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같은 밤의 시작을 알리는 어둠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미 창밖은 어두컴컴해진 지 오래였다. 00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애꿎은 지우개만 손톱으로 벅벅 긁어대다 손톱마다 끼어있는 지우개 찌꺼기를 보고서야 그 행동을 멈추었다. 그것은 00 특유의 불안 증세였다. 생채기가 군데군데 서린 00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 00의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면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00을 주시할 뿐이었다. 준면의 시선 아래로 보이는 00의 정수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문이 열리고,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적막이 일순간 깨뜨려졌다. 수염자국이 거뭇하게 자란 중년의 남성, 경구가 머리를 헝클며 들고 온 서류를 책상 위로 내팽개쳤다. 준면은 경구를 향해 짧게 목례를 했다.
「선배님.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이쪽도 복잡하게 됐다. 준면이 너, 오중흡 7연대라고 들어본 적 있지.」
「예. 1996년도 말에 극비리로 창설된 그 부대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 맞다. 김정일을 지킨답시고 만들어진 부대 말이다. 3차 핵실험 직후 김정은이가 가장 먼저 찾은 곳도 바로 그 부대였지. 북한 내에서 굉장히 신뢰받고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어.」
경구가 턱 끝으로 00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오중흡 7연대 대장 딸의 탈북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저 여자가…….」
「그래, 맞아. 000. 대한민국 땅을 밟은 지는 정확히 삼 년하고도 아홉 달 됐지. 프랑스 유학 도중 탈북을 시도했고, 도중에 친오빠는 발각됐어. 총살당했지. 열여덟 발을 맞았어. 그리고 북에서는 즉시 000의 가족에게 전원 사형명령을 내렸고. 그런데 000의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외쳤던 말이 뭔 줄 알아?」
00 쪽을 흘끔 쳐다보며 머뭇거리던 경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통일은, 머지않았다.」
00은 숨죽여 흐느꼈다. 준면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북한 내 최정예부대인 오중흡 7연대.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죽고 죽이는 서로만의 전쟁을 반복하다 살아남는 자만이 명예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르면 대여섯 살부터 훈련을 받는다고 했다. 훈련이라는 단어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동반하면서까지 그들은 부대의 일원이고자 하는 욕망 하나만으로 죽음에 맞섰다. 어쨌든, 그런 부대의 고위관직을 지닌 000의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자 준면의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해졌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영문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족 이야기에 경구와 자신을 등지고 애써 눈물을 삼키는 000 뿐이었다.
「맞아. 통일은 머지않았지. 김정일이가 그렇게 죽지 않았더라면 말이야. 김정일이 죽고, 상황이 안좋아졌어. 김정은이 집권한지 일 년이 지났어. 준면이 너는, 북한 내부 상황이 어떤지 잘 알고 있을거다. 장성택, 숙청, 그리고 최룡해. 뭔가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예.」
「오중흡 7연대의 대좌, 오세훈이 오고 있어. 북한의 고위 세력과 극비 부대를 모조리 꿰차고 있을지도 모르는 000을 죽이기 위해서.」
「선배님,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뇨.」
「고작? 표정 하나, 말투 하나에도 사람을 죽이는 나라라는 걸 잊었어? 이건 충분히 이유가 돼.」
준면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경구는 이런 준면의 반응쯤은 예상했다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창문 사이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경구가 무심히 던진 서류종이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하지만 지금, 좁은 공간 속에서 침묵을 지키는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그 소음에 반응하지 않았다. 경구가 창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구두 굽 소리가 적막 속에서 아이러니하게 섞였다.
「오세훈, 그리고 도경수. 」
「선배님, 도경수라면…….」
「맞아. 그 때, 내가 놓쳤던 조무래기.」
준면의 시선이 무심코 경구의 배꼽 언저리로 향했다. 그런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경구는 티셔츠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쬐끄만 놈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끈질겼어. 어깨에 총을 두 발이나 맞고도 나를 죽이겠답시고 돌진했지. 독한 새끼, 어른 배에 이딴 상처나 만들고 말이야. 씹새끼지, 천하의 씹새끼.」
「선배님…….」
「세월이 이렇게 흘렀어. 000의 아버지의 사형집행 직후, 도경수가 대좌자리에 올랐지.」
「잘못되면, 모두 죽는다고 들었습니다. 선배님, 너무 위험합니다. 이건……. 상식적이지 못하잖아요.」
「그 놈들이 상식적이지 못한 이상, 우리가 하는 일도 상식적이지 못할 수밖에 없어. 김준면. 잘 들어라.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내 명령이니까.」
「선배님!.」
「도경수, 오세훈. 모두 죽인다. 그리고 000.」
「…….」
「무조건 살린다.」
00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면과 경구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미안해요.」
이십 분여 간 자신을 죽이러 남한으로 온다는 최정예요원들과 끔찍한 악몽이었을 가족의 사형, 그리고 자신만을 위해 꾸려진,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실력파 요원들만으로 이루어진 팀. 불편할법한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그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강하게 떨렸고, 눈물로 가득 차올랐으며, 애써 삼키려 어금니를 꽉 깨문 듯이 어설픈 발음이었다.
*
「우리는 남으로 떠난다. 적을 모조리 무찌르고 돌아온다.」
한껏 낮게 가라앉힌 근엄한 목소리가 내부를 울렸다. 김일성의 사진 아래로 우뚝 솟은 승범의 신장은 적어도 백 팔십 센티쯤은 되는 듯 했다. 승범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있었다. 그것은 잔뜩 긴장된 자세로 서 있는 경수와 세훈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일제히 승범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84-526 도경수. 공화국을 위해 죽겠습니다. 적을 모조리 무찌르고 영웅이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25-727 오세훈. 적을 처단하기 전까지는 결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승범 역시 비장한 각오를 내비춘 그들을 향해 거수경례로 답했다. 그들의 임무는 오중흡 7연대 전 대장이자 대한민국과의 통일을 위해 힘쓴 내부 반역자 상일의 딸을 죽이는 것이었다. 북한은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일을 도맡은 이들의 방해가 있다면, 그들 역시 죽여도 된다고 명령했다. 그들은 북한의 개였다. 경수와 세훈은 조국의 명령이라면 당장이라도 자결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등지고 오중흡 7연대 예비대로 들어가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했던 세훈은 어느덧 스물 네 살의 어엿한 청년이 되어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시작된 날짜계산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기만 할 뿐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훈은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 품이 그리웠고, 젖내음이 그리웠으며, 미소가 그리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방심하는 사이, 상대의 칼은 허를 찌르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얻어 낸 수십 개의 상처들 중 하나, 세훈의 쇄골 아래로 깊게 파여진 상처는 그야말로, 어머니였다.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다 새겨진 이 영광에서, 세훈은 늘 어머니를 느꼈다.
경수의 집안은 대대로 조국에 목숨을 바친 이들과 고위관직을 지닌 이들이 가득했다. 어려서부터 방어와 공격을 넘나들며 반 강제적으로 단련된 경수의 몸은 아주 탄탄했다. 특수부대 출신인 아버지의 추천을 받아 들어가게 된 오중흡 7연대는 비밀부대답게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뤄졌다. 내로라하는 실력자들만이 모인 부대였지만 그 중 경수의 실력은 단연 최고를 뽐냈다. 아버지는 그런 경수를 자랑스러워했고, 사형당한 무용수인 어머니는 얼굴마저 가물가물했다. 그리고 경수는, 그런 아버지를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불신과 분노일 뿐 조국에 대한 충성은 변할 겨를이 없었다. 경수는 어쩔 수 없는 북한의 개였다.
「이번 일에 대 공화국의 미래가 달려있다. 죽이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는다. 죽이지 못하면 살지도 않는다.」
승범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기나긴 여정의 서막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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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유지태 못알아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