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암흑이어서 아무것도 안보이던 전과는 달리 지금은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낡은 전등, 보도에 널브러져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들, 색이 바랜 헌옷수거함.. 왠지 모르게 익숙한 풍경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예전에 여기 온 적이 있었나? 생각에 잠긴 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 드디어 생각이 난 나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5년 전,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세훈이와 함께 하교하던 길이었다. 긴장이 풀린 나는 헌옷수거함 옆에 쪼그려 앉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온통 암흑이었고 겨우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 누군가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나에게 달려오던 그 사람은 공포 영화에나 나올법한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설마 아직까지 나를 쫓아오는 건 아니겠지?"
불안함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슬쩍 고개만 내밀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달려오는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괴성이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빠르게 몸을 일으켜 괴성이 들리는 반대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잡히고 싶지 않았다. 멀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곧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고 달려도 같은 장소만 반복되었다. 마치 한 장소를 이어붙인 것처럼. 그 사람은 어느새 내 바로 뒤까지 쫓아와 손을 뻗고 있었다. 억센 힘에 몸이 돌려지고 나는 그 사람의 얼굴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 여자의 얼굴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 꿈이었다.
지하도시 01
w. 요맘때워더
젓가락으로 조그맣게 밥을 떠 입안에 집어넣었다. 밥이 아닌 모래를 씹는 느낌이었다. 영 입맛이 없다.
"오늘도 그 꿈 꿨어?"
"....."
대답 대신 탁 소리가 나게 젓가락을 놓았다. 내 행동에 세훈이는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군소리 없이 밥을 먹었다. 그 꿈을 꾼지도 이제 일주일째였다. 처음에는 그 꿈을 꾸고 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8시간동안 서빙을 해도 그렇게까지 몸이 무겁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아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큰 후유증이었다. 그 이후로도 매일 그 사람은 내 꿈에서 똑같이 괴성을 지르며 나를 쫓아왔다. 그러면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주문 외우듯 중얼거렸다. 제발 깨어나. 제발. 제발. 내 주문이 통했는지 그렇게 계속 외우면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에게 쫓기지 않아 매우 만족스러웠으나 한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이후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잠을 잘 수 없었다. 덕분에 내 다크서클은 줄넘기를 해도 될 정도로 내려와있었다.
"다크서클 좀 봐. 너 진짜 어디 아픈 애 같아. 물론 요즘 너 하는 행동 보면 진짜 아픈 것 같기는 하다만."
"맞고싶냐?"
웬일로 오늘은 조용히 밥을 먹나 했더니. 역시 오세훈이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다. 친구가 악몽 때문에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자면 위로를 해주지는 못할망정 놀려대기만 하고. 내가 피곤하지만 않았어도 한 대 때려주는 건데.
"맞잖아. 너랑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애가 나한테 알려준 건데 너 요즘 진짜 이상하대. 특히 이쪽으로."
내가 슬슬 반응하자 신이 난 건지 오세훈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낄낄 웃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저 새끼를 죽여? 살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따갑게 째려보다가 이것도 다 힘 낭비라고 생각하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맛도 없고, 힘도 없고. 오세훈 말대로 나 정말 어디 아픈 애 같다.
"너 밥 다 먹은 거야?"
"어."
"야, 내가 요즘 너 밥 잘 안 먹어서 일부러 네가 좋아하는 햄 구웠는데 이러기냐?"
"응."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먹고 가. 이제 안 놀릴게."
"됐어. 배불러."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거실 소파에 몸을 뉘었다.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매만지며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부엌에 있는 오세훈은 구시렁대며 식탁을 치우고 있었다. 맨날 사소한 걸로 다투지만 세훈이와 나는 이래 봬도 10년 지기 친구였다. 단순히 친구라는 정의를 넘어서 가족 같은 존재였다. 세훈이와 나는 부모님이 없었다. 세훈이의 부모님은 세훈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사고로 돌아가셨고, 나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 D 구역에서는 흔한 케이스였다. 적어도 나는. 무엇 하나 정상인 게 없는 이곳은 항상 정액 냄새와 역겨운 화장품 냄새, 술 냄새가 진동했다. 밤이 되면 창녀들의 교성이 여기저기 울려 퍼졌고 나와 세훈이는 그걸 자장가 삼아 자라왔다. 배운 게 없는 창녀들은 피임이라는 것 자체를 몰랐고 그 덕에 애꿎은 신생아들은 태어나자마자 길바닥에 버려졌다. 그 신생아 중 하나가 나였다. 소파가 옆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세훈이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 다른 거 봐도 돼?"
엉망진창인 이곳에서도 규칙이라는 게 있었다.
"응?"
버려진 신생아들은 평생 이름을 가질 수 없었다.
"되냐니까?"
우습게도 최하층민들만이 모인 이곳에서도 서열이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야!"
세훈이는 그런 나에게 애칭을 지어줬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부르지 않는 애칭.
"누리야!"
그 애칭은 누리였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이거 말고 뉴스 좀 보자."
내 손에 들려있던 리모컨을 가져간 세훈이는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뉴스를 찾았다. 채널이 바뀔 때마다 눈을 감았다. 눈이 따가웠다.
[이번 소식입니다. 전 A 구역 시장인 이승훈 씨가 심장발작으로 병원에 이송되었습니다. 재빠른 응급조치로 지금은 양호한 상태이며..]
"저 시장도 참 끈질기다."
"그러게."
D 구역의 시민들은 A 구역 시민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동시에 A 구역 시민들을 동경했다. 그들은 자신을 D 구역으로 집어넣은 A 구역 사람들을 싫어했지만 부러워했다. A 구역. 우리들은 평생 발자국조차 남길 수 없는 꿈의 이상향.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그들의 아침은 어떠한지. 학교는? 하다못해 그곳에서 나뒹구는 쓰레기마저 궁금했다. 그 쓰레기에서는 악취가 풍길까?
"우리 점심은 나가서 먹을래?"
"그래."
"나가서 산책도 하고 놀자."
"논다고 해봤자 낡은 오락기구밖에 더하겠어?
내 날카로운 말에도 세훈이는 마냥 좋다며 웃어댔다. 일주일 동안 아르바이트 외에는 움직이기도 싫어하던 내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좋은가 보다. 우리 세훈이, 많이 심심했구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후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이미 준비를 끝낸 세훈이는 문에 기댄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하다 못 해 불쾌하기까지 했다. 아침밥도 괜찮았고 기분 나쁠 일이 없었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세훈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맑고 깨끗한 눈. 나는 그 눈이 좋았다. 자조적으로 웃은 나는 세훈이에게 달려가 손을 잡았다. 몸을 움찔거린 세훈이가 나를 내려다봤다. 그 시선은 오묘하고 기이했다. 그 시선을 꿋꿋이 받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세훈이가 시선을 바깥으로 옮겼다. 나 또한 웃음을 멈추고는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4년 동안 지겹도록 보던 풍경들이 오늘따라 어색하게 느껴진 건 기분 탓일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세훈이의 하얀 손을 바라봤다. 어쩌면 아까 전 세훈이의 말이 맞았을지도 몰랐다. 이상하다. 내 머리가. 내 기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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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요맘때워더입니다. 이 글은 '지하도시'에 사는 여주인공과 엑소 멤버들의 이야기입니다. 1화에서 주인공과 세훈이의 관계, D 구역의 실상에 대해 썼어요. 아주 조금;ㅅ; 사실 1화 안에 '지하도시'의 체계를 다 쓰려고 했는데ㅠㅠㅠㅠ실패했네요ㅠㅠㅠㅠ 너무 충동적으로 써서 완결은 낼 수 있을런지.. 걱정이네요ㅠㅠ(아직 등장할 멤버들도 정하지 않은게 함정) 그래도 완결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ㅠㅠㅠ |
마지막은 제가 이 글에 대해 영감을 받은 '몬트리올의 지하도시' 사진으로 끝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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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키 158에 이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