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경수의 첫만남이 궁금하다는 댓글을 본 관계로,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풀어줄게.
먼저 말했듯이 나는 역사교육과, 경수는 국어교육과.
연관성이 정말 떨어져보이지만, 사범계열에서 제일 잘 놀기로 유명한 학과 두개가 국교과랑 역교과야.
그냥 신입일 때부터 선배들따라 술 모임 나가면 항상 국교과 애들이 우리 과 애들마냥 자리하고 있고 그랬어.
아무튼 그래서 경수는 1학년일 때 처음 봤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건 2학년 초여름 때.
지금까지도 경수가 나한테 미안해하고 있는 점이긴 한데, 일단 난 경수를 한 1년 정도 짝사랑 했었어.
그 때 워낙 경수를 좋아한다는 애들도 많았고, 여자애들끼리 카페라도 가면 항상 빠지지 않는 얘기도 경수 얘기였기 때문에
어디가서 나도 경수 좋아한다는 말은 못하고 살았는데, 아무튼 경수랑 친구로 지내는 동안 속으로 엄청 좋아했어.
원래 술 두어번 같이 마시면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그러잖아? 우리도 그랬어.
과모임이라고 나가면 항상 경수가 있었고, 1학년들끼리 앉으라는 선배들 때문에 앉기도 항상 같은 테이블에 앉았고.
근데 그렇다고 도경수가 여자 애들이랑 쉽게 친해지고 그럴 애는 아닌데,
요즘에서야 그 때 경수가 왜 나만 유일하게 친구라며 옆에 끼고 살았는지 새삼 알겠더라고.
아무튼 그러면서 사적으로 둘이 만날 정도로 친해진 상태로 2학년이 되고,
우리한테도 후배가 생겼다는 사실에 마음이 한창 들떴을 때 였어.
"누군데 핸드폰을 그렇게 사랑스럽게 쳐다봐."
"ΟΟΟ."
"역교과 ΟΟΟ?"
"어."
"또 걔냐? 누가보면 사귀는줄 알겠네."
경수한테 학식 같이 먹자고 문자 남겨놓고 강의실에 도착하고 보니까 벽 하나를 두고 경수 목소리가 들리는거야.
솔직히 엿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갑자기 내 이름이 들리니까 나도 모르게 몸이 멈칫하고 어느새 귀를 기울이고 있더라고ㅋㅋㅋㅋㅋ
그냥 그런거 있잖아, 나 없는 사이에 도경수는 나를 뭐라 생각할까 정도의 호기심?
내가 경수를 좋아하는 것도 있어서 괜히, 진짜 괜히, 괜한 마음으로 기대하면서 대답을 기다리다가
"과에 그런 소문 도냐?"
"아니 그건 아직 아닌...."
"혹시 들리면 무조건 아니라고 해. 사귀긴 무슨."
"그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은 뭐야. 너네 서로 마음 있는거 아니었어?"
"없어."
"아, 미쳤냐? 니랑 걔랑 조만간 사귄다에 10만원 걸었다 시발새끼야. 마음도 없으면서 그럼 뭘 맨날 만나고 지랄이야, 사람 헷갈리게."
연달아 들리는 걔네 대화에 머릿속이 새하얘졌어
경수가 날 좋아할거라는 생각? 상상은 많이 했어도 현실적인 가능성은 바란 적도 없었는데 막상 경수 목소리로 들으니까 멍해지는거야.
친구 말에 없다고 딱잘라 대답하는 경수는 진짜 애초에 마음을 줄 여지 조차 없는 것 같더라고.
마음이 얼마나 허했는지, 한참동안 거기 서서 멍 때리고 있다가 혼자 걸어나온 경수랑 마주쳤어.
차마 평소처럼 인사는 못하겠고, 그 자세 그대로 경수를 마주보면
"학식 먹자며, 여기서 뭐해."
"....."
"가자, 밥 먹....아,"
"약속 깨서 미안한데, 친구랑 먹어."
"....."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대하는 경수가 진짜 미워보여서 경수한테 잡힌 손을 놓고 얼른 자리를 피했어.
걔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미워한다는게 어찌보면 진짜 유치해 보일 수도 있는데,
짝사랑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게 어쩔 수 없는거잖아.
더이상의 가능성이 없단걸 직접적으로 명백히 확인한 이상, 내가 그 어떤 관계 지속에 힘을 쓰겠어?
그냥 그 날 그렇게 먼저 자리를 뜬 이후로 며칠간 경수를 피해다녔지.
전화도 피하고, 술모임도 피하고, 캠퍼스에서도 웬만하면 혼자 샛길로 다니고, 보고싶은거 꾹 참아가면서 지냈어.
그 때가 또 김진성한테 한창 연락 오던 때라 걔 피하랴, 도경수 피하랴, 진짜 정신 없던 하루하루의 연속이었어.
내 속사정을 아는 유일한 애들 2명한테만 다 털어놓고 걔네 주선으로 소개팅도 몇번 나갔었어.
성에 차는 놈은 없었지만 아무튼 나한텐 경수를 잊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면 수단이었고, 마냥 병신같이 계속 걔만 보면서 살 수 있는 성격도 아니고, 내가.
그 전 해부터 다른 남자 좀 찾아보라고 그렇게 닥달하던 애들 부탁으로 한 2~3번 나갔었지.
들어온 애프터 신청은 다 마다하고 그냥 시간도 보낼겸 평소처럼 대충 차려입고 소개팅에 나가던 어느 날에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
끝끝내 경수한테 걸렸지.
나오자마자 웬 훈대딩 냄새가 나나 했더니 도경수가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거야.
딱봐도 보다못한 내 친구들이 도경수한테 다 불고 소개팅 나가는 나년 잡으러 찾아 온 것 같더라고.
그렇게 보고싶던 얼굴을 참다참다 그 모양으로 갑작스럽게 마주치니까 뭔 말이 안나오더라ㅋㅋㅋㅋㅋ
근데 솔직히 다 따져보면 난 잘못한게 없는 것 같은거야. 우리가 사귀기를 해, 뭘 해.
'나한테 줄 마음이라곤 개미새끼 똥 만큼도 없는 놈이다' 라고 수십번 되뇌이면서 침착하고
"오랜만이네."
최대한 자연스럽게 활짝 웃으면서 인사를 하는데
어째 꿈쩍않고 표정에 변화가 없는 경수는
"왜 오랜만일까."
"......"
진짜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거야.
아,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눈빛은 너무 무서웠다, 인간적으로.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면서 왜 오랜만이냐고 물어보는데 뭔 말이 나와야 말이지.
이유는 있는데 차마 경수한테 말할 만한 이유는 못되는 것 같은거야.
그냥 나 혼자 썩히다가 말면 그만인데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하니까 당연히 당황스럽지.
나랑 같이 다니면서 도는 소문도 그렇게 질색하는 애가 내 얼굴 좀 못보는게 뭐그리 대수라고 찾아올거라는 생각이나 했겠냐고, 내가.
"경수야, 나 약속있는데. 전화로 얘기하면 안될까."
"소개팅 취소해."
"....."
"너가 강의실에서 뭘 들었는지 알겠어. 잘 알았으니까 괜한짓 말고 일단 취소부터 해. 얘기 좀 하자."
바쁘다고 자리 피하려는 날 잡고 안놔주는 경수 때문에 결국 약속까지 취소했어.
내가 일부러 소개팅 시간보다 일찍 나왔으니 망정이지, 맞춰서 나왔으면 아마 욕 오지게 먹었을게 뻔해.
아무튼 내가 취소 연락을 하자마자 내 팔을 끌어다가 놀이터에 세운 경수는 한동안 나를 쳐다보기만 했어.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너무 오랜만이고, 좋지 않은 이유로 만났으니까 말도 안나오고 그냥 그 분위기가 너무 민망한거야.
오랜만에 입은 치마만 계속 잡아내리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갑자기 경수가 내 쪽으로 두발짝 걸어오더라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진성선배한테 연락은 아직도 와?"
".....(끄덕)"
"그래서 결론이 뭐야. 왜 그 사람 연락은 못끊어내는건데."
김진성 얘기더라.
혹시 몰라 얘기하는데 얘가 이 때까지만 해도 진성 오빠한테 꼬박꼬박 선배를 붙였었어, 지금은 뭔새끼 뭔새끼 하지만.
아무튼 난데없는 진성 오빠 얘기에 고갯짓으로만 대답했어. 그러다가 연락을 왜 못끊어내냐는 질문에는 멈칫했지.
연락을 못끊는 이유? 씨발? 말그대로 못끊는거지, 안끊는게 아니라.
끊으면 새로운 방법으로 연락을 해오는 걸 어떻게 막냐고, 싫다고 딱잘라 말해도 그냥 벽에다 얘기하는 기분이랄까?
심지어 그 즈음에는 참다참다 이 또한 지나가리, 싶어 그냥 방치하는 수준의 연락이었단 말이야.
"관심없어. 진성오빠 연락은 막는다고 막아지지도 않고, 요즘은 그냥 거의 신경도 안쓰.... 아, 너 연락은 이유가 따로 있으니까 오해하..."
"알아."
"....."
"다 들었어."
진성 오빠 연락을 피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다가 순간 경수 연락 피한게 생각나서 혹시나 오해할까봐 허둥지둥 댔어.
니 연락을 씹은건 별다른게 아니라 아, 음. 어, 그러니까, 그게.
내가 말해놓고도 뭐라 설명해야 알아들을까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던 와중에 경수가 내 말을 끊더니 "알아" 하는거야.
알긴 뭘 알아? 계속 피하기만 하던 눈동자를 굴려 경수를 쳐다보니까 아까 그 무섭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다 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이더라.
들어? 뭘?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눈썹을 씰룩이니까 한발자국 더 걸어온 경수가
"너가 강의실에서 뭘 듣고 왜 피해다녔는지 다 들었어."
이러는거야.
이 소리가 곧 내가 본인 좋아한다는걸 안다는 소리나 다름 없잖아?
난 진짜 그 때 심장이 너무 놀라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 만 존나 반복하며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있으니까 또 경수가
"진성 선배랑 너랑 잘되고 있는 줄 알았어."
"....."
"소문도 몇번 들었고, 진성 선배가 나한테 누누히 얘기하길래 그런 줄 알았어."
"......"
"난 그냥 니 연애에 적어도 방해 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어."
"......"
이러더라고.
나중에 경수한테 들은 바로는 김진성이 나랑 경수 사귄다는 소문이 계속 도니까 아닌척 연락을 계속 했었대.
본인이 나랑 잘 되고 있는데 나 좋아하는거 뭐있냐고 물어보면서 조언을 구하는 식으로 분위기를 유도했던거지.
떡잎부터 알아봤다니까? 경수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여우니 뭐니 내 소문 돌까봐 알아서 사리고 다닌거고.
그런 경수 얘기를 쭉 듣다가 김진성 이새끼 얘기에 좀 열이 받으려고 하는데
"진성 선배한테 먼저 가려다가, 여기로 먼저 왔어."
".....왜."
"너 나 좋아한다며."
"....."
"너무 다행이야."
"......"
"내가 더 좋아해."
이러더니 나를 쏙 안더라? 너무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그냥 안긴 상태로 상황 파악 좀 해보려다가
"내가 더 좋아해" 또 들려오는 경수 목소리에 옳거니 하며 나도 같이 안아줬지.
한 3주 만에 만났었나? 진짜 오랜만에 보는데 그 터울 사이에 벌써 이렇게 부둥켜 안고 있다는 사실이, 안고있으면서도 안믿겨지더라고.
그리고 그 다음날인가 술 모임에 같이 손 잡고 등장했어. CC는 절대 하지말라고 누군가가 그랬다만, 김진성을 위한 특단의 조치였달까.
김진성은 나랑 잘되고 있다는 문자를 경수한테만 보냈던게 아니었는지 아주 한동안 과 분위기가....허허.
경수가 언제부터 날 좋아했는지는 지금까지 나도 모르는 일이고, 아무튼 얜 아직도 미안해하는 것 같아ㅋㅋㅋㅋㅋ
1년 동안이나 자기를 좋아해줬는데 몰라줘서 미안하다나 뭐라나, 그게 짝사랑의 재미거늘.
혼자 좋아하게한 만큼 사랑해주겠다던 도경수의 그 옛날옛적 대사가 아른아른 거린다. 후.
아무튼 이 때 김진성의 지랄이 어쩌면 미워도 하나의 연결 고리가 되어준 것 일지도 몰라ㅋㅋㅋㅋㅋㅋㅋㅋ
덕분에 2년 3개월 째 연애 중임.
여러모로 이상하게 도움 되는 사람이야, 그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으니 난 이만 물러갈게.
다들 또 안녕!
암호닉은 다음편에서 정리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 벌써 엄청많이 외운 것 같아요!! 뿌듯합니다, 허허.
다음 글에서 암호닉 정리를 한번 끝낸 후의 암호닉 신청은 앞으로 최신 글에서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벌써 8월의 끝자락에 다다라 이제 9월이 또 저희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들 추석만 기다리고 계시죠? 네, 저도요ㅋㅋㅋㅋㅋㅋㅋ
시간이 겉잡을 수도 없이 빠르게 흐르는데에 놀라는 것도 이젠 지치네요. 너무 빨리가요, 너무. 무섭도록. 흙.
흙흙 모래모래.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글쓰는 동안 딴 짓하는 습관도 이제 좀 버려야겠어요..
의지대로 이틀만에 돌아온 코짱은 이렇게 또 물러갑니당
곧 또 봬요~♡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