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열린 입술 틈새로 하얀 입김이 모락모락 퍼져나갔다. 입김이 하늘로 올라가며 흐려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춥다. 주머니에 넣어둔 핫팩을 만지작거려 보았다. 그래도 얼굴에 닿는 바람은 차가워 핫팩을 꺼내 얼굴에 문질렀다. 사실 나는 잠시 후에 고백을 할 것이다.
달이 차고 내 마음도 차고
이대로 담아 두기엔
너무 안타까워
너를 향해 가는데
고백의 대상은 박찬열. 어렸을 때부터 볼꼴 못 볼꼴 다 보면서 같이 자란 사이였다. 초등학교도 같은 학교, 중학교도 같은 학교, 심지어는 고등학교마저도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징글징글하다며 혀를 찼지만 나는 웃음으로 대꾸했다. 좋은데 뭘. 초등학교 때는 꼬꼬마 시절이니까 넘어가고,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같은 반은 한 번도 된 적이 없으니 그저 친한 애가 같은 학교여서 좋았었다. 그땐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다고 믿었으니까. 몇몇 친구들이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고, 이러다가 너네 둘이 썸이라도 탈 것 같다고 하는 얘기를 들으면 전혀 현실성이 없어서 믿고 자시고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고등학교에 올라오니 썸도 사귀는 것도 아닌 일방적인 짝사랑을 하게 될 줄을. 정확히 왜 좋아하게 됐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고등학교에 올라오고, 같이 등하교를 하다보니 어느 샌가 박찬열과 단 둘이라도 있게되면 얼굴이 빨개지고 왠지 모르게 설레게 됐다. 이런 변화가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몇 달 정도 왜 그런가에 대하여 고민을 했다. 그리고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아, 나 박찬열 좋아하나 보다.
고2 때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후로 처음 같은 반이 됐다. 같은 반이 되자 박찬열을 좋아하는 마음은 눈덩이가 불어나듯 금세 커다랗게 변했다. 그리고 같은 반이 되면서 더욱 실감하게 된 것은 박찬열이 인기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눈에 튀는 외모여서 간간이 여자애들의 고백을 받기도 했지만 그땐 키가 또래에 비해 약간 작은 편인데다 마른 체구여서 큰 인기를 끈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랑 키가 엇비슷했었는데 중3 겨울방학 때 잠만 온종일 퍼질러 자더니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180을 훌쩍 넘겨있었다. 잘생겼는데 키도 크지, 성격도 모난데 없이 밝지, 성적 나쁘지 않지. 박찬열은 여자애들의 환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 여자애들의 범주에는 나도 껴있었고.
고2 일 년 동안 나는 박찬열이 고백받는 광경을 족히 열댓 번은 본 것 같았다. 그것도 ‘고백하는’ 장면만. 고백하지는 않고 좋아하기만 하는 아이들을 찾아보자면 열 명은 훌쩍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백의 방법도 가지각색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좋아한다고 말하던 아이들도 있었고 선물 꾸러미를 안겨주며 고백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방송실의 친구를 통해 전교에 다 들리도록 고백한 아이도 있었다. 소문으로는 벌점을 받았다나 뭐라나. 하여튼 몇 번의 고백에도 박찬열은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박찬열이 나 몰래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았다면 내가 아는 바로는 박찬열이 여자친구를 사귄 적은 초등학교 때부터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흔한 썸조차도. 그래서 나는 박찬열의 이상형이 김태희를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여신이라던가 게이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 밖에도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봤지만 답은 하나였다. 나는 고백하나 마나 박찬열이 받아줄리 없다는 것. 한가인 닮은 3학년 선배-성격과 성적도 뛰어난 선배였다.-가 고백했을 때도 뻥 차버린 박찬열인데 나 같은 오징어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는 게 나의 결론이었다.
고3이 되고 나는 수능에 치여 박찬열과의 대화라던가 같이 있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었다. 내가 박찬열과 같이 있는 꼴을 못 보는 몇몇 여자아이들의 훼방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아무튼 나는 정말 문제집을 갈가리 찢어서 불에 태워버리고 싶은 욕구를 수없이 참아가며 공부에만 집중을 했다. 박찬열도 종종 나랑 만나 공부를 했다. 언젠가 같이 공부를 하다 우연히 얘기를 들어보니 박찬열이 목표로 정한 대학은 내가 원하는 대학과 같았다. 그것을 듣고 기분이 좋아자 나는 그날 공부에 하나도 집중을 하지 못 했다. CC라는 관계는 아직 한 번도 남자와 사귀어 본 적 없는 모태솔로인 나에게 꽤나 환상을 심어주기 좋은 단어였으니까. 가끔씩 자기 전, 침대에 누워 내가 박찬열에게 고백하는 상상도 해보고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을 때 박찬열의 페이스북이라던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염탐하며 시간을 보내다기도 했다.
그리고 어제. 수능을 보았다. 오늘 학교에서 가채점을 하고 우는 친구를 달래주기도 하고 수능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다 같이 떠들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학교가 끝나도 집으로 온 나는 제일 먼저 박찬열에게 카톡을 보냈다. 못 본지 며칠은 된 것 같아 괜스레 카톡을 하기도 어색했다. 박찬열네 집 앞 놀이터에서 만나자는 얘기를 했다. 사실 박찬열과 우리 집은 걸어서 5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라 박찬열네 집 앞이라지만 우리 집 앞이라고 해도 될 거리였다. 아무튼 박찬열은 친구를 만나야 돼서 6시쯤 만나자고 이야기를 했고 나는 5시 20분쯤에 놀이터에 도착했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박찬열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고, 수능의 여파로 괜히 우울해져 집보단 밖에 있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슬슬 코끝의 감각이 둔해질 때쯤 박찬열의 집 앞쪽으로 웬 사람 둘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앉아있는 놀이터는 아까 말했듯 박찬열 집 ‘앞’이여서 그네에 앉아있으면 바로 박찬열이 사는 라인 입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옷차림이나 키로 보았을 때 누가 봐도 남녀였고 심지어 남자는 익숙한 패딩을 걸치고 있었다. 얼마냐 익숙하냐면 박찬열이 입고 다니는 것을 일 년 동안 본 정도랄까. 오늘도 저 패딩을 입고 같이 등하교를 했던 것이 생생했다. 그에 비해 여자 쪽은 옷도 머리 길이도 내가 아는 사람들과 겹치는 점이 없었다. 박찬열이 누나가 있었지만 저번 주까지만 해도 머리가 어깨 부근이셨는데 일주일 만에 허리까지 자랐을리가 없으니 당연히 누나는 아닐 테고, 그렇다고 여자친구라기엔 박찬열이 최근에 고백받은 일도 없고 나에게 연애를 한다고 얘기하지도 않았다. 설마 나 몰래 연애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박찬열의 성격상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나에게 얘기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일단 나는 그 둘을 지켜봤다.
두 사람은 박찬열이 사는 라인이 아닌 그 옆 라인 입구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둘이 서있는 라인이 여자가 사는 라인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가끔 박찬열 집 쪽에 갔을 때 마주친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춥지도 않은 지 그 둘은 몇 분동안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슬슬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게 지루해질 때쯤 박찬열이 여자를 꼭 끌어안았다. 키가 작은 편인 여자가 박찬열의 품 속에 푹 파묻혀 안겨 있는 것을 보자 케미 터진다고 하는 것이 저럴 때 쓰인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안는 것까지만 했으면 두 사람이 친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나지만 그렇게 껴안고 있다가 박찬열이 살짝 물러나서는 여자의 볼에 입을 가져다 대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볼뽀뽀로 확실해졌다. 박찬열이 누군가를 사귄다는 것이. 나는 슬그머니 그네에서 일어나 놀이터의 뒷 편으로 나갔다. 놀이터 뒤에는 나무들이 꽤나 많았기 때문에 나는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핸드폰을 꺼냈다. 5시 57분. 이제 박찬열은 놀이터로 올 것이다. 마침 박찬열에게 카톡이 왔다.
-너 어디?
-나 놀이터 도착
나는 거의 다 왔다고 답장을 보낸 뒤 최대한 몸을 숨기며 놀이터의 앞쪽으로 빙 돌아갔다. 박찬열이 여자와 껴안고 뽀뽀하는 것을 봤다고 말하거나 티 내기가 무서워서였다. 박찬열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고 내가 본 것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박찬열의 입에서 사귀고 있는 것이 맞노라고 인정하는 것을 듣고 싶진 않았다. 나는 태연하게 손을 흔들며 박찬열이 앉아있는 그네 앞으로 갔다. 내가 앉아있던 자리였다.
“왜 불렀어?”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원래 박찬열을 부른 목적은 고백이었는데, 박찬열이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보고 나니 도저히 고백을 할 수가 없었다. 고백의 이유도 사귀고 싶은 마음이라기보다 3년 동안 말 못하고 속에 담아두니 물먹은 솜이 목 언저리에 꽉 차있는 것처럼 답답해서 그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부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친구가 없었을 때의 얘기고. 여자친구가 있는데 고백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여자친구한테 민폐였다. 어쩌면 박찬열한테도 민폐일 수도 있고 말이다. 나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올려 박찬열을 보았다. 박찬열이 그네에 앉아있으니 내가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나보다 박찬열이 아래에 있자 어색해 괜히 시선을 돌렸다. 나는 박찬열의 옆에 있는 그네에 앉았다. 녹슨 쇠사슬에서 듣기 싫은 소음이 났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시험은 잘 봤나 해서.”
“음, 생각보단 잘 나왔어. xx대 쓸 수 있을 듯.”
“아 그래? 전에 내가 말했었나, 나도 xx대 쓰려고.”
“우리 대학까지 같이 가는거야? 와 진짜 질기네.”
박찬열이 큭큭거리면서 웃고 나도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려고 했는데 역시 마음이 답답했다. 아, 역시 고백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처럼 혼자만 알고 있는 게 답답해도 제일 안전하고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 방법인데 왜 고백하려고 한 거지. 몇 분전의 내가 바보 같았다. 적어도 여자친구가 있느냐고 떠보기라도 할걸.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박찬열이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까 여자와 있을 때 계속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있어서 그런지 손끝이 빨갛게 얼어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내가 주물럭거리고 있던 핫팩을 꺼내 박찬열에게 내밀었다. 박찬열이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씨익 웃으며 핫팩을 받아들었다. 그 표정을 보니 가슴께가 간질간질한 게 기분이 묘해졌다. 여자친구가 있으면 다른 여자한테 웃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마음을 접으려고 해도 그렇게 웃어 보이면 다시 설레는 걸 어떡하냔 말이야.
“야 박찬열.”
“왜.”
사실 나. 고등학교 입학하고부터 너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숨을 들이켰다.
“아무것도 아니야.”
볼에 닿는 바람이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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