어머님 전화는 네네 고분고분 비위를 맞추면 되는 일이었다.

남자또한 세달째 한번도 일찍 들어온적이 없었다.

바빠서일까 아니면 내가 보기 거슬리는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 여자 때문에? 셋중 어느쪽이라도 상관은 없다.

벌써 이 집에 들어온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도저히 적응이 되지를 않는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수 있을까. 익숙해지기까지의 그 많은 시간들을 나는 견뎌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남자의 출근 준비를 다 끝내놓고 침대 한귀퉁이에 걸터앉아 멍하니 옷을 입기 시작하는 남자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눈부시도록 하얗게 빛나는 피부에 흑단같은 머리, 곱게 뻗은 얼굴선에 위에 장식된 도톰한 입술과 매끈한 눈매. 단정한 손가락이 셔츠의 커프스를 잠그는걸 보며 내심 감탄했다. 어떻게 저런 남자가 저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못했을까. 아니 안한거겠지. 넘치는 능력과 눈부신 외모. 결혼할 필요가 없었을것이다. 이사람 곁의 여자는 차고 넘쳤을테니 굳이 한 여자에게 메여있을 필요야 없었겠지.

남자의 이름은 김석진. 나이는 서른. 세화호텔 부사장. 아마 실질적으로는 그 호텔에 어머님을 제외하고는 이 남자보다 더 직급이 높은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교적 어린 나이탓에 눈치껏 부사장 자리에 올려둔것이겠지만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앞으로 이 남자가 세화호텔의 대표겠지.

그래도 명색이 세화가 맏며느리인데 세화호텔 룸에서 한번 자볼 수는 없을까. 바쁜 부모님탓에 제대로 여행한번 가본적도 없어 세화호텔은 고사하고 다른 호텔도 가본적이 없었다. 인터넷 사진으로만 봤던 세화호텔의 잘 꾸며진 방 위에 한번쯤은 누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부모님의 빚과 나의 결혼을 거래하기로 한날. 나는 내가 결혼할 남자에 대해 짧게 생각한적이 있었다. 내 상상속 남자는 배가 볼록 튀어나오고 머리가 반쯤 까진 성격 파탄의 아저씨였다. 나이 서른이 다되도록 여자 한번을 제대로 만나보지 못해 어디선가 팔려오듯 올 얼굴 모를 여자와 결혼을 준비하는.

내 의지로 하는 결혼도 아니었고 더운물 찬물 가릴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는 몇 번이나 내 머릿속에서 곧 만나게될 미래 남편의 모습을 그렸다 지웠다 반복하며 상상하곤 했지만 결국 나 혼자만의 상상의 끝에 나오는 남자의 모습은 최악이었다. 어차피 필요관계에 의해 하는 결혼인데 사람이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스스로 반쯤 위로하듯 체념한채로 이 집에 들어온날. 얼굴을 마주하게된 남자는 내가 태어나 본 그 어떤 누구보다 아름다운 외모의 사람이었다. 처음 봤을때는 믿을 수 없었다. 이런남자가? 이런 결혼을? 그리고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생전 처음보는,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 보다도 완벽한 무결점의 한편의 명화와도 같은 외모였다. 이런식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길거리에서라도 우연히 남자를 보게 됐더라면 아마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봤겠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여자라면 아니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남자를 그냥 지나칠 수 는 없었을 것이다.

성격 또한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남자는 한번도 내게 화를 낸다던지 폭력적으로 군다던지 하는일은 없었다. 그저 나를 무시했다. 없는 사람인 것 마냥. 그것이 나에 대한 배려나 친절함 따위가 아닌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걸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남자의 성격이 최악은 아닌 것에도 감사했다. 오히려 이런 관계라면 이런 성격인 쪽이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남자에게 나는 어떨지 모를일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남자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어차피 이 남자에게도 필요한건 집에서 인형처럼 가만히 장식되어있다 필요할 때 대외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그런 아내겠지.

멍하니 혼자 잡다한 생각을 하고있는동안 남자는 벌써 옷을 다 차려입고는 부엌의 테이블 위에 올려둔 커피를 챙겨 나갔다. 가끔은 스리피스 수트를 고르기도 하지만 남자의 스타일은 매일 똑같다. 각이 정확하게 잡힌 깔끔한 정장. 남자의 옷장에는 그 흔한 티셔츠 한 장 조차도 없어서 나는 신기해하기도 했다.

지나간 남자의 자리에 아른하게 남아있는 향이 좋았다. 기회가 되면 무슨 향수를 쓰냐고 묻고싶었지만 남자의 성격상 대답을 해주지는 않을게 뻔해 매일 아침 물어볼까 생각만 하고 만다.

서둘러 따라 나가니 남자는 벌써 대문 밖 저택을 빠져나가 손에 쥔 차키의 버튼을 누르며 차문을 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으레 배웅을 했다.

 

다녀오세요

 

성의없는 말투에 대문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고개를 한쪽 어깨로 젖힌 건성건성인 태도.

누가봐도 억지로 시켜서 하는게 분명한 대충인 태도에도 남자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럴 사람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남자가 지나치는 말로도 어머님께 이런 나의 성의없는 신혼 생활이 전해진다면 분명 그날로 나는 평창동 어머님 자택으로 소환되겠지.

골치 아파지기 전에 내일부터라도 성심성의껏 배웅해보자 속으로 다짐했다. 사람일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니.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남자의 차는 어제 남자의 연인을 태워 보낸 차와 비슷한 검은색 세단이었다.

재벌 3세나 되는 사람치고는 남자의 차 취향은 검소했다. 저택 차고에 있는 차는 총 세대인데 어제 여자를 태워보낸 차도, 오늘 타고간 차도, 지금 차고에 잘 주차돼있는 차도 모두 국내 브랜드의 차종이 확실하다.

보는눈을 의식한거겠지. 나이도 어린놈이 금수저 입에 물고 태어나 외제차나 타고 다닌다는 소리를 듣는게 껄끄러웠던걸까.

남자가 출근하고 홀로 남은 집은 고요했다.

곧 있으면 요리선생도 올거고 가정부 아주머니들도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정신없이 바쁘겠지.

길지 않게 누릴 수 있는 평온함에 마음이 노곤해졌다.

이 저택은 내가 들어오기 전에도 남자 혼자서 살던 집이라고 했다.

남자의 본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예전 내가 살던 집 보다도 한참 작은 아담한 크기의 저택이지만 안에 꾸며진 것들은 앞의 것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수준급이었다.

우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한옥식 저택의 옆엔 손님 접견을 위해 만든 작은 별채가 있고 마당 전체엔 있는 잘 관리된 조경수목들이 장식하고 있었다. 넓게 깔린 잔디풀과 그 위에 촘촘히 박힌 돌길. 그리고 마당 한쪽에 있는 작은 연못과 그 옆에 마련된 하얀 파라솔. 파라솔 밑에는 아늑해 보이는 흰색의 가죽 의자가 배치되어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푹신푹신하니 몸을 깊게 누일 수 있을것 같은 의자는 이 집에서 몇 년째 일하고 있다는 아주머니가 알려주기로는 남자는 주말이면 종종 파라솔 밑의 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는 했다고 한다.

내가 들어오고 나서는 한번도 주말에 있는 모습을 본적이 없어 나는 모르지만.

 

... .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나니 그제서야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 날씨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 공기가 상쾌했다.

이런 날씨라면 침대에 널브러져있는 것 보다 밖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것도 나쁘지 않겠지.

......

한번 앉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한번쯤 앉았다고 알아채지도 못할텐데.

나른해진 눈꺼풀은 서서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오기 시작했고 눈앞엔 당장 푹신한 의자가 있었다.

마음속으론 이미 답을 내려놓은채 짧게 고민하는척하던 나는 고민을 끝내고선 망설임 없이 의자위에 몸을 던졌다.

엉덩이와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푹신한 가죽의 촉감과 턱 끝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봄바람에 나는 속절없이 잠들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딩동 딩동

딩동딩동 딩동딩동딩동

 

눈이 번쩍 떠졌다.

잠깐만 눈을 붙인다는게 오후시간에 맞춰오는 요리 선생님 문을 열어줘야 한다는것도 잊은채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던걸까.

언제나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며 느긋하게 요리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은 흰머리가 지긋한 노년의 인자한 할머니였다. 한번도 이렇게 거칠게 벨을 누른적이 없는데.

화가 많이 나신걸까. 내가 설마 문밖에 세워두고 기다리게 한건가? 몇시간을 잔거지. 열두시 지나 오후에 수업 오시는분인데 그시간이 다 되도록 계속 잤다고? 도우미 아주머니는 출근 안하신건가? 왜 깨우지도 않았지.

경황없이 헐레벌떡 일어나 필사적으로 변명할 말을 쥐어짜내며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고 문을 열고는 나는 굳어버렸다. 내 앞에 서있는건 요리선생이 아니라 어제 새벽 봤던 남자의 연인이었다.

당황해 하는 나를 앞에 두고는 여자는 맑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사장님 차 돌려드리러 왔어요. 아무래도 직접 돌려드리는게 맞는일 같아서요... ”

 

그제서야 여자의 뒤를 쳐다보니 저택앞 담벼락에 주차된 검은색 차 한 대가 보였다. 어제 이 여자가 끌고갔던 김석진의 차다.

여자는 텅 빈 집안을 흘깃 훑어보더니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붙였다

 

사장님은 출근하셨나봐요. 사장님 출근시간에 맞춰서 빨리 온다고 왔는데 늦었네요. ”

 

오후까지 퍼질러 자다 요리선생 문도 못열어주는 추태를 보인건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이른아침에 남자의 집까지 수고롭게 찾아온 여자의 목적이 너무 뻔해서 나는 비웃었다.

급하게 서둘러한 결혼탓에 결혼식을 하지는 않았지만 알 사람들은 다 알았다. 세화호텔 부사장 김석진의 결혼사실을. 가장 가까운 사이 일텐데 이 여자라고 몰랐을 리는 없다.

필사적인 여자의 견제가 귀여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이여자의 적수가 못될텐데?

여자는 나를 잘 모를테지만 나는 여자를 꽤 자세히 알았다.

세화호텔에서 후원하는 고아원에서 자라 지금은 세화호텔 부사장 김석진의 비서직을 맡고있는.

결혼한지 얼마 안됐을 때 김석진의 결혼사실이 채 알려지기도 전 우연히 집에 찾아온 여자를 보고 누군지 궁금해 하던 나를 보고 가정부 아주머니가 넌지시 알려주었었다.

내게 알려주면서 분통 터져하며 요년 저년 여우년 하던 그 모습이 참 웃겼었는데 지금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여우긴 여우인데 다만 너무 어설퍼서 우스운 모습이다.

내 앞에 서서 맑게 웃는 여자를 앞에 두고 나는 순순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가 내민 차키를 받았다.

 

석진씨는 제가 아침 일찍 깨워서 보냈어요. 차는 운전 할줄은 몰라서요 석진씨 오면 얘기 전해드릴게요. 감사해요.”

 

생글생글 웃고있는 여자의 얼굴 한쪽이 순간적으로 굳은게 느껴졌다.

여자의 굳은 얼굴을 애써 무시한채 대문을 닫았다.

아마 굴욕적이겠지.

여자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애먼 사람을 앞에 두고 보이는 기싸움에 나는 순순히 얻어 맞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회사에 가서 남자에게 일러 바치려나 괜히 걱정이 되다가도 스스로 잘한일이다 다독였다. 조용히 숨죽여 지내고자 했건만 여자는 계속해서 나를 의식하겠지.

 

여자가 돌아나고 난 뒤 괜히 찜찜한 마음에 더 잠들 수 없었고 그날 요리 수업은 엉망진창이었다.





+) 늦어서 쩨성합니다..

설 연휴를 너무 길게 보내고 와서..

앞으로는 주에 한두편 정도 업로드 할거 같아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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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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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견제하는 석진이 애인의 등장이라니 크 정략결혼 스토리 너무 재밌어요... 다음화가 빨리 보고 싶어지네용 작가님 잘보고 갑니다💜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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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언능 오세요!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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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4
이야 애인이라니 아주 좋아요ㅠㅠㅠ찌통 좋슴미다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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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6
여주가 바보같이 당하고만은 있지 않아서 다행이예요!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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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7
작가님 다음편 언제 올라오나용?!다음 이야기 얼른 보고 싶슴다😭
6년 전
비회원도 댓글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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