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분명 싫다 하였다, 찬열아."
"백현아, 네 위치는-"
쾅-
화를 참지 못한 백현의 주먹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러나 찬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백현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끄러워! 어떻게....."
"............"
"어떻게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런 말를 해? 어떻게 네가!!!"
분노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똑바로 보는 백현을 바라보던 찬열은 서서히 시선을 아래로 깔며 무릎을 꿇었다. 지금부터 하게 되는 말이, 이 말이 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백현이 눈치채게 해서는 절대 안됀다고...절대....절대 티를 내어서는 안됀다고 찬열은 자기 자신을 수십번이 넘게 스스로 다잡고 있었다. 찬열이 갑자기 무릎을 꿇자, 놀란 백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찬열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전하,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군왕이십니다."
"박찬열!!!"
"......그리고 저는 전하를 보호하고 보좌하여 이 나라를 번영시켜야 하는 이 나라의 신하입니다."
"......너..."
부르르 떨려 나오는 백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찬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백현아...
[넌 누구야?]
[그러는 넌 누구냐?]
[나? 난 변백현인데.]
[태....자 전하?]
7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들어운 궁 안에서, 찬열은 해맑은 웃음이 참 고왔던 소년을 만났다. 이름을 들은 즉시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한 찬열을 일으키며 우리 친구하자- 라고 밝게 말을 건넸던 해맑은 미소의 소년은 앞으로 군왕이 될 지체 높은 왕세자였다.
[찬열아, 내가 왕이 될거래.]
[당연하지, 백현- 아니,저하.]
[내가 왕이 되어도 우리 사이는 변하지 않기. 약속해.]
[저하, 그건...]
[어린 시절처럼, 너는 나를 백현이라고 부르고 나는 너를 찬열이라고 부르는 거야. 친구니까.]
[그래도....]
[치잇- 명령이라고 해야 들을 거니?]
항상 먼저 손을 내밀어주던 쪽은 언제나 백현이였다. 찬열이 한발 물러나면, 그만큼 백현은한 걸음 더 찬열에게 다가왔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해맑은 웃음을 지어주는 백현은, 찬열에게 누구보다 소중한...혹여라도 다칠까, 잘못될까 항상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항상 내 옆에 있을거지?]
[응. 넌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왕이라서.....?]
[......?]
[내가 왕이라서...? 그거 때문이야?]
그건....하고 말을 꺼내려고 하던 찬열은 자신의 입술을 찾아드는 백현의 입술 때문에 하려던 말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백현는 찬열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댄 채 눈을 감아버렸다.
...........밀어낼 수 없었다. 살짝 얼굴만 떼어내면 되는 것을, 찬열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간절히, 너무도 간절하게 원하던 사람였기에, 순간의 이기심으로 그를 떨쳐내지 못했다.
[네가.....좋아, 찬열아.]
[백현.....]
[네가 좋다. 너만...너만 있으면 돼. 네가 좋아.]
자신의 품에 안겨 한없이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자신의 왕을, 찬열은 그저 조용히 품에 안았다.
...............................................백현이 왕위에 오른 지 딱 1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혼사는 이 나라에 큰 이익을 가져다줄겁니다. 휘나라의 외동공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거절하시면 자칫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전하. 죄없는 많은 백성들을 죽이실 작정이십니까."
"휘나라가 혼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군사를 끌고 올 치졸한 나라였소?"
"그리고 전하께서도 이제 정비를 맞이하셔야 합니다. 후사를 도모하셔야지요."
"내 뒤를 이을 세자가 꼭 내 아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오, 박장군."
"......전하의 아들이어야 합니다."
"........."
"나중에, 전하의 뒤를 이어 이 나라의 왕이 될 전하의 아드님을...제 아들이 지킬 겁니다."
사각- 하고 옷을 구겨잡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눈에 커진 채로 입을 꼭 깨물고 있겠지.....안 봐도 백현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거 같아 찬열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창문으로 온 세상을 다 태워버릴 것 같이 빨간 노을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만 물러가시오, 박장군."
"......전하, 혼인은-"
"물러가라 하였다."
크지는 않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백현이 말했다. 잠시 백현을 바라보던 찬열은 작게 한숨을 쉬며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백현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뚜벅꾸벅, 찬열의 발소리가 사라질즈음, 백현은 고개를 들어 찬열의 모습이 사라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
알현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려던 찬열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봐도 유쾌한 사람- 도경수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여전히 김종인이 서 있었다.
"전하를 알현하고 오는 길이신가?"
"예, 안녕하셨습니까."
"....하던 대로 하자, 찬열아."
경수가 장난스럽게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하자 찬열은 그제서야 하하- 하고 웃을 수 있었다.
"그래, 휘나라에는 무사히 잘 다녀와서 다행이다. 얼마나 전하께서 너를 기다리시던지 옆에서 보는 우리가 다 초조해질 정도였다니까. 그래, 오늘은 전하와 함께 보낼 예정이냐?"
"아니, 지금 퇴궐하는 길이야."
찬열의 대답에 경수가 응? 하고 되물었으나 찬열이 그저 웃었다. 하지만 절친한 두 사람이 찬열의 표정이 흐려지는 걸 놓칠리가 없었다. 흐려지는 얼굴을 보던 종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찬열이형?"
찬열이 외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날이면 으례 당연히 찬열의 남은 시간은 백현의 몫이었다. 이렇게 일찍 퇴궐 할리가 없다.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 경수와 종인은 서로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찬열을 바라 보았다. 웃고는 있지만 찬열의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이 시릴 정도로 처연했다.
"......휘나라의 외동공주님?"
"국경도 접해있는 휘나라에서 이런 제의를 해온 것은 휘나라가 우리의 속국이 되겠다는 의사 표시나 다름없어. 노쇄한 지금의 휘나라의 왕위계승자가 그 공주님인데 전하께 시집을 보내겠다는 건...."
"그 왕이 죽으면 자연히 휘나라는 전하의 몫이 된다...."
"........설마 찬열이 너, 전하께 그 휘나라 공주님과의 혼인을 권해드린 거냐?"
"응."
이제서야 경수와 종인은 어째서 찬열이 일찍 궁에서 나온 건지 알 수 있었다. 휘나라에서 혼인을 제의해 올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찬열도 아마 많이 놀랐을 것이다. 하물며 찬열에게 그 소식을 들은 백현의 충격이란 오죽했을까.
"괜찮은 거야?"
"당연히 괜찮지. 그 제의는 휘나라 왕이 직접 나에게 말한거야."
"이 바보같은 놈아! 너 말야, 너. 너 괜찮으냐고."
경수의 물음에 찬열은 잠시 경수의 눈을 보다가 앞에 놓은 술잔을 들어 쭈욱 들이켰다. 경수의 눈에는 약간의 책망이 서려있었다. 마치 왜 그랬냐고, 전하의 마음을 아는 네가 어떻게 그래, 하며 추궁하고 있는 듯이. 순간 찬열은 서러워졌다. 서러워서, 못내 서러워서 찬열은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경수 너라면 어떻게 했을거 같아? 종인이 너는?"
"........."
"내 욕심대로 해? 백현이 데리고 도망이라고 칠까? 까짓 거, 왕 따위 하지말고 나와 같이 어디 먼 곳으로 도망가자고 할까?"
"........찬열아."
"백현이는 군왕이야. 나의 전하는, 나의 사랑은 이 나라의 군왕이지. 그런데 그런 군왕이.....지금 정비도 없고 후사도 없어. 이게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인지는 너희도 알잖아. 지금도 수근덕거리는 소리가 많은데......앞으로 더 심해지겠지."
경수와 종인이 묵묵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사실이었다. 즉위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정비도 후궁도 맞아들이지 않는 백현의 태도에 중신들은 불만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정비는 둘째치고 후사가 없다는 건, 자칫 역모가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한 요소였다. 중신들이 이러한 문제로 알현을 할 때마다, 백현은 특유의 재치로 항상 그 자리를 피해갔지만, 이번에는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놓아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항상 생각해왔어. 괜찮냐고? 나는 당연히 괜찮아야 해. 내 이기심으로 너무 오래 잡고 있었어. 애초에, 탐을 내면 안되는 존재인데, 너무 오래 탐하고 있었어.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백현이였으니까 먼저 손을 놓는 것도 백현이여야 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찬열이었지만 경수와 종인에게는 마치 부르짖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서로를 원해 온 그 간절한 마음을 접어야 하는 찬열과 백현의 운명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워서, 경수와 종인의 마음이 괜시리 아려왔다.
찬열이 그렇게 알현실을 빠져나간 후로, 백현은 혼자 내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내 일렁이는 눈을 하고는......찬열은 떨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백현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었다.
"나중에....내 아들을 네 아들이 지킨다고...? 그런 말을, 그런 잔인한 말까지 해가면서 나에게 혼인을 강요해야겠어, 찬열아? 응?"
백현은 허공에 대고 대답 없을 질문을 계속 중얼거렸다. 사실 백현도 알고 있었다. 정비도 후궁도 맞이하지 않는 자신을 보며 찬열이 얼마나 마음을 졸여왔는지, 중신들의 불만이 슬슬 위험 수위를 넘어가고 있다는 것도...이번에 휘나라가 제의해온 혼인은 거절하는 것이 이상할 만큼 좋은 혼인자리였다. 전쟁을 하지 않고도 영토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내가 왕이 되면 이 나라를 그 누구보다 강대한 나라로 만들거야.]
[넌 할 수 있을거야, 백현아.]
[응. 나를...도와줄거지?]
[네가 훌륭한 왕이 되도록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
[정말?]
[응. 설사 내가 날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좋아- 약속!]
이럴 줄 알았으면........철 모르던 시절, 너에게 그런 말은 안하는 거였다, 찬열아. 그런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았을텐데. 안그러냐, 찬열아?
"여봐라- "
결심을 한 듯 백현은 고개를 들었다. 부르자마자 당장 달려오는 시종에게 백현은 내일 아침에 중신들을 모이게 할 것을 명령했다. 덧붙여 찬열은 두시간 정도 일찍 안현실로 올 것을 같이 지시했다. 시종이 나가고, 술잔의 남은 술을 모두 마셔버린 백현은 휘적휘적 창가로 다가갔다.
차가운 새벽하늘은 달도 별도 없이 까맣기만 했다.
인스티즈에 처음 글을 남겨보네요.
....곧 2편 가지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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