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벅- 저벅-
내 발걸음소리가 낮게 울린다. 그리고 그 뒤로 울리는 좀 더 낮고, 무거운 발소리.
저벅- 저벅-
같은 방향으로 또 같은 속도로 울리는 발걸음.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길.
설마. 설마 나를 따라오는 거겠어? 나도 참, 뉴스를 너무 많이 봤어.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피식- 웃으며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평소엔 듣기 좋던 중저음의 목소리가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음산하게 느껴지는지. 잘 듣지도 않던 댄스곡을 찾아내 재생버튼을 누른 채 볼륨을 높이자 그제야 이 어두운 밤거리가 밝아지는 것 같다.
톡톡,
한 참을 그렇게 걷고 있던 찰나, 어깨에서 느껴지는 작은 움직임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건지 나보다 한참은 큰 남자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누나- 하고 부르며 내 귀에서 이어폰을 빼던 그 큰 손. 순간 노래에 묻혀 잊고 있던 발자국 소리가 떠오른다. 나를 뒤쫒는 듯한 그 낮은 발자국 소리. 동시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오르는 나를 알아챈 건지 내 앞에 선 이 남자는 부드러운 눈으로 누구보다 차갑게 웃으며 날 본다.
"있죠, 누나. 이렇게 늦은 시간엔 이어폰 끼고 다니면 안되요. 누가 따라올 줄 알고 그렇게 방심하고 걸어요? 다음부턴 그러지마요."
한 참 나를 바라보던 그 남자는 한마디만 남긴채 다시 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동시에 다리가 풀려버린 난 어두운 이 골목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러니까 내가 며칠을 쫒아다녀도 모르잖아, 바보같이. "
.
.
.
그때부터 너는 내게 너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지않았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 아침이면 잘잤냐는 너의 문자가 와있고, 밤이면 나를 따라 울리는 너의 발자국 소리가 반복됐다.
너로 시작하고 너로 끝나는 내 하루가 저물 동안 너는 수십개의 문자를 보내왔다.
오늘은 날이 추운데 치마는 왜이렇게 짧아요? 누굴 꼬시려고?
아침에 가스밸브 안잠궜던데 내가 잠갔잖아, 조심 좀 해요.
열쇠 화분 밑에 놓는건 너무 티나지 않아요?
어제 처럼 술먹고 다른 남자한테 업혀 들어오기만 해요.
어쩌면 그날 네가 내게 다가온 것은 이제 그만 그림자밖으로 나오겠다던 표시였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수없이 쫒아다니고 쫒아다녀도 너의 무엇도 눈치채지 못한 바보같은 내가 답답했던 건지, 아니면 이젠 너만 봐도 질려하는 내 얼굴을 즐기기로 한건지. 그 대답이 뭐든 너는 그저 내게 그 무엇보다 두려운 존재일 뿐이야.
너는 내게 급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끔찍한 뉴스 기사처럼 나 혼자 있는 방에 들어와 나에게 해를 가하지도 않았다. 그저, 언제나 나를 너의 시선안에 두고 내가 메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있었다. 사냥감을 조용히 옭아매는 짐승처럼, 너는 그렇게 나를 조용히 몰아세우고 있었다.
내가 너의 우리 안에서 말라죽기 직전, 나는 처음으로 내 집에 남자를 데려왔다. 평소에 내게 관심 많던 선배였다. 이젠 누구든 상관이 없었다. 너에게서 나를 지켜줄 수 있다면. 무서웠다, 네가 너무 무서워서, 그리고 그 두려움 속에서 나혼자 지새던 그 밤이 무서워서 이젠 누구든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그 날, 너는 지독하던 그 잠복을 거뒀다. 처음으로 급하게 내게 다가오는 네 움직임이 나는 정말 한 마리의 늑대같다고 생각했다. 순식간에 그 선배는 집 밖으로 던져졌고, 너는 내 앞에 여전히 서 있다. 눈 앞에서 벌어진 그 찰나의 순간동안 나는 이젠 끝내고 싶어- 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 정적을 깨던 네 웃음 소리-
"아, 뭐야. 누나. 겨우 저런 자식 하나로 나 떼어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여전히 시선은 내게 고정한 채, 누구보다 순진한 눈으로, 그 누구보다 서늘하게 웃던 너.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마요. 누난 아무데도 못 도망쳐."
네 웃음을 보며 나도 같이 웃음이 났다. 동시에 허허...하는 공허한 웃음이 터지듯 뚝뚝, 하고 눈물도 터졌다.
"어? 누나 지금 떨어요? 아니네, 울어요?"
고개를 내게 숙인 채 눈물흘리는 나를 바라보는 너를 보면서 생각했다.
난 어쩌면 영원히,
너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그래도 안 놔줄건데. 우는 것도 예쁜데 어떻게 놔줘요, 난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