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로 패스, 패스!
햇살 내리쬐는 10월의 교정이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게 선선한 날씨에 운동장으로 집결한 남학생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흙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풍경은 여느 고등학교와 다를 바가 없다. 흙을 박차고 뛰는 발소리, 기분 좋은 바람을 만나 서로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 먼 발치서 들려오는 새 소리. 평화로운 점심 시간의 막바지에 진환은 구령대에 서서 뛰노는 남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갛고 하얀 얼굴이 앳되어 내리쬐는 햇빛을 무방비하게 맞고만 있다. 품이 큰 셔츠를 입어 더욱 작아보이는 상태에서 교사증을 걸었기에 망정이지 대충 훑어보면 공을 차는 무리에 섞여있어도 무리 없는 프로포션이다.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내내 아래를 내려다보다, 막 패스를 받은 남학생에게 시선이 따라간다. 양 옆에 상대편을 달고 아슬하게 드리블을 하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아랫 입술을 꾸욱 깨문다. 긴장하는 바람에 자세를 고쳐 난간에 몸을 기대자 햇빛에 군데 군데 하얗게 물든 검은 머리칼이 살랑인다. 앞머리가 길어 눈을 반쯤 가린 상태지만 안중에도 없다. 난간에 오른팔을 괴고 습관대로 손톱을 툭툭 깨물기 시작했다. 공을 점유한 남학생이 능숙하게 페이크를 써 상대편이 잠시 틈을 보인 사이 슛을 날려 골대를 뒤흔들자마자, 먼 스탠드에서 작은 환성이 터져나왔다. 진환은 그제야 한 숨 돌렸다. 그리고 곧이어 하나, 둘... 셋. 약속이라도 한 듯 마주치는 시선에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제 주위로 달려오는 학우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시원하게 웃어보이는 아이가 너무나도 눈부셔 차마 뜨고 있을 수 없어 진환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앞머리를 흩뜨리고 지나갔다. 아이가 아랫입술을 물고 웃는다. 자꾸만 웃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결국 환하게 웃고 말았다.
* * *
둘의 인연이 묶인 것은 진환이 학교에 처음 출근하던 날이었다. 설레는 첫 직장을 만끽하기도 전에, 진환은 교사증을 잃어버려 교사를 이곳 저곳 뒤지고 다니던 중이었다.
이 씨발새끼야. 네가 뭐 보태줬어? 뭐 보태줬냐고.
마지막으로 들렀던 뒤뜰 벤치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체육창고 가까이서 누군가 얻어맞는 둔탁한 소리가 들린 것이다. 가 봐야 하나. 교사로서의 첫 출근이란 타이틀이 붙자 거리낄 게 없어졌다.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아 발로 찬 흔적 하나 없는 흰 콘크리트 벽을 쳐다보던 진환이 가까이 다가가 반쯤 열린 문을 조심스레 열자,
개새끼가, 나도 모르는 내 엄마 네가 찾아주던지. 씨발새끼야.
싸우고 있었다. 그 먼지가 풀풀 날리는 체육창고에서. 싸운다기보단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으나 한 방 날리고서도 다시금 주먹을 드는 살기등등한 모습에 진환이 입술을 물었다. 이래서 요새 학생들이 무섭다는 건가. 전날 요새 고딩들 서슬이 어떻다느니 구역도 나눈다느니 진환에게 단단히 겁을 준 한빈의 과장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른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일단 얼굴부터 확인하자 싶어 눈을 가늘게 뜨는데, 뒷편이 벽이 아니라 줄로 얼기설기 쳐 놓은 펜스에 가까워서 햇빛이 정면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퍽. 자신보다 거구의 학생을 손쉽게 넘겨버린 남학생이 발목을 붙들어오는 손을 발로 차내버렸다. 더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 진환이 문을 활짝 제쳤다.
너희들 뭐 하는 짓이야.
그제야 돌아본 남학생의 얼굴이 보였다. 막 사람을 때린 사람의 표정이었다. 적개심 가득하고 악에 받친. 그럼에도 꽤나 준수한. 진환이 순간 할 말을 잃어 가만히 있자 들켰다는 놀란 기색도 없이 쓰러진 거구를 다시금 내려다본다. 그러자 거구가 무어라 할 새도, 손 쓸 새도 없이 비척이며 일어나 잽싸게 체육창고를 뛰쳐나갔다. 잡을 새도 없이 뛰어나간 거구를 놓친 진환이 다시 남학생을 돌아보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시선이 명찰에 가 닿는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진환이 지친 얼굴을 향해 부드럽게 말한다.
준회야, 가자.
손을 내밀고서 말이다.
* * *
그로부터 벌써 일 년도 넘게 지나 있었다. 진환은 가끔씩 그 때의 준회에게로 찾아가곤 한다. 어디 하나 마음 붙일 곳 없이 외롭게 떠돌던, 고작 열 일곱의 나이에 많은 아픔을 알아버린 아이. 자신이 없던 시간동안 가슴에 남은 생채기를 세어보며 교실 한켠서 의미없는 방정식의 인수분해나 듣고 있었을 그 아이. 처음 학교에 들어와서 뭣도 모르고 자리를 찾아가던 진환과 쉽사리 마음을 정착할 수 없었던 준회는 그 나름대로 닮아있었다. 준회가 한 남학생을 상대로 일방적인 폭력을 휘둘렀던 그 날, 진환은 준회를 교무실로 데려가는 대신 상담실로 데려갔었다. 창문을 열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도록 했고, 시원한 아이스티를 타 주었다. 그 호의 아닌 호의에 준회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지만, 진환이 살갑게 묻는 것에는 모두 대답해주었다.
저를 많이 놀렸어요. 부모 없는 새끼라고. 걔만 그랬던 건 아닌데, 물까지 맞으니까 뵈는 게 없더라고요. 구준회는 엄마가 없으니까 자기가 이렇게 물도 챙겨줘야 먹는다고.
지금껏 엄마랑 아빠가 싫어할까 봐 그런 소리 들어도 가만히 있었는데.
준회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무감했지만, 그 속에 내포하고 있는 젖은 물기를 진환은 알 수 있었다. 준회의 무서우리만치 차가운 표정은 마치 우는 법을 잊은 아이가 입을 꾹 다물고 앞을 노려보는 것과 비슷했다. 정면의 창틀을 응시한 눈동자에서는 그 어떠한 희망도 없었다. 진환은 그 옆에서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준회가 받았을 상처를 감히 가늠할 수 없어 마음이 아픈 것도 같았다. 그래도 준회야. 진환이 어렵게 입을 떼자, 순간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미 조금 흐트러져있던 준회의 검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진환은 저도 모르게 준회의 손을 잡았다. 준회가 놀라 고개를 조금 틀어 진환을 보았다.
선생님이 옆에 있을 거야.
아무런 대답이 없었음에도 희망이 보였다.
그 때부터 준회와 진환의 관계가 조금 더 긴밀해지기 시작했다. 진환은 준회의 심리 상담 도우미를 자처했고, 학교에서도 그간 조용했었던 준회의 사정을 고려해 중징계는 피하게 됐다. 노발대발하는 학부모에게 근 두 시간이나 붙들려 있었던 진환이 바람이나 쐴 겸 올라갔던 옥상에서 준회를 만났을 때, 난간에 기대고 선 준회가 막 자신을 발견하고 멈춰선 진환에게 슬쩍 웃어보였을 때 내심 이런 관계가 나쁘진 않다고. 둘은 생각했다. 진환은 등교할 때마다 준회를 태우기 시작했다. 준회는 일주일에 고작 네 번 듣는 문학 시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복도 중간에서 만나면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준회가 장난을 걸어왔다. 가만히 걸어가다가도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감싸오면 틀림없이 준회여서, 진환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웃고 만다. 가끔씩은 준회가 메시지로 큰일났다며 옥상으로 불러내는 일도 있다. 그 때마다 속아오던 패턴 그대로 헐레벌떡 달려온 진환이 덩그러니 혼자 있는 준회를 보고 때리러 달려가는 식이다. 왜냐고 물어보면 너무 바쁜 거 아니냐며 엉겨온다. 둘만의 아지트가 된 옥상 구석 실외기 위에 나란히 앉아 손을 잡는다. 처음 손을 잡았던 건 진환이지만 진환 스스로도 스킨십이 잦은 편이 아니어서, 그 이후 손을 잡아온 건 준회다.
처음 준회가 손을 잡았을 때의 떨림이 생생하다. 알게 모르게 벽을 쳐 왔던 준회가 비로소 진환을 제 사람으로 들인 순간이었다. 함께 상담실에 남아 준회가 수학 문제 푸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없이 지켜보는 진환을 슥 올려다 본 준회가 모르는 문제라며 문제집을 들이밀었다. 모르겠어. 저보다 어려 보인다는 구실로 가끔씩 말을 툭 놔 버리는 건방진 입을 아프지 않게 때려주자, 준회가 활짝 웃으며 샤프를 쥐어주었다.
「교실에서 그랬단 봐. 내가 얼마나 무서운 선생님인지 보여줄 테니까.」
「무서운 선생님은 무슨… 요정이라고 부르는 여자애들도 있더만.」
윽, 그건 뭐야. 진심으로 얼굴을 찌푸린 진환이 웃으며 샤프를 들었다. 잘 봐. 여기서 x의 값을 구해야 하는 건데, 너 아직 잘 모르니까 일단 그래프로 그려보자. 조근조근, 사근사근.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가며 깔끔하게 그래프를 그린 진환이 듣고 있냐는 식으로 준회를 올려다보았다. 어딘가 멍한 준회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책으로 시선을 고정한 진환이 막 설명을 시작하려는 찰나, 볼을 쿡 찔러오는 손가락에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쌤. 여기 볼에 점 있는 거 알아요?」
「어?」
「점이 하트 모양이에요. 신기하다.」
선생님은 분명 사랑 받고 살 사람이네. 그러면서 준회가 볼을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괜히 낯부끄러워져 진환이 집중이나 하라며 뺨을 손으로 감싼다. 이런 식의 접촉은 처음이어서 얼떨떨하기도 조금은 이상하기도 해서. 어쩐지 기분이 좋은 것도 같다. 이제 진짜 해 보자. 진환이 막 그런 말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샤프를 쥔 반댓쪽 손에 온기가 들어찬다. 굳은 진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맞잡은 손을 보았다. 따뜻하고 큰 손이 비교적 작은 하얀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준회야. 진환이 차마 크게 부르지 못하고 조용하게 속삭였다. 진환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잡은 손을 내려다 본 준회의 표정이 진중했다. 긴 속눈썹이 눈 밑으로 짙은 음영을 만들어내어 더욱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환은 새삼 고작 이 열 여덟의 소년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가슴이 떨렸다. 감상이라도 하는 듯 손을 오래도록 보던 준회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해사하게 웃었다. 이제 해요, 설명. 처음으로 느낀 낯선 감각. 아마 오래도록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체온이 닿는 그 기쁨. 그리고 한편으로 드는 터무니 없는 감정. 아마 그래서 진환이 준회에게 부러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쌤.”
“…….”
“쌤. 듣고 있어요?”
눈 앞에서 손을 휘휘 젓는 준회 덕분에 상념에서 깨어난 진환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아. 또 그걸 잊지 않고 따라해주는 게 참으로 얄미워, 슬쩍 흘겨보고 만다.
“쌤 처음 봤을 때요, 그 체육창고에서.”
“그게 뭐가 자랑이라구 또 얘기해.”
“그 때 진짜 예뻤던 거 알아요?”
뭐? 질색하며 묻는 진환에게 굴하지도 않고 진지하게 또 그러는 거다. 무슨 천사인 줄 알았잖아. 햇빛 막 비치고 걸어 들어오면서 나중에는 손 내미는데 무슨, 천사인 줄. 제 딴에는 정말 진심인지 슬쩍 웃기까지 하며 그런다. 마주보고서 나눌 얘기가 아닌 듯 싶어 화끈거리는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리자 다시금 손을 잡아왔다. 여전히 크고 따뜻한 제자의 손. 쌤은 진짜 나한테 천사야, 알죠. 준회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진환이 나직이 눈을 감았다.
따뜻하다. 제자의 손.
그래, 제자.
-
감사합니다. (꾸벅)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뷔 박보검 수지 셀린느 인생네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