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말, 진단을 받고난 후 종대는 예정되어있던 과외를 경수에게 넘겼어. 수도권 과외시장 내에서도 꽤나 짭짤한 축에 속하는 건이었는데 선뜻 제안을 해오는 종대를 보며 경수는 의아해했지. 이번 여름은 내가 사정이 생겨서... 종대는 말끝을 어물거렸어. 경수는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뿔테 너머로 작게 왜곡된 종대의 눈을 바라봤어. 김종대 원래 저렇게 눈이 나빴던가. 경수는 켕기는 것이 많았지만 더이상 묻지 않았어. 눈썹을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종대를 바라보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는 것으로 양도계약은 성립이 되었어. 종대는 경수를 배웅해주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속으로 몇 번이고 사과를 했어. 경수는 종대에게 손에 꼽히는 '정말' 친한 친구였어. 그래서 더더욱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말하고싶지 않았지. 허물없는 친구사이를 위시하며 털어놓기엔 경수는 속이 너무 깊었어. 그리고 속이 깊은 데 비해 은근히 정신적인 맷집이 약했어. 경수만은 절대로 알게 해선 안 되었어.
다음 날, 종대는 학교에 들러. 퇴학처리를 하기 위해서였지. 종대의 학우들 중에는 여름학기를 듣는 저주받은 자들이 몇몇 있었기에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굉장히 조심해야했어. 이게 무슨 팔자에도 없는 잠입놀이인지. 착용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왠지 범죄에 일가견이 많을 듯한 인상을 풍기게 하는 검은 야구모자를 눌러쓰며 종대는 헛웃음을 지었어. 안경때문에 그나마도 추레해보였던 몰골이 한층 더 악화되는 듯 했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종대는 무사히 사무실에 도착했고 퇴학처리 역시 무사히 완료돼. 홀가분 하면서도 입맛이 썼어. 다시는 걸을 일이 없는 익숙한 복도를 지나며 종대는 상념에 빠져.
이번 주말에는 찬백이들을 만나 술이나 양껏 퍼먹여줘야지. 그리고 준면선배에게 빌린 이어폰을 돌려주고, 옷도 돌려주고, 게임 usb랑, 교양책이랑... 세상에 나 이 형한테 많이도 빌려갔었네, 기말고사 족보 감사했다고 인사도 할겸 전부 퉁쳐야지. 그리고 지도교수님도 한 번 꼭만나뵙고, 또 조교 형 누나들도. 그리고 경수도 한 번 보고... 그러고보니 개강하고서 같이 노래방 가서 나가수하자고 약속했었는데... ...그리고 고딩동창애들도 봐야 하는데... 그리고... 그리고......
종대는 서러워져.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게 이렇게 힘든 것이었나. 대체 왜, 그 쉬운게 나에겐 힘든 것일까. 종대는 죽는 것이 너무 싫었어. 하지만 처량맞게 우는 꼴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더 싫었어. 눈앞이 눈물로 일렁이는 것을 느끼며 종대는 비상구 계단실로 숨어들어가. 한 번 눈물이 터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이 복받쳐 올랐어. 하지만 울면 울수록 가슴께가 꽉 막히는 기분이었어. 그렇게 오도카니 서서 한참을 숨죽여 우는데 윗층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느껴져.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뿌옇게 흐린 긴 인영이 종대 바로 앞까지 다가온게 느껴져. 반응할 기운도 기분도 없는 종대는 바닥을 쳐다보며 계속 훌쩍거려.
괜찮아요?
낮은 목소리가 계단실 안에 울려퍼졌어. 종대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봐. 바로 눈 앞에 있는 인영이 눈물로 엉망이 된 안경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아. 종대보다 키가 한참 큰 남자는 말없이 종대를 마주 봐. 코 끝은 빨개지고 얼굴은 상기되어서는 눈에는 초점이 없어. 그다지 매력있다고 할만할 모습은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남자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 해. 남자는 저도 모르게 종대에게로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종대의 안경을 벗겨줘.
괜찮아요.
아까와 꼭 같은 단어였지만 끝음절 억양이 미묘하게 달랐어. 그리고 이어지는 남자의 나지막한 말에 종대는 가슴속 어딘가에 꼭 박혀있던 것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껴.
괜찮아요, 다 괜찮아 질거야.
그 날 종대는 참 많이 울었어. 크리스는 종대에게 정답을 주지는 못했어. 하지만 정답은 아닐지언정 절실했던 말이었지. 종대는 가끔 정말이지 심각한 외골수였고 그래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그간의 정신적인 고단함을 전부 씻어내기라도 하듯이 남자가 살짝 당황할 정도로 오열했어. 키 큰 남자, 아니, 크리스는 그런 종대를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팔을 들어 말없이 종대를 다독여줬어. 반응이 너무 거세서 내가 울려버린 건가 싶을 정도인지라 묘한 책임감이 들었거든. 흠칫 놀란 종대는 크리스를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아예 크리스 가슴 언저리에 얼굴을 묻고 울어버려. 굉장히 뻔뻔스러운데 반해 이상하게 싫지는 않아서 크리스는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지.
(오늘은 여기까지... 댓글달아주신 분들 전부 감사합니다. 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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