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ㅇ, 너 공부 안 하는 거 알고 있으니까 유치원 와서 교구 정리좀 도와." "아, 엄마! 나 공부중이거든?" "이 만원, 됐어?" "몇시까지 가면 돼요?" 이틀 동안 안 감아서 떡진 머리에다가 동이 틀때까지 스마트폰을 붙잡느라 턱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내 꼬라지가 보충 기간이 끝난 방학의 폐혜를 처참히 보여주고 있었다. 뭐, 어때. 앞머리를 삔을 꽂아 넘기고 대충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무릎이 늘어난 츄리닝을 입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만원으로 씨씨크림인가, 그거 사야겠다. 매서운 바람이 살갗에 닿아 쌀쌀한 느낌에 몸서리가 쳐졌지만 오랜만에 쐬는 바깥 공기에 기분이 한껏 들떠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얼마만에 유치원 가는 거지, 설레네. "엄마! 왔어, mommy! I'm here." 요즘 영국 드라마에 푹 빠진 나는 브로큰 잉글리쉬를 쓰는 것에 맛이 들렸다. 언니는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영어를 쓰는척한다며 면박을 주기 일쑤였고, 엄마 아빠는 우리 딸이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어디 있는거야, 진짜. 열려진 문을 슬그머니 열고 안으로 들어섰지만 불이라고는 켜져있지 않은채로 원실이 텅비어 있다. 핸드폰을 꺼내들어 다이얼을 누르는데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아, 원장실에 있구나. 나는 총총총 원장실로 뛰어갔다. "Where are you-I got it! You are in the 원장실." 마치 내가 뮤지컬 배우인냥 손을 휘휘 저으며 성악톤으로 노랫 가사를 흥얼거리듯 말을 하며 원장실 문을 제쳤다. "......." "누구, 아니 아 유 마,마더? 맘?" "네?" "어머니세요?" 엄마가 있어야할 자리에 어떤 남자가 앉아 있었다. 뭐,뭐야? 순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는 말을 더듬으며 바디 랭귀지까지 써댔다. 지금 나를 아줌마로 보는건가? 영어 쓰는 아줌마? 나는 창피함에 어쩔줄 몰라 문을 닫고 뚜벅뚜벅 밖을 향해 걸어 갔다. 제발 아는척 하지 마라, 제발. 이내 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저기, 아이 때문에 오신 거 아니세요? 원장님 금방 오실거니까..." "아,아니에요." "그러면 무슨 일로?" 핸드폰을 손에 든채로 어, ㅇㅇ이 왔어? 엄마가 명쾌한 목소리로 손을 흔들었다.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나와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변선생님, 우리 딸이에요. 인사해 ㅇㅇ아, 이번에 새로 오신 남자 선생님이야." "네, 안,안녕하세요." "아,네,안녕하세요."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변선생이라는 남자가 헛기침을 해댔다. 나는 눈을 피하며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이내 벨소리가 울리고는 엄마가 교구 정리를 부탁한다며 자리를 떴다. 이제 둘뿐이었다. 아, 그냥 가버릴까.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아학개론 pro. "아깐 미안했어요, 어머님인줄 착각하고..." "아니에요, 괜찮아요." 후드를 푹 눌러쓰고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여기저기 어질러진 장난감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온다고 했나봐. 남자와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발걸음을 옮겼는데, 아뿔싸, 레고 조각을 밟아버렸다. 아!하는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나는 앞으로 꼬꾸라졌다. "어, 일어날 수 있겠어요?"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나에게로 달려왔다. 나는 창피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왜이렇게 쓸데없이 친절한 거야. 남자가 내 팔을 잡고는 으쌰하고 일으켰다. 남자가 주변에 흩어진 레고 조각을 박스 안에 담고는 살풋 웃었다. "조심 좀 하지." "아,네. 죄송해요." "뭐가요?" "아니, 그냥..." "죄송하면 교구 조립하는 거 좀 도와줄래요?" 남자가 양손으로 장난간 같은 것을 내밀었다. 작은 체구와 귀엽게 생긴 얼굴과 다르게 큰 손이 이질적이었다. 손 한 번 잡아보고 싶다.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렇게 멍하니 손을 바라보다가 남자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싫어요? 나는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뺐다. 그러고는 중심을 잃고 뒤로 자빠지던 찰나 남자가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또 넘어질뻔 했네, 미안해요. 이번에는 내 잘못."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는 냉큼 교구를 받아들고는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어떻게 하는건지 몰라 손으로 꼬물꼬물대는데 남자가 살풋 웃음 지으며 다가왔다. 왜 자꾸 웃는거야, 창피하게. 남자가 내 앞에 앉고는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따라하라며 내 손을 바라보는데 양 볼이 달아오르는게 느껴졌다. 이게 뭐라고 부끄러워하는거지. 꼬물대던 손을 내려놓고는 울상으로 남자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 왜이렇게 작아요?" "네?" "애기 손 같네. 중학생이에요?" "아니요, 아까는 어머님 아니냐고 했으면서 갑자기 중학생이라니..." 남자가 손사레를 치며 푸하하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걸까, 미간을 찌푸렸는데 남자가 손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뭐야, 이남자. "자꾸 그러면 주름 생기는데." "아,네." "몇살이에요?" "열여덟이요, 근데 제가 그렇게 나이 들어보여요? 아줌마 소리 들을만큼?" 갑자기 흥분을 해서 언성이 높아졌다. 어딜가서 중학생 소리를 들을만큼 어려보이는 외모라는 소리를 듣고 다녔는데 엄마라니,엄마라니!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아까 ㅇㅇ씨가 얼굴을 숙이고 또 가려서 아예 얼굴을 못 봤어요. 가끔 그런 어머님 계시거든요, 애들 교육 때문에 영어 쓰시는. 그리고 그런 톤으로 말하면 당연히 어머님인줄 알죠. 사과할게요." 남자가 박스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장난감 사과. 남자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나는 남자의 엉뚱한 행동에 기가 막혀 헛 웃음을 지었다. "어, 웃었다! 처음으로 웃은 거 알아요?" "아,네." 입을 삐죽였다. 저 남자는 나를 놀리는 게 틀림 없을 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상해 급히 일어나 교구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른 끝내고 빨리 가야지. "꿈이 유치원 교사에요?" "네." "정말?" "네, 정말요." 뜬금없이 꿈에 대해 물어보는 남자, 이제 받아주기도 지쳐서 아예 단답을 하기로 결심했다. 귀찮아. "뭐,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요?" "딱히." "정말 하나도 없어요?" "뭐 배워요? 유아교육학과에서, 유아학개론 그런거 배우나." 남자가 곰곰이 생각하는듯 한동안 인상을 찌푸렸다. "응, 유아교육학개론 배우죠. 실습도 하고." "아, 그렇구나." "근데 난 졸업한지 꽤 됐는데 아직도 실습하는거 같아요." "네?" "지금말이에요 지금, 어린 아이랑 놀아주는 거 같아요. 귀여워요 ㅇㅇ어린이." 이런게 두근거리고 설레는 느낌일까,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 물밀듯이 가슴 한켠에 밀려들어왔다. 간질간질한 기분. "맞다, 이름을 안 말했네, 변백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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