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에게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던, 원치 않던간에 정해진 운명에 따라 흘러갈 뿐이고 결국엔 만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 그런데 그것을 왜 억지로 거부하려 드는것인가. ”
낮은 울림이 소녀의 귓가를 울렸다. 꽤나 장엄해 보이는 목소리를 지닌 이가 어디선가 소녀의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고, 이에 소녀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내저어보였다.
“ 저는 그 사람이 싫어요. ”
단순한 이유였다. 소녀는 평생 저주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미래의 짝으로 정해진 사람을 제 눈으로 보고 말았고, 그 한 번으로 인해 많은 것이 궁금해지고 말아 미리 보았던 것을 통해 묻고 물어 겨우 그 사람에게 찾아갔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이어 후회로 이어졌고 괜히 그 사람을 찾아갔구나, 싶은 마음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우울하니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소녀 자신의 짝으로 정해졌다는 그 사람이 죽기를 원하기에 이르기까지 되었고, 자신의 저주할 수밖에 없는 능력을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 한 것이다. 그것도 단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 무엇을 보았기에 그리 싫어하는 것이냐. ”
“ 그 사람은. ”
형체는 보이지 않지만 자신에게 물음을 건네고 그 답마저 듣기 원하는 이에게 소녀는 말문을 떼었다가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뭐라 말을 해야 할까, 뭐라 말을 해야 그 사람을 죽이고 싶었던 그 마음이 되살아 나는걸까. 그러나 한 번 사람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제 마음은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리려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나마 아주 조금의 양심이라도 남아있던 것일까. 그래도 억지로 기억해낸 소녀는 그 전과 달리 별다른 느낌이 없자, 의아해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그 사람은, 제게 웃어주었어요. ”
“ 그리고? ”
“ 그리고 또 웃어주었어요. ”
“ 웃어주었단 이유 하나만으로 네 운명의 사람을 죽이려 든 것인가. ”
“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제가 어떤 사람을 짝지어 주고, 어떤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지 그것에만 관심 있어 하고 저를 향해 웃어주지는 않잖아요. 근데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안 물어보고 그저 웃어주기만 했어요. ”
“ 그래서 기분이 어땠느냐. ”
기분? 그 때 느꼈던 기분이 어떤 것일까. 처음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듯해서 설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평소와 다름없이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그들의 짝을 지어주면서도 아니다 싶은 이들은 잘라내고 그 삶을 억지로 끝을 내면서 의문을 가지게끔 했었다. 과연 내 운명의 사람이라던 그 사람도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되고 또 하루에도 수백 번을 두려운 광경을 목격하면서까지 자신의 곁에 있어주려 할까? 그렇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불행이 그 사람에게까지 옮겨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환히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저와 함께 살아가다 보면은 절로 그 미소가 있던 곳에 어두운 그늘만이 자리하고 있을 것 같았다. 밉다는 이유를 하나 내버려 둔 채로, 차라리 그가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다른 운명의 짝을 만나기를 바랐었다. 그래서 그를 죽여주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살아남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과 연결된 기다랗고 새빨간 실을 잘라버리고 결국에는 그와 연결된 노랗게 꽃처럼 피어난 실마저 잘라버렸음에도 그는 언제 그런 실이 잘리기라도 했냐는듯이 살아나 다시금 그 실들을 안은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소녀는 왼손을 들어 자신의 약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던 실을 잘라버리고 나니, 약지에 걸려 있던 새빨간 실은 일순간 피를 토해내기라도 하듯이 뜨거운 열기만을 남긴 채 사라졌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돌아옴과 동시에 이번에는 약지가 아닌 제 손목에 걸려 다시금 그 사람과는 아직도 연결되어 있다고 제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 그 사람은 저와 함께 있어도 불행하지 않을까요? ”
형체 없는 이와 대화하는 것이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소녀는 그저 저도 모르게 나온 말로 물었고, 이에 형체 없는 이는 웃음이라도 참는 것처럼 헛숨을 들이키고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여전히 제 손목에 걸려 있는 붉다 못해 새빨갛게만 보이는 실을 눈으로만 바라보며 소녀는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렸고 뒤늦게서야 진정이 되었는지 형체 없는 이는 여러 번 기침을 하기에 이르렀다.
“ 내가 보기엔 말이다. ”
“ 네. ”
“ 애초에 물음이 잘못된 것 같구나. ”
“ … ”
“ 너와 있으면 그 사람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
“ 아니라 … ? ”
“ 행복하기 그지없을테다. ”
“ … 거짓말. ”
“ 내가 약속하지. ”
“ 만약에 거짓말이면 어떻게 할 건데요? ”
“ 거짓말일 리가 없다. ”
확신이라도 하듯 형체 없는 이는 단호하게 말하였고, 이에 소녀는 제 손목에 걸려 있는 것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올려 허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환청인걸까, 아니면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계속 대화를 하다보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보이는 것도 없는 주제에 약속까지 해오니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 그 쪽이 대체 누군데 그렇게 확신해서 말해요? ”
“ 나로 말할 것 같으면 …. ”
“ 말해봐요, 뜸들이지 말고. ”
“ 훗날 알게 되겠지. ”
“ 뭐라구요? ”
아마 말하는 이의 형체가 제 눈 앞에 보였다면 한 대 쥐어팰 기세로 소녀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자, 형체 없는 이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낮게 헛헛, 하고 짐짓 위엄 있어 보이려는 듯이 웃더니 이내 전과는 달리 가벼운 어조로 한 마디만을 남겨놓고는 소녀의 귓가에 아른거리던 목소리를 치워내 버렸다.
“ 뒤를 돌아봐. ”
“ 뒤? ”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낌새가 이상한 것을 느낀 소녀가 뒤를 돌아보자, 온통 하얗기만 한 병실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한 남자가 언제부터였는지 두 눈을 뜬 채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맑다 못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제 죄를 토해낼 것만 같은 눈동자에 그녀 하나만을 담은 채로.
“ 어 …. ”
“ 오랜만이네요. ”
제 손목에 걸려 있는 실이 보일 리도 없을텐데도 남자는 굳이 소녀의 눈에만 보이는게 분명한, 실이 걸려 있는 쪽의 팔을 들어올려 소녀가 서 있는 곳을 향해 뻗어왔고, 이에 소녀는 홀리기라도 한 듯이 가까이 다가가 그 손에 제 손을 더해 올렸다. 그제서야 남자는 안도한 것인지 깊은 곳에 머물러 있다시피 하던 숨을 겨우 토해내며 웃어보였다. 그리고 제 손 위에 올려진 소녀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힘주어 꽉 잡으며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그저 웃어주었다. 처음 만난 그 날처럼, 그렇게.
*
어색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전과 달리 훈훈한 분위기를 뿜어내다시피 하고 있는 병실 안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혀를 차던 이는 자신의 옆으로 누군가 지나가려 하자, 저도 모르게 비켜서려다가 제 조그맣기만 한 손을 내려다보고 나서야 고개를 좌우로 저어대며 다시 한 번 혀를 차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상관없이 그를 지나치려던 사람이 그에게 부딪히기라도 할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왔고, 그는 조금 전의 비켜서려던 행동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가만히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 아, 이 느낌은 별로 좋지 않다니까. ”
그의 몸이 실체하지 않는 것처럼 지나가던 사람은 그저 가던 길을 가려 아무렇지 않게 그를 통과해 걸어갔고, 이에 그도 아무렇지 않게 제 몸을 한 번 훑어보며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손으로 이곳 저곳을 툭툭 두들기며 한탄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그러다가도 병실 안을 흘긋 바라보고서는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닌 모양인지 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기분 좋게 웃기까지 했다.
“ 위엄있는 척 목소리 흉내내는 것도 어렵고. ”
또 투덜거리다가도 병실 안의 두 남녀를 보고 나면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건지 그는 헤실헤실, 웃으며 연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제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를 반복하더니,
“ 그래도 나중에 엄마, 아빠로 만나려면 어쩔 수 없었으니까, 뭐. 착하다, 이홍빈. ”
제 마음에도 쏙 드는 말과 행동들이었는지 한 손을 들어 스스로 제 머리를 쓰다듬는 흉내를 내기에 이를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저 혼자 중얼거리며 병실 문 앞에 서서 서성거리던 그는 병실 안의 남자가 소녀의 손을 잡고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아 소녀가 난감스러워 하는 지경에 이르자,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려다가도 참을 수는 없었는지 급기야 양 볼에 바람을 한껏 넣어 부풀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근데 우리 엄마 아직 미성년자 아닌가? 아빠는 늑대였네, 늑대였어. ”
그리고 어느새 제 옆에 서서 우물쭈물거리며 옷깃을 잡은 채로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 꼬마의 손을 굳세게 잡고는 혹여 놓칠 새라 다시 한 번 손에 꼭 쥐어보며, 꼬마에게 상기시키려는 듯이 여유로운 다른 한 손으로 병실 안을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 아빠는 늑대야, 늑대. 알았어? ”
“ 느때. ”
“ 느때 말고 늑대. 어휴, 하긴 네가 뭘 알겠냐. ”
“ 느때. ”
“ 그래. 느때해라, 느때. ”
무시하는 듯한 그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꼬마는 어린 것과는 상관없이 눈을 한껏 치켜뜨고 그를 째려보며 들고 있던 노란 인형을 병실 안으로 집어던지려 했다. 그러자 그것을 겨우 받아든 그는 연신 혀를 차며 이 놈의 집구석, 이라고 중얼거리더니 꼬마를 양 손으로 들어올려 품에 안고는 옆으로 한 걸음 옮겨 병실 문 앞에 쓰여진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꼬마가 바라보게끔 했다.
“ 차학연. ”
“ 차하견. ”
“ 그래, 차하견이고 차학연이고 기억해두기만 해둬. ”
“ 응, 차하견. ”
“ 고집은 더럽게 세네. 여튼 기억해둬. 차학연이 아빠. ”
“ 느때. ”
“ 그래, 늑대. 그리고 저기 저 안에 늑대한테 붙잡힌 사람이 별빛. 우리 엄마. ”
“ 엄마. ”
“ 그리고 너는 정택운, 나는 이홍빈. 형제. ”
“ 시뎌. ”
“ 뭐? ”
“ 형 시뎌. ”
아직 어려서 그런지 혀가 짧아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음에도 형이 싫다고 분명히 또박또박 말하면서 자신을 째려보는 꼬마를 보자 열이 뻗쳤는지, 아까 전까지만 해도 꼬마가 던지면 떨어질새라 받아들어 손에 쥐고 있던 인형을 병실 안으로 냅다 던지며 그는 악을 질렀다. 이 놈의 집구석, 이라고 꼬마 말고는 아마 아무도 듣지 못할 괴성을 지르면서.
*
툭.
잡혀 있는 손이 부끄럽기 그지없어 저도 모르게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녀는 병실 문이 있는 쪽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그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고 이내 제 시야 끝에 잡힌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혹여 떨어질 새라 놓아줄 생각을 않는 손을 겨우 놓아주게끔 만들고나서야 문 앞으로 다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집어들었다.
“ 인형이네. ”
새 것마냥 깨끗해 보이는 노란 스펀지밥 인형이 병실 안에 있던 둘만이 모르는 그 이야기가 꿈이 아닌 현실이었음을 각인시켜주듯이 소녀의 손에 가만히 들려 있었다. 멀지 않은 미래를 미리 이야기라도 해주듯이,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며.
기분도 꿀꿀하고 해서 잠깐 별 소재 없이 생각나는대로 흘리듯이 쓴 글인데, 항상 그렇듯이 이 글도 앞뒤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조각글이 됐네요.
차학연이 주인공인데도 학연이에 관한 내용은 별로 없다는게 또 함정이 되어버리고 .. ㅠㅠ
우리 빅스 1위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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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흑백 이번 시즌은 왤케 조용하지




