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이 바뀌었어요! Riffle→리플 (참고해주세요!)
[오백] 질투는 나의 힘 04
W. 리플(Riffle)
변백현은 질투가 많다. 그리고 그 질투 속에서 인생의 섭리를 배웠다. 질투는 복수를 낳는다는 것.
그리고 지금 막, 근 몇년 만인지 모를 자신의 질투심에 불이 타올랐다. 백현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거지? 떨떠름한 기분을 뒤로 한채 슬그머니 짜증이 돋아났다.
자꾸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카메라의 네모난 프레임에 잡힌 커플 한 쌍이 제 기분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백현이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털었다.
어느새 자신은 카메라를 목에 걸어놓은 채 팔짱을 끼고 제 눈앞에 있는 남자1과 여자1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른쪽과 왼쪽, 2.0과 2.0의 시력을 가진 백현의 눈이 잘못되지 않은거라면 지금 제 앞에서 행복한 듯 웃고있는 저 남자1의 정체는 경수가 분명했다.
근데 저 듣도 보도 못한 여자1은 누구란 말인가. 백현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모든 걱정과 그에 대한 생각은 밀물에 쓸려가는 듯 했다.
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게 되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사진의 한 컷에 담기 위해 단단히 고정시켜놓았던 가지가 탁- 풀렸다. 잘게 흔들리던 꽃잎이 가만히 백현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축 쳐져있던 눈시울이 붉어졌다. 경수를 만난 뒤로 자꾸만 눈물이 늘었다. 내가 일주일 동안, 누구 때문에 잠도 못잤는데…
백현이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을 때 경수는 여자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또 어디로 가려는 걸까.
손톱을 잘근잘근 물던 백현은 저도 모르게 무작정 경수의 뒤를 따랐다. 머리 위에 살풋 내려앉았던 꽃잎이 팔랑거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한참을 따라가보니 백현이 멍청하게 서있는 곳은 회사의 건물이 밀집된 큰 길가였다. 경수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인지 높이 솟아있는 건물 속으로 들어가려했다.
백현은 멍하니 층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저절로 치켜드는 고개에 뒷목이 뻐근했다. 무슨 생각으로 내가 여기까지 왔을까. 내가 와봤자, 할 수 있는 게 없을텐데.
이곳은 경수의 회사였다. 백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보도블럭 위에 서있는 자신이 보였다. 언제 풀린건지 신고있던 노란색 컨버스의 신발끈이 엉망이었다.
다들 저렇게 멋있는 수트에, 구두에, 넥타이까지 맸는데 난 뭐지. 백현은 차츰 그 무리 속에 섞여들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부끄러움, 창피함. 실타래가 엉킨 듯 잔뜩 꼬여버린 마음에 물기가 배어나왔다.
경수는 모처럼만에 제대로 된 점심시간을 즐기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요 앞에 벚꽃이 만개했다며 구경을 가자던 신입사원의 말에 혹해 식사도 반납한 자신이었다.
경수는 분홍색 벚꽃잎을 보며 백현을 그렸다. 같이 오고 싶었는데,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유난히 그 얼굴이 아른거리던 아침이었다. 회사로 출근을 하자마자, 용기를 내어 백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지루하게 이어지던 통화연결음에 막상 겁이 났다.
자신을 피하는 건 아닌지, 쓸데없는 걱정도 밀려들었다. 곧 사진전이라고 했던가. 아이처럼 웃으며 이것저것 자신이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었던 백현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전화였다.
경수는 씁쓸하게 웃으며 핸드폰의 홀더를 길게 눌렀다. 오늘은 날이 아니라고, 그렇게 단정지었다. 그리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백현의 사진전에 가볼까하며 결심을 했다. 그래, 그랬는데.
순식간에 경수의 눈이 커졌다. 동그랗게 뜬 눈을 꿈뻑거리며 경수는 지금 저가 헛것을 보고있는지 의심했다. 회사의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려다 무심코 뒤를 돌았을 뿐이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변백현.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신을 노려보는 저 하얀 얼굴. 제 머릿속을 잔뜩 헤집고 다니던 존재가 막상 눈 앞에 서있었다. 경수는 급하게 자신의 옷차림이 괜찮은지 살펴봤다.
이 시간에 여긴 왜 온거지. 혹시 저가 이 회사에 다니는 걸 알고 있는건가? 그 때 줬던 명함을 보고 찾아온건가? 한번 물꼬가 트인 생각은 막을 수 없었다.
"백현씨"
경수가 성큼성큼 백현에게 걸어갔다. 자신이 다가오는 걸 눈치 챈 백현이 그대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백현씨! 경수가 놓칠새라 뒤를 쫓으며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어느새 좁혀진 거리에 경수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백현의 팔을 붙들었다. 억센 악력에 넘어질 듯 멈춰선 백현의 입에서 거친 숨이 튀어나왔다.
자신이 왜 도망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우리는 매번 뛰기만 하네요"
경수가 건조하게 웃었다. 백현은 당황한 채 눈만 굴리다가 이내 저를 쳐다보았다. 메말라있는 두 눈에 이윽고 경수의 얼굴이 들어찼다. 백현은 입을 앙 다물었다.
창피했다. 그냥 이런 모습을 경수에게 보여주는 게, 왜 왔는지도 모를 이곳에서 경수를 만나는 게.
별안간 백현이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울음이 터져나왔다. 경수는 익숙해진 눈물을 보며 백현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 위로 꽃잎이 돋아났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나 보려고 왔어요? 응? 나 보려고?"
경수에 어깨에 얼굴을 묻고있던 백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그럼 여기 어떻게 왔어. 자꾸만 채근하는 물음에 백현은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오늘, 사진 찍으려고 왔는데. 경수씨가 있었는데, 어떤 여자랑. 근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어떤 여자랑?"
"그래서 따라왔는데 나는,여기서 뭘하고 있는거지. 멍청하게 진짜. 너무,너무 그냥"
아, 신입사원. 그걸 보고 오해를 했구나. 경수는 그제서야 백현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그니까, 그걸 질투해서 따라왔다 이거잖아.
"백현씨"
"…네"
"오늘은 회사동료랑 그냥 꽃구경 나온거였어요. 회사동료랑"
저를 안심시키려 살살 구슬리는 경수의 말투에도 백현은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백현의 얼굴에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놓치면 진짜로 잊어버릴까봐.
경수는 토닥이던 팔을 풀고 백현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나 작고, 이렇게나 하얀 사람.
보고싶었어요. 쑥쓰러웠는지 작게 헛기침을 하던 경수가 빙그레 웃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어느 봄날의 오후였다.
"근데 왜 나한테 전화 안했어요?"
"저한테 전화했었어요?"
"와, 진짜 섭섭하네. 저 뭐라고 저장되어 있습니까?"
"그러는 경수씨는요! 제 번호가 있기는 해요?"
"당연하죠, 이것봐요"
"아, 있네…"
"백현씨도 보여줘요"
""아 있기는 한데"
"뭐야, 나 지금 백현씨한테 차단 당한거예요?"
"…비슷해요"
"뭐라고 저장해놨는데"
발신번호 표시제한이요. 근데 나는 진짜 발신번호 표시제한으로 전화가 온 줄 알고… 미안해요. 수신거부 해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