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함께 하교를 한다. 진환은 운전석에 타 준회가 안전벨트를 하는 것까지 체크하고서야 엑셀을 밟았다.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준회가 라디오를 틀었다. 아는 노래였는지 허밍으로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준회의 낮고 깊이있는 음성이 듣기 좋아, 진환이 핸들을 톡톡 두드려가며 박자를 맞췄다. 옆을 흘끗 돌아보면 예의 그 무표정으로 고개만 까딱인다. 진환은 가끔씩 저렇게 무표정을 한 준회를 보면 주변 사물이 다 얼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참으로 유치한 생각을 했다. 무엇 하나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무덤덤한 시선. 그러고 보면 준회는 진환을 볼 때 외에는 잘 웃지 않았다. 교무실에 있다 보면 운동장에서 체육을 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는데, 그 때 보았던 준회는 시종일관 귀찮은 표정이었음을 기억한다. 반 친구가 무어라 말을 걸어도 손을 내저을 뿐이고, 짝피구에서 파트너가 된 여자애의 팔목을 잡아주는 그 흔한 호의조차 보이질 않았다. 늘 마주하는 것이 준회의 웃는 얼굴인지라 그 모습이 진환은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준회가 감정을 표출하고 소통을 한다는 상대가 몇 되지 않는 것은 알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이 제일 그 빈도가 높음을 깨달은 진환이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유치하게도 좋아서.
“뭐야, 혼자 무슨 상상을 그렇게 해요?”
“아냐. 그냥 어떤 애.”
“어떤 애?”
나는 아니야? 용케 말을 길게 한다 싶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 뚝뚝 잘라먹는다. 붙잡고 늘어져야하나 고민했지만 어차피 고칠 의향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미운 고딩에게 잔소리 해 봤자 입만 아프다. 진환의 답이 늦어지자 준회가 대답을 보챈다. 난 정말 아니야? 그 앞에서 어떻게 흔쾌히 너다! 하고 말할 수 있겠나 싶어 어물거리던 진환이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놓고 혀를 찬 준회가 아랫입술을 툭 내밀었다.
“쌤이 내 생각만 했으면 좋겠다.”
“…….”
“아, 진심이니까 표정 풀어요.”
그런 걸 조크라고 치는 거냐. 진환이 준회를 노려보며 주먹을 들어보였다. 이런 농담이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는 아예 면역이 됐다. 진환이 보기에 저를 대하는 준회의 일상 자체가 조크다. 남한테는 귀찮아 죽겠다며 철벽을 세우는 애가 왜 유독 자신한테만 이렇게 허물없이 대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편한 건가, 싶어 기분이 좋다가도 일찍이 내다버린 선생님의 권위를 생각하면 마냥 좋을 수도 없는 거다.
“내려. 다 왔다.”
“벌써?”
목을 쭉 빼 건물을 확인한 준회가 아쉬운 소리를 했다. 문을 열고 내리며 오늘은 쌤이랑 긴 얘기를 하고 싶다느니 능글맞은 사족까지 단다.
“할 말이 있으면 전화로 해. 너 버릇없게 마음대로 전화하는 거 잘하잖아.”
“그럼 뭐 해? 바쁜 누구누구가 철벽 치면서 얼른 끊어버리는데.”
“까불지.“
“그럼요, 쌤.”
장난스레 웃은 준회가 진환과 눈을 맞추려 창틀에 두 팔을 받치고 허리를 숙였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진환이 눈을 크게 떴다.
“마지막으로 버릇없을게요.”
“뭐?”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준회가 손을 뻗어 진환의 오른쪽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금 뜨겁다 싶은 체온이 보드라운 볼을 주무르다 예쁘게 난 점을 손가락으로 콕 찍는다. 크고 따뜻한 손이 뺨을 감싸는 감촉에 당황한 진환이 고개를 빼기도 전에 손이 거두어졌다.
“오빠 간다. 전화하면 받아!”
“뭐? 야, 구준회!”
오빠? 차마 말하기도 낯부끄러운 단어에 진환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저, 저 버릇없는 놈이. 차에서 내려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차 안에서 발만 구르자, 준회는 얄밉게 혀를 쏙 내밀고 웃으며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결국 진환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준회의 손이 닿았던 뺨을 어루만진다. 항상 준회의 장난이 농담 아니면 직접적인 터치란 모양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이런 직접적인 터치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거였다. 갑자기 볼을 만진다든가, 건드려서 돌아보면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든가, 하는. 사제지간에서 나타날 법한 일정한 선을 그어가며 차리는 예의가 준회에게는 정립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것이 진환에게 한정된 것을 진환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사사롭게 넘겨버릴 수가 없는 거다. 게다가 더 문제인 건,
“아, 정말….”
그게 싫지가 않아서, 오히려 설레 미치겠어서 더 문제였다. 먼 곳을 보고 있다가도 눈이 마주칠 때 부드럽게 풀어지는 표정이나, 그 냉한 눈매가 진환을 볼 때면 살갑게 휘어지는 게, 크고 따뜻한 손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감싸오는 게, 어떻게든 닿고 싶어서 안달을 내는 게 보이는 게. 그 때마다 설레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 부러 밀어내고 고개를 돌렸었다. 게다가 진환은 작은 자극에도 진정이 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시각적으로나 촉각적으로나. 손을 잡아오는 것은 물론이고, 하물며 먼 발치서 준회의 교복 셔츠 어깨깃만 봐도 두근거린다. 교복 입은 모습을 평생 보고 싶다고 느낄 정도니.
미쳤지.
그것도 단단히. 아무리 초짜라지만 선생님이 되어서 제자에게 흑심이나 품은 자신이 한심해, 진환이 핸들을 붙잡고 정면을 노려봤다. 때마침 지나가던 가방 끈 붙잡은 초딩 두세 명이 그런 진환의 모습을 보고 주춤거리더니 멀리 뛰어가버리는 것에 또 한숨을 포옥 내쉰다. 게다가 걘 남자잖아... 흑심을 품은 것 자체로도 제자 인생 망치는 게 한순간이다 싶어 마음이 금방 복잡해졌다. 분명 준회도 진환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단순히 정을 붙인 사람에게 한하는 애정 표현인지 아니면 자신과 같은 마음인지 구분이 안 간다. 그래서 더욱 어떻게 해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거다. 그렇다고 터 놓기에는 용기가 안 났다.
“아, 김진환. 진짜 나가 죽어라.”
진짜 나가 죽어버려? 생각이 극단적으로 치닫자 진환이 핸들에 이마를 박았다. 그러다 좀 아프네,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익숙한 외침이 들렸다.
“그래서 이마가 깨지겠어요?”
구준회. 진환이 놀라 고개를 들자 저 위에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민 준회가 팔을 흔들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위험해... 속으로만 중얼거린 진환이 속이 다 까발려진듯한 기분에 허탈한 표정으로 준회를 올려다보자, 남 속도 모르고 창틀에 팔짱 낀 팔을 지탱한 준회가 재밌다는 듯 개구지게 웃었다. 처음엔 웃는 법도 모르는 것처럼 굴더니. 요새는 시도 때도 없이 가슴 떨리게 웃는다. 교복 셔츠를 벗다 말았는지 풀어헤쳐진 단추 사이로 움푹 패인 쇄골이 보였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진환이 엑셀을 밟았다.
* * *
준회의 꿈을 꿨다. 진환은 땀을 흘리며 깨서는 꿈에서조차 보이는 그 얼굴을 몇 번이고 원망했다. 그러나 결국엔 설렜던 꿈의 기억을 하나 하나 맞춰보며 되새겼다. 꿈에서 자신은 교무실에서 홀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봄이었던 것 같다. 창문 밖으로는 새하얀 벚꽃이 따뜻한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며 황홀한 풍경을 빚어내고 있었다. 진환은 모니터를 보다가, 창문 밖을 쳐다보며 햇빛에 눈을 찡그리기도 했다가, 웃었다. 어째 조금 설레는 게 싱그러운 계절 때문인가 했더니 누군가를 기다린 모양이었는지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뛰어갔다. 꽃잎이 가득 붙은 우산을 탁탁 털어낸 누군가가, 뛰어와 안긴 진환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준회였다. 정장을 반듯이 차려 입은. 한참이나 안고 있던 몸이 떨어지자, 성숙해진 얼굴로 웃던 준회가 불쑥 꽃다발을 내밀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사랑해. 진환은 세상 부러울 것 없다는 미소를 지으며 꽃다발을 안아들었다. 그리고 화답의 의미로 준회에게 입을 맞추려던 그 순간, 준회와 교무실 풍경은 사라지고 어슴푸레한 집 천장과 새벽 빛 가득한 창문을 본 것이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던 진환이 결국 눈을 감았다. 어쩐지 조금 눈물이 흐른 것도 같았다.
* * *
“이 새끼, 여친 생겼나 본데?”
막 점심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교무실 선생님들에게 주문을 받아 음료수 자판기 앞에 서 있던 진환이 사물함 뒷편에 있던 준회를 본 것은. 준회는 난감한 표정으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진환은 조심스레 다가가 보이지 않게끔 벽에 몸을 숨겼다.
“무슨 여자 친구야.”
“그럼 왜 숨기는데. 봐봐, 뭔데?”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봐, 여친이라니까. 숨기는 새끼들은 백퍼 연애 중이야.”
준회는 난감한 표정으로 등 뒤에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남자애 한 명이 오래 가라며 능글맞게 속삭이자, 얼굴이 티나게 빨개져선 꺼지라며 욕을 했다. 진환은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속이 이상하게 메슥거리고 목에 뭔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곤욕을 치르고 있던 준회가 대뜸 어떤 남학생이 던진 예쁘냐는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신경질적으로 올라갔던 눈썹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성났던 눈이 바닥을 향했다. 누가 봐도 수줍어하는 그 모습에, 친구들이 야유했다.
“이 새끼 표정 봐. 진짜 예뻐?”
“시끄러.”
“이야. 구준회 남자네. 예쁘지?”
“……그래, 예쁘다.”
그제야 실실거리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준회의 모습에 진환이 시선을 거두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여자 친구가 생겼구나. 왜 나한텐 말 안 했대, 서운하게. 워낙에 약한 터라 입술을 꾹 깨물다 결국 피를 봤다. 여전히 시끄러운 사물함 쪽을 흘끗 본 진환이,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며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 숨긴 건 뭘까 싶어 궁금하다가도 여자애의 손을 잡을 준회가 떠올라 다시 먹먹해졌다. 만약에 준회가 자신한테 털어놓을 때를 대비해 섭섭치 않게 반응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진환이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 * *
요즘 준회가 등교 때나 하교 때나 부쩍 폰을 만지기 시작했다. 진환과 있을 때면 등한시하던 폰을 이리저리 만지고 있는 까닭에, 지켜보는 진환의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여자 친구일까. 카톡 창을 보며 실실 웃는 준회의 모습이 정말 즐거워 보여서 기분이 안 좋았다. 아직 준회는 여자 친구가 생겼음을 말하지 않았지만 진환은 이미 기정사실화 된 것으로 보고 있었다. 사물함에서도 그렇고, 폰을 자주 만지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차마 자신의 입으로 묻기에는 상처 받을까 봐 두려워 말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가 제일 한심했다. 그래도 해소할 수 없는 궁금함이 답답해서, 진환이 눈치를 보다 신호에 걸린 틈을 타 결국 준회의 팔을 꾹 찔렀다.
“어? 왜요?”
“아니, 그냥…….”
아, 차마 못 말하겠다. 진환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차에서 휴대폰 오래 보면 눈 상한다고….”
준회와 준회의 손을 잡은 여자아이. 그리고 마주보며 웃는 둘. 시야가 흐려졌다.
* * *
언제부터 준회를 좋아하게 된 걸까. 체육창고에서 처음 만났을 때? 복도에서 어깨동무를 해 왔을 때? …아니면, 처음 손을 잡았을 때?
* * *
어김없이 학교가 끝난 후 옥상이었다. 업무가 다 끝나지 않은 진환을 기다리려 준회가 줄곧 차지하는 곳이었다. 오늘은 올라가지 않으려고 했던 진환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옥상으로 오라는 준회의 메시지를 받았다. 그걸 또 거절하지 못하고 올라온 진환은 실외기 위에 앉아서 폰을 보고 있는 준회를 보고 올라온 걸 후회했다. 부러 터벅 터벅 걸어가자 그제야 진환을 발견한 준회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쳇. 이미 기분 상한 진환이 큰 손을 최대한 살짝 잡고 실외기 위로 올라섰다.
“언제 끝나요?”
“몰라.”
오늘 일 많나. 어제도 늦게 끝났으면서. 피곤하게.
제발 이런 걱정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여전히 들을수록 기분 좋은 걱정이었지만 이젠 마냥 좋지 않았다. 기대만 심어주다 팽개쳐버리는 거, 정말 싫으니까. 진환이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자 그런 진환을 슬쩍 본 준회가 손을 잡아왔다. 진환은 따뜻한 온기 때문에 마주잡고 싶었지만 또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러긴 싫어서, 그저 가만히 있었다. 준회는 작은 진환의 손에 깍지를 끼고 엄지 손가락을 주무르는 등 이런 저런 장난을 쳤다.
“준회야.”
“네.”
이름을 부른 것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대답을 들어놓고서 당황한 진환이 고개를 돌려 준회를 쳐다봤다. 준회는 어쩐지 진환의 목을 보고 있었다. 뚫어져라 보는 게 부담스러워 진환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요?”
“아니, 그냥….”
“이리 와 봐요.”
갑자기 준회가 닿을 듯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놀란 진환이 그대로 굳어버리자, 씩 웃으며 점점 다가오는 거다. 두근, 두근. 진환이 혹여 심장 뛰는 소리를 들킬까 숨을 참았다. 그 순간, 허벅지를 짚고 있던 준회의 손이 올라와 진환의 목에 닿자 진환이 준회를 두 손으로 세게 밀어냈다. 밀쳐진 준회가 놀라 차마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실외기에서 뛰어내린 진환이 고개를 내려 목을 살피자, 단추가 풀려 셔츠가 벌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준회를 보며 진환도 당황했다.
* * *
「너는 좋아하는 애가 생기면 어떡하냐」
몇 번을 고쳤는지 모르겠다. 키패드도 잘 눌리지 않는 폴더폰을 들고 거실을 배회한지 한참, 백 번도 더 외운 지원의 번호를 간신히 친 진환이 긴 고민 끝에 전송 버튼을 눌렀다. 한 달 주기로 여자친구를 바꿔치우는 자유로운 영혼에게 물을 만한 내용이 아닌듯 싶어 바로 후회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남자라는 걸 덧붙일 걸 그랬나. 질색할 지원의 반응이 상상되어 진환이 고개를 내저었다. 메시지를 보내고서도 뜻모를 긴장이 가시질 않아 손톱을 물어뜯으며 서 있으니 금방 진동이 울렸다. 진환이 곧바로 플립을 열었다. 답장이다. 착각인지 진짜인지 떨리는 손으로 확인 버튼을 꾹 눌렀다.
「일단 가까이간다음 아무손가락이나 들어서 뒷목 찌르고 무슨손가락이게? ㅋㅋ」
세상에. 자기도 모르게 폰을 침대 구석으로 던져버린 진환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도 침대로 뛰어들었다.
* * *
“요즘 이상하다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뜨끔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최근들어 심각성을 인지한 진환이 준회와의 만남을 가급적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맞은편에서 에피타이저로 나온 빵을 자르고 있던 준회가 그런 말을 하고서 진환을 흘끗 쳐다보았지만, 진환은 무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꽤나 천연덕스러운 물음까지 던지며. 늘 그랬듯 서늘한 표정을 하고 빵에 시선을 고정했던 준회가 뻔뻔한 진환의 물음에 특유의 삼백안으로 진환을 쳐다보았다. 윽, 순간 말려들 뻔 했다. 진환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앞에 놓인 샐러드를 포크로 뒤적였다.
“그냥 다. 왠지 쌤이 나 피하는 것 같아서.”
“뭘 피해. 어차피 우린 자주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일부러 제가 먼저 교무실로 찾아갔잖아요. 근데 요즘은 교무실에도 없고.”
준회는 이제 제법 진지한 얼굴로 진환을 보고 있었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고, 깍지 낀 손을 턱 밑에 받쳐두고 말이다. 완벽히 취조당하는 분위기여서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저녁 시간 전이라 아직 한산한 주변마저 숨이 막힐 정도로 조용하다. 말을 돌리기도 민망한 상황이 불편해 진환이 차분하게 포크를 내려놨다. 본능적으로 시선은 피한 채였다. 맨정신으로 저 어린 주제에 세상 쓴 맛 다 맛본 듯한 깊이있는 눈을 마주볼 자신이 없었다.
“그런 거 아니야. 요새 시험 기간이라 바쁘기도 하고, 그래서 그래.”
진환의 내리깐 눈이 준회가 썰어놓은 빵 조각에 닿아 있었다. 준회는 문득 자연광을 받은 진환의 얼굴이 밀랍 인형처럼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먼저 연락하지 않는 이상 전화를 걸지도 않는 저 미운 얼굴이, 너무 예쁜 탓이었다. 늘 보아오는 와이셔츠 차림과는 달리 검은 티에 체크 남방을 걸친 수수한 차림도 진환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하얘서 그런가 봐. 준회는 드러난 진환의 목께를 보며 생각했다. 선생님. 준회가 느릿하게 진환을 불렀다. 침잠한 목소리가 어두웠다.
“저는 선생님 없으면 안 돼요.”
“…….”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고개를 든 진환이 준회의 일렁이는 눈과 마주했다. 진환이 말없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준회의 손을 잡자, 그마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마주 잡아오는 손이 서글펐다. 준회도 결국 누군가의 품이 그리운 아이였다. 또 이런 자괴감이 든다.
“준회야.”
“네.”
“선생님은….”
“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준회가 순종적이고 올곧은 시선으로 진환을 보았다. 진환은 다시 입을 열기까지, 땀이 찬 손을 테이블 밑에서 쥐었다 펴기를 한참 반복해야만 했다. 불안하고 긴장된 마음을 풀고자 하는 습관이었다. 축 쳐진 진환의 눈이 더욱 시무룩해 보이는 게 분명 중요한 말이 나올 것 같아 준회도 아랫입술을 핥았다. 몇 번이고 달싹거리던 입술이 결국 진심을 뱉어내고 만 건 긴 시간 뒤의 일이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잘 알아. 그러니까 선생님은… 고의는 아니지만…….”
“네.”
“너한테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어.”
“네.”
“그건….”
이 순간만큼은 준회가 참으로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진환은 차근차근 그 나잇대의 남자애들과 같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보드라운 검은 머리칼, 연필로 진하게 그린 것 같은 눈매, 남에게는 도통 열리지 않지만 남성적이고 도톰한 입술, 다소 불량스러운 느낌을 주는 피어싱, 고작 선생님과의 만남에 신경쓴 게 보이는 캐주얼한 차림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유는 일 년 전보다도 훌쩍 크고 어른스러워진 느낌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었고, 아무래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순간이기에. 참을성있게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준회에게 진환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나도 잘못된 거 알아. 그렇다고 너한테 뭐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선생님은….”
“…….”
“괜찮아질 거야.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지 마.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테니까.”
“…….”
“그러니까 너를 안 보는 게 나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
준회가 자신이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진환의 목소리는 태연했지만, 하얀 손이 지나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런 대답 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준회가 참을 수 없이 무거워서 진환이 결국 잡힌 손을 빼냈다. 가슴이 거세게 뛰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의자를 빼고 일어나 애써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일부러 찾아오지 마. 금방 나아질 거야. 선생님은 조금 힘들어서 이만 가야겠다. 집에는 버스 타고 가. ”
진환이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해서 겉옷을 집어들었다. 대답 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준회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결국 뒤돌아 빠르게 걸어나갔다. 졸고 있던 알바생은 대뜸 제 앞으로 내밀어진 카드를 발견하고서야 허둥지둥 계산을 마쳤다. 옆을 돌아보면 준회가 자신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아서 돌아보지도 못했다. 카드와 함께 건네진 영수증을 손 안에 구긴 진환이 아랫층으로 내려가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무슨 정신으로 다리를 움직이는 건지 자각하기도 전에 뺨에 뜨거운 것이 스쳤다.
눈물.
진환은 남방 소매를 끌어다 눈가를 세게 비볐다. 눈물은 왜 나오고 난리야. 거친 감촉에 발갛게 일어난 눈가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환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다, 그만 발을 헛디뎌 미끄러운 바닥 타일에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넘어지는 순간에 팔꿈치로 지탱해 요란스럽게 넘어지진 않았다. 우는데 멋없게 넘어지기까지 하면 그건 정말 비참한 거라고, 벽에 기대 앉은 진환이 자조했다. 아직도 떨리는 다리가 아파서 무릎을 모아 세우고 앉았다. 많은 가게가 입점한 빌딩이지만 사람이 없는 시간대라 아무도 계단을 쓰지 않았다. 아직도 툭 툭 떨어지는 눈물이 옷에 물자국을 만들어냈다. 닦아낼 생각조차 못한 진환이 팔에 얼굴을 묻었다. 바닥은 너무 차갑고, 준회는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차근히 접어가야 할 마음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아쉬워서. 그래서 어깨를 들썩여가며 소리 내 울었던 것 같다.
그러지 말걸. 말하지 말걸. 하고 수없이 되뇌이며.
-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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